- 마블의 야심과 원근감은 놀라울 정도다. 원래 트릴로지로 기획되었던 작품들이 2편에서 최고조에 다다랐다가 3편에서 삐끗하거나 무너지는 일들은 꽤나 많다. (들쑥날쑥했던 엑스맨 시리즈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마블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혹은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캐릭터들의 독립 시리즈를 이어왔고 그 갈등을 한 가운데로 갈무리해서 터트린다. 이것이 제작사의 혜안인지, 최초의 올스타 작품을 전두지휘한 조스 웨던의 공인지, 아니면 다음 바통을 이어받은 루소 형제의 공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연대기적 흐름을 탈 뿐 각각의 작품들이 성찬에 어울릴만한, 최소한 다른 개별작품들과의 퀄리티 차이가 크지 않은 조립품으로서의 균일한 완성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단 하나의 영화를 제대로 만들기도 어려운데 마블은 이 많은 작품들을 큰 퍼즐의 피스로 정렬해놓았다. 그리고 그 퍼즐들이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은 좀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 <어벤져스 1>부터 도화선으로 깔려있던 멤버들의 불화, 특히 토니와 스티브의 대립은 <시빌 워>에서 마침내 폭발로 이어진다. 이를 어벤져스가 아닌 캡틴 아메리카의 단독 시리즈에서 터트렸다는 점은 상기할 만하다. 어찌됐건 마블 세계관에서 가장 정치적인 쟁점을 맡을 적역은 캡틴 아메리카 뿐이다. 속편으로서 이런 식의 팽창은 <어벤져스 2>를 거치고 난 후 블록버스터의 한계 효용에 따른 필연이다. 동시에 독립된 작품을 어벤져스 전체의 세계관으로 축소시킬만큼 캐릭터들이 견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자신감으로도 비춰진다. 열 두명의 히어로가 등장해 날뛰는 가운데에서도 캡틴의 존재감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중심인물은 엄연히 캡틴 아메리카고 <시빌 워>는 결국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가 된다. <어벤져스>가 고른 분배의 문제라면, <시빌 워>는 주인공의 무게중심까지도 다뤄야 한다. 어벤져스 시리즈와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후속작으로서 유기적으로 이어져야하기도 했다. 루소 형제가 짊어진 숙제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 기획 상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치운 게 사실이나 이번 작품에 선뜻 엄지를 치켜들기가 망설여진다. 총 열 두명의 히어로들이 뒤엉켜 싸운다,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싸워야한다, 라는 목표를 위해 서사가 희생된 감이 적지 않다. 초반부만 해도 소코비아 협정을 두고 정치 싸움으로 번져나가던 드라마가 중반부터 우정과 진실 사이의 미시적 드라마로 쪼그라든다. <시빌 워>가 시빌 워여야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어벤져스 멤버들은 소코비아 협정에 찬성하느냐 마느냐로 갈라져있지 않다. 정확히는 "버키"를 어떻게 할 것이냐로 갈려있다. 그렇다고 버키가 정치적 중요성을 업은 인물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한 쪽은 행정적 편의를 우선한다. 한 쪽은 행정 절차를 무시한다. 일단 잡고 보자와 잡으면 안된다는 측이 서로 고집을 피우는데 그 분기점은 자유와 통제가 아니라 내 친구다, 범인이다의 개인적 관계가 전부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는 캡틴도 아이언맨도 짜증나게만 보일 것이다. 한 마디를 안지는데 지지 않으려는 이유가 한없이 단순하다.
