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은 장단이 뚜렷한 영화다. 