- 오히려 정치적 쟁점이 되는 캐릭터는 완다 막시모프다. 완다가 크로스본의 폭발억제를 실패했기 때문에 소코비아 협정이 발의되었다. 캡틴과 아이언맨은 완다를 두고 상반된 태도를 취한다. 완다는 소코비아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캐릭터를 두고 통제와 자유의 샅바싸움이 팽팽해진다. 심지어 가장 공명정대한 비전이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완다를 구속한다. 이런 면에서 <시빌 워>의 주제는 완다 막시모프를 중심으로 더 정치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이 캐릭터의 불안정한 내면,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죄책감, 그리고 인간성의 한계에서 자유로운 캐릭터가 제시하는 일차 답안 등, 정치적 드라마의 밑바탕이 이미 형성이 되어있었다. 더군다나 염동력과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능력의 측면에서도 완다는 써먹기가 편리하다. 이 캐릭터가 폭주할 경우 물리적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히어로들이 이를 말리다가 선을 넘기도 간편하다. 완다는 활 쏘고, 전기로 지지고, 방패 던지고, 이런 히어로들이랑은 그 리스크가 다르다. 때문에 이 캐릭터의 "미성숙함"을 발화점으로 삼았으면 이야기가 더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극 초반의 작전에서 완다의 실수를 "미숙함"이 아닌 "불안정"에서 찾았다면, 본인을 포함해 모든 이가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싸울만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작에서 나이트로의 폭발 역시 무책임한 히어로들이 자초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버키의 등장 이후 분쟁 요인으로 설정되었던 캐릭터는 불만 지피고 중반까지 빠져있다. 대신 파프리카 요리에 열심이다. 그가 캡틴 측에 서기로 한 이유나, 호크아이의 거친 연설도 당위를 말하진 않는다.
- 공항 시퀀스의 밸런스를 최우선하다보니 캐릭터의 일관성도 살짝 깨진다. 죄책감의 당사자인 완다가 왜 캡틴을 선택하는지, 소속 기관에 대한 회의가 짙을 수 밖에 없는 블랙 위도우가 왜 정부에 협조적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이를 무마할 이야깃거리들은 있다. 완다는 비전의 자상한 겁박에 얽매여있었고, 블랙 위도우는 후에 블랙 팬서를 배반한다. 여태껏 자유주의자로 살던 토니 스타크가 이제 와서 정부에 소속되려 한다는 것도 그다지 매끄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자기 성찰은 이미 <아이언맨 1>에서 끝났고 토니는 무기상인으로서의 책임을 아이언맨이라는 슈트를 만들어 "스스로" 지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개별 시리즈의 토니 스타크와 <시빌 워>의 토니 스타크 사이에는 그동안 겪은 사건들과 시간의 흐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고집에 그 성격이라면 아이언맨을 고집하는 대신 은퇴하는 것이 더 들어맞지 않을까. 슈트를 포기하지 않고서 정의를 추구하려는 이 캐릭터의 욕심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정치적 부분에서 내적 논리가 이어지는 캐릭터는 캡틴 아메리카 뿐이다.
- 소코비아 협정을 두고 영화가 갈등을 야기하는 양상 역시 탄탄하지는 않다. 원작은 히어로들의 처우를 두고 "자유"를 이야기했다. 이와 달리 영화는 히어로들의 처우를 두고 "죄책감"을 다루려 한다. 그런 점에서 소코비아 협정은 출발점부터 사실 정치 문제가 아닌 윤리 문제에 가깝다. 그런 부분에서 스티브의 윤리적 주장은 별 다른 반론의 여지가 없는 원론이다. 정부기관에 소속되는 것이 다른 사고의 예방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지리아 폭발 사태가 통제가 부족해서 생긴 일도 아니었다. 이를 받아치기 위해서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116개 국가의 압력에 일단 져주자" 라는 타협론이나 "현재 어벤져스의 일처리는 지나치게 파괴적이다" 라는 통제의 필요성을 설파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어벤져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 토니 역시 소코비아 사태로 죽은 아이로 죄책감의 연대만을 설파한다. (타협론은 그의 대의를 설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미안하니까 소속되자 - 라는 주장은 앞뒤가 그리 맞지 않는다. 토니와 스티브의 대화 사이에 전편 <윈터 솔져>에 관한 이야기가 더 디테일하게 있었다면 정치적 입장 차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지 않았을까. 쉴드조차도 타락한 현실을 스티브가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116개 국가를 다 부술 거냐고 토니가 항변하는 식으로 "자유의 정도와 소속의 필요악"을 가지고 이야기했다면 그 주제의식이 전편에서 더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원론은 언제나 이상적이고 현실과 마찰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 소코비아 협정의 체결 중 비엔나에서 테러가 발생한다. 그리고 버키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여기부터 간소하게나마 이념의 대립을 다루던 드라마는 "실체"를 둘러싼 스릴러로 중심을 옮긴다. 캡틴의 정치적 주장은 희미해지고 1,2편을 두고 이어져온 친구를 구하는 이야기로 노선이 바뀐다. 거기에 블랙 팬서의 복수극이 끼어든다. 히어로들의 대립은 원한과 오해로 점철된다. 소코비아 협정은 맥거핀급의 소재로 전락한다. 이것은 장르의 전환이나, 예정된 맥거핀 활용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어영부영 다른 주제로 퉁치고 넘어가는, 일종의 둘러대기다. "소코비아 협정은?" "지금 그게 중요해? 캡틴이 버키를 구해야 한다고!" 모든 히어로들이 버키의 행방에 주목하고 정치적 대립의 열쇠는 숨겨진 진실로 그 화두가 넘어간다. 버키가 범인이냐 아니냐가 키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정작 소코비아 협정을 제의한 거대권력으로서의 유엔, 100여개의 국가는 그 입장을 전혀 바꾸지 않고 있는데도 말이다.
- <시빌 워>의 제목을 바꾸고 소코비아 협정을 빼버렸다면 이야기의 갈등은 캡틴의 우정극(브로맨스)으로 더 명확해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현재진행형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과거사를 두고 버키의 처분을 이야기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는 극 초반에 서술되는 1991년의 혈청 미션과도 더 들어맞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카르마"이기 떄문이다. 초반부 아이언맨과 완다가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자신들의 과거다. 후반부 아이언맨과 캡틴이 대립하는 결정적 이유도 버키의 "카르마"다. 과거의 죄를 묻고 캡틴과 아이언맨은 격렬하게 부딪힌다. 영화가 최종카드로 써먹는 것도 자유와 통제가 아닌, 과거에 대한 이야기다.
- 다만 이 카르마의 드라마에서도 영화는 다소 기만적인 연출을 한다. 먼저 토니 스타크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설정이 그렇다. 아이언맨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 통틀어서 토니 스타크는 단 한번도 부모님에 대한 상실감을 비춘 적이 없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애증을 보이지만 그게 부모의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다. 선지자를 인정하는 천재의 오만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그러나 <시빌 워>에 들어서 갑자기 토니 스타크는 부모, 특히 한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로지 후반부의 분노 폭발을 납득시키기 위해 깔려있는 밑밥이다.
- 캡틴이 버키를 보호하는 것도 그렇다. 이는 이 영화의 총체적인 문제점이기도 하다. 어떤 질문을 던지면 엉뚱한 답을 할 뿐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미뤄놓은 채 원초적인 감정싸움으로만 자꾸 몰고 가는 것이다. 맨처음 영화는 소코비아 협정을 들이대며 자유와 통제를 이야기했다. 그 다음 영화는 버키를 이야기하며 우정 섞인 진실게임의 형국으로 몰고간다. 진실 게임이 끝나면 부모의 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과거의 죄에 대한 질문에는 친구라는 대답으로 둘러댄다. <배트맨 V 슈퍼맨>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의 해결이다. 초인과 사회의 갈등이, 인간적인 문제로 단순해져버린다. 왜 여기서 캡틴은 소코비아 사태의 피해자들을 토니에게 대입시키지 않는가? 일차원적인 고집만 부리는 캡틴을 보면 좀 괴로울 지경이다. 물론 1편과 2편의 시간이 흐르며 유일하게 남은 동세대이자 베스트 프렌드를 죽게 할 수 없는 그의 절실함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나, 영화가 내세우는 논리가 캡틴의 "인간관계"여서는 안됐다는 것이다. 영화는 분노 가득한 질문을 던지고 "He's my friend"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한다. 싸움 도중에도, 에필로그에도 캡틴은 자유의지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 이 영화의 메인 빌런인 지모는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그는 정치극을 스릴러와 휴머니즘 드라마로 전환시키기 위한 일종의 트랜지스터인데, 그 기능성 때문에 플롯 상의 여러 구멍이 생긴다. 그는 전지전능에 가깝다. 혼자서 모든 정보를 모으고 테러기구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변수가 많은 계획들의 끝을 정확히 예측한다. 1. 버키가 무사히 테러 기구에 잡힌다 2. 버키가 무사히 탈출한다 3. 버키와 캡틴, 아이언맨이 시베리아 기지까지 함께 무사히 도착한다 4.버키와 캡틴, 아이언맨이 함께 비디오를 보고 아이언맨이 분노를 터트린다. 계획이라는 것은 자신이 통제 가능한 변수들을 조합해 가장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그래도 어찌어찌 해 줄거야" 라는 낙관과 믿음으로 세우는 게 아니다. 체포과정에서 버키가 사살될 수도, 버키가 비엔나에서 탈출하지 못했을 수도, 시빌 워가 발발하는 대신 캡틴이나 아이언맨 둘이 합의했을 수도, 시베리아에 못왔을 수도, 시베리아에 왔지만 생각보다 비디오를 본 반응이 시큰둥했을 수도 있었다. 그 비디오를 구했다면 시베리아 기지에서 그렇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시빌 워 임시연합군을 기다릴 이유도 없다.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돌아가 그 비디오를 세상 천하에 퍼트리는 게 여론전으로서 훨씬 더 악랄한 방법일 것이다. 때문에 쉘터 안에서 히어로들의 분열을 바라보며 목적 완수를 했다는 듯이 구는 그의 모습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호텔의 의사 시체를 보여줄 정도로 친절하고 허술하다. 이는 오로지 플롯을 위해 오해를 시키거나 풀어주는 캐릭터의 오류다. 결정적으로, <시빌 워>는 내분일 때 그 의미가 가장 큰 드라마였다. 악당이 없었을 때 자중지란의 텍스트와 정치적 주제가 완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모의 등장과 활약으로 인해 <시빌 워>는 "악당"에 의해 휘둘린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인간적이건, 히어로의 반대편에 선 자가 거짓말을 해서 어벤져스는 그 꼴이 난 것이다. 여기에 "무의미한 복수"라는 텍스트를 완결시키려 하는 통에 이야기가 더 산만해진다. 스릴러와 드라마 모두를 끌고 가려는 점에서 지모는 너무 무리한 과제를 등에 업었던 캐릭터다.
- 지모가 끌고 가는 서사는 여러 주제를 동시에 말하지 않는다. 조화되어야 할, 혹은 통일되었어야 할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나오는 형태다. 토니 스타크는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티브 로저스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버키가 나오면서 스티브 로저스는 우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실에 도달한 이들은 죄와 복수에 대해 이야기한다. 티찰라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한다. 소코비아 협정은 온데간데 없고 이야기는 개인의 성찰과 아픔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억압의 상징인 수중감옥도 캡틴의 보이지 않는 활약에 의해 간단하게 처리된다. 통제의 부작용과 권력기관의 부조리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질문해야 하는 씬에서 "아무튼 구해냈습니다"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처리되는 것이다. (<블랙 팬서>의 프롤로그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별로 성의있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아니다) 합쳐질 수 없는 주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 파편에 휘말리며 잊혀지거나 뭉개진다. 어차피 연계된 세계관이니만큼 스티브의 편지로 갈등을 어설프게 메우려 하기보다는 아예 찢어진 상태로 둬서 비극을 더 강조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 그래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이하 <시빌 워>로 통칭)는 디즈니의 <겨울왕국> 같은 영화다. 불완전한 서사에도, 어떤 장면의 임팩트가 대단하기 때문에 영화 전체에 대한 인상까지 결정되어버린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공항 전투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MCU 최고 작품의 자리에 <시빌 워>를 놓을지도 모른다. 공항 전투씬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윈터 솔져>와 <어벤져스 1>의 왕좌를 넘겨주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항 시퀀스가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의 대표적인 액션 시퀀스들, 1:1:1 도로 추격전, 6:6 공항 전투씬, 1:2 시베리아 결투씬들은 출렁거리는 서사를 잊게 만들만큼의 위력이 있다.
- 루마니아의 액션 시퀀스는 불완전한 서사의 전환 도중에도 일관되게 유지되던 서스펜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이다. 피아의 구분이 혼동된 가운데 무작정 도망치는 이와 무작정 잡으려는 이,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이의 위협이 마구 뒤엉키며 영화는 박차를 가한다. 캡틴과 버키가 만나고 시작되는 탈출씬에서부터 전작 <윈터 솔져>의 장점들은 재현된다. 우선 싸움의 최종 목적이 "승리"가 아닌 "탈출"에 맞춰져 있는 점이 그렇다. 캡틴과 버키는 상대의 침입을 저지하고, 도망가는 데 집중한다. 주인공들은 그 상황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초인적인 강함에도 전투 장면은 급박해진다. 별 다른 초능력이 없지만 단단한 방어구(무기)를 지닌 인물들이 육체적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한다는 점도 그렇다. 아날로그의 투닥거림이 빠른 리듬 속에서 전개되며 실질적인 타격감과 스릴을 만든다. 또한 쫓는 자들을 액션 더미로 묘사하지 않는 점에서도 해당 시퀀스는 위협적이다. 막힌 문을 상, 중, 하로 사격하고 들어가는 식으로 요원들은 프로페셔널하게 그려진다. 단순히 많은 수가 거치적거리는 상황이 아니라, 쉽지 않은 상대들이 무리를 이뤄서 하나의 작전을 수행하기 때문에 퀘스트의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
- 건물을 벗어나면 버키, 블랙 팬서, 캡틴이 본격적으로 1:1:1 추격전을 시작한다. 낙하 이후 영화는 주행중인 자동차를 초월하는 히어로들을 통해 현실적인 속도감과 슈퍼 스펙을 동시에 선보인다. 여기서 영화는 캡틴과 버키에 뒤지지 않는, 어쩌면 추월할지도 모르는 블랙 팬서의 초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바삐 쫓는 와중에도 히어로들은 내내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이크, 자동차, 맨몸의 다른 형태로 추격전에 다양성을 불어넣는다. 매달리는 액션을 통한 야수성과 단단함을 우선시하는 금속성으로 두 히어로의 액션을 구분하고 굴러가는 자동차를 통해 육중한 느낌으로 추격전을 마무리한다. 누가 더 빠르냐 힘이 세냐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들의 액션에서 무엇을 더 강조할 것인지 세심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 히어로들이 총결전을 벌이는 공항 시퀀스는 <겨울왕국>안의 Let it go 만큼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최고조에 다다른 갈등이 마침내 액션으로 폭발하고, 가장 흥겹고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벌어진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스파이더맨과 앤트맨이다. 블랙 팬서와 달리 공항씬 이전에 급히 섭외된 이들에게 포커스를 주고 여지껏 없었던 유머포인트까지도 챙겨주면서 영화는 마블 작품의 정수를 모조리 뽑아낸다. <엑스맨> 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도 능가할 정도의 다양한 능력들이 서로 어우러진다. 이 장면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개별시리즈와 어벤져스 시리즈가 이어져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 해당 장면에서 위엄을 불어넣는 캐릭터는 의외로 비젼이다. 그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위력적인 액션들을 보인다. 그는 유일하게 스파이더맨과 앤트맨에게 휘둘리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가장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순간 결투는 2막을 향해 달려간다. "캡틴 로져스!" 라고 부르는 폴 베타니의 목소리는 캐릭터의 정체성에 맞게 기이한 카리스마를 뽐낸다. (MCU에서 캡틴 로저스라고 부르는 이들은 어지간하면 적이었다) 각 진영은 진열을 가다듬고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열 두명이 달려가 맞부딪히는 장면은 그 간소한 인원수에도 가히 "전쟁"이라 불릴만 하다. 유난히 휑해서 오로지 결투의 장으로서만 기능하던 공항도 이 때만큼은 전장으로서 존재한다.
- 그럼에도 이 장면을 온전히 좋아하기 어렵다. <겨울왕국>의 Let it go씬처럼, 이 장면에서 갑자기 극의 일관성이 깨진다. (물론 이는 서사의 중심에 관한 이야기라 엄밀한 비유는 아니다. <겨울왕국>의 분위기는 일관되게 이어진다) 여태껏 이어지던 스릴러로서의 기류가 공항 시퀀스에서 난데없이 흩어지고 만다는 게 문제다. 심각하던 이야기는 갑자기 히어로 놀이마당으로 변질되고 영화는 관객들을 정신없이 웃기기 시작한다. 스파이더맨을 위시한 캐릭터들은 농담 따먹기를 계속 시전하고 영화는 이 부분에서만 유난히 어벤져스스러워진다. 공항 시퀀스를 빼보면 <시빌 워>는 내내 무거운 분위기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고, 주인공들의 과오는 스스로에게 돌아오며 각자가 단죄하고 막으려는, 비장미 가득한 이야기다. 그런데 공항 시퀀스부터 여태 몰입하던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괴리감마저 느낀다. 복수와 진실의 딜레마를 가진 윈터 솔져가 절체절명의 미션을 앞에 두고 팔콘과 만담을 하고 있다. 가장 진지한 캐릭터까지도 농담에 휘말리는 모습 때문에 극 전체가 가벼워져버린다.
-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더맨과 앤트맨은 이 영화를 망쳐놓은 가장 큰 원흉이기도 하다. 특히 스파이더맨은 서사에서 분리되어 노골적으로 캐릭터의 소개에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소코비아 협정이 뭔지, 왜 공항에서 히어로들이 싸우는지도 모른다. 아무 연결고리도 없는 캐릭터를 하이라이트에 끌어오느라 친히 토니 스타크가 등장해 멍석을 깔고 놀 판을 마련해주고 있는 셈이다. <시빌 워>에서 스파이더맨을 보는 것은 반갑고, 그는 기대만큼 강력하다. 그럼에도 그 캐릭터가 장엄해야 할 서사의 훼방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앤트맨 역시 공항에서 만나 허겁지겁 싸움에 동원되는 모양새가 자연스럽진 않다. 우스꽝스러운 활약은 차고 넘치지만 진지한 분위기를 싸그리 축소시켜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지구에서 현재 모일 수 있는 모든 초인들이 모여 절체절명의 승부를 벌이는데, 처음 본 히어로들의 진기명기에 서로 놀라며 신을 낸다. 세계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데 거미와 개미가 꼬여있다. 이는 시퀀스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여태 이어져온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유난히 돌출되어있다는 게 문제다.
- 물론 변명의 여지가 없진 않다. 드라마의 절정을 시베리아의 2:1 태그매치에 배치시키기 위해 중반에 등장하는 공항 시퀀스의 감정은 죽여놓아야 했을 것이다. 아직 어벤져스 세계관과 줄이 닿지 않은 캐릭터들을 갑자기 무겁게 만들기도 어렵다. 활약상을 고루 맞추기 위해서는 이들의 명랑한 컨셉을 최대한 살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히어로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시종일관 어둡다면 여기에 적응하지 못할 관객층도 꽤 있을 것이다. <시빌 워>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여야했고, 그런 점에서 공항 시퀀스는 루소 형제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다. 애초에 밸런스가 맞지 않는 히어로들을 이 정도로 고루 보여주는 것도 엄청난 일이다.
- 시베리아 시퀀스는 생각보다 더 처절하다. <시빌 워>가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가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MCU에서 여태 이런 적이 없었을 정도로 인물들은 두들겨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뒹군다. 여태까지의 액션이 현란한 쇼에 가까웠다면, 이 부분에서는 서로를 "깨부수는 것"에 더 집중한다. 이미 신뢰가 박살난 인물들의 관계가 액션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아이언맨의 슈트가 지나치게 다운그레이드가 되었다는 의구심이 들지만 밸런스 조절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공항 시퀀스에서 다른 히어로들에게 슈트가 반파되고 그게 시베리아씬으로 이어졌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은 든다) 캡틴이 맨손으로 아이언맨을 제압하는 게 살짝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헐리웃 액션 공식의 대입결과이기도 하다. 뭐가 됐든 마지막은 몸뚱아리 깡싸움으로 끝나게 마련이니. 인물들의 "힘"이 아닌 "고통"을 부각시키는 부분으로서 해당 시퀀스는 제 몫을 다 했다. 특히 방패와 리펄서건의 격돌은 이 영화가 노린 장엄미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 장면들만 떼놓고 보면 <시빌 워>는 정말 잘 빠진 영화다. 액션들은 당초에 노린 의도를 그대로 수행하고, 필요한 드라마들을 힘껏 외친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로 이어졌을 때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곡선을 그린다. 히어로들의 이야기라기에는 결국 토니와 스티브가 버키를 두고 벌이는 감정다툼이고, 캡틴 아메리카의 이야기라기에는 다른 이들의 활약이 너무나 크다. 그래도 보여줘야 할 것들은 보여주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은 예상된 타협의 범주에서 적당히 흘려넘긴다. 어찌됐건 캡틴은 캡틴으로 남아있고 모두가 흩어진 파티장에서도 신의의 조각 하나를 남긴다. 고집과 희생의 대의가 좀 쪼잔해보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어울리는 퇴장식이다. 퇴역군인의 현장복귀가 기다려진다.
@ 내가 감독이라면 추후의 어벤져스에서 버키나 캡틴 둘 중 하나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특히 토니와 버키 둘 중 하나의 위기에서 캡틴이 죽기에 더 없이 적절한 판이 깔렸다.
@ 테렌스 하워드의 워 머신이었다면 추락하는 장면이 훨씬 더 슬펐을텐데.
@ 크로스본즈를 조금만 더 길게 넣어줬으면 하는 개인적 바람.
@ 그래도 최고의 장면은, 헬리콥터 리프팅 씬으로 뽑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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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이하 <시빌 워>로 통칭)는 디즈니의 <겨울왕국> 같은 영화다. 불완전한 서사에도, 어떤 장면의 임팩트가 대단하기 때문에 영화 전체에 대한 인상까지 결정되어버린다."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수 없군요
메인빌런인 제모인지 지모인지... 이 녀석이 가장 큰 시빌워의 구멍이 아닐 수없죠 ..
배우가 연기를 못한게 아닌데 작가의 구멍이 컸다고나 할까요 .. 스토리 구성이.. 하여튼 화려함이 모든걸 가려주는 영화랄까요 크크
다만 거미와 개미같은경우 마블에서 계속해서 껴넣을려고 했단 녀석들이라고 실드를 치고 싶긴하네요
근데 스파이더맨의 경우 이질감이 확연한느낌은 있습니다 전대의 스파이더맨 영화들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상당히 어린 스파이더맨을
내세운게..
저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결국 버키는 본인의 의지대로 토니의 부모님을 죽인 것이 아니며 정신이 프로그래밍된 대로 꼭두각시에 불가했거든요 애초에 본인이 원해서 윈터솔저가 된것도 아니구요 그상태에서 살인에 대한 죄를 묻는다는 것이 캡아친구 버키에겐 불합리하죠. 캡아는 옳음을 믿으며 조종당하지 않은 버키를 지킬 뿐입니다. 정작 그 명령을 내린 하이드라 장교는 지모가 이미 죽여버렸고 가뜩이나 버키 본인은 자신이 극중에 죽인 사람들을 기억한다는데요.... MCU에서 제일 불쌍한 캐릭터라 생각합니다.
저는 캡틴이 버키를 계속 옹호한 것이 '친구라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캡아 1, 2편을 통해 계속해서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 자유 의지의 존엄성' 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캡아 1에서 로저스는 입대 기준 미달의 찌질이지만 굳건한 의지를 바탕으로 슈퍼솔져가 됩니다.
캡아 2에서 로저스는 히드라가 만들어 놓은(그러나 대다수가 속고 있는) 인사이트 프로젝트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의지를 미리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냐는 거죠.
마찬가지로 캡아 3에서 버키를 옹호하는 건 버키가 저지른 잘못은 (캡틴의 가치관에서 볼 때) 자유 의지로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70여년의 세월을 지나 생사고락을 함께한 유일한 친구이니 감안은 되었겠지만 말이죠.
어벤져스에서 로키의 세뇌에 빠져 쉴드에 엄청난 피해를 준 호크아이를 향해서도 캡틴은 아무런 추궁을 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아마도 캡틴의 가치관으로는 호크아이의 자유 의지로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일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캡틴이 찌질하게 친구 하나 살리겠다고 난장을 피는 민폐남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자유의지의 강력한 힘'을 믿고, 그것을 강제하고 말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하는 캐릭터인 것이죠.
캡틴의 많은 별명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sentinel of liberty'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시리즈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중간에 지모가 의사 시체를 보여준 것은 일부로라고 보여집니다. 그 정보를 흘림으로서 아이언맨이 캡틴을 쫓아 시베리아로 가는 것을 유도한 것이죠.
물론 지모가 일부로 노출했든 친절하고 허술해서 노출했든 본문의 지적처럼 너무 낙관적인 계획이라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요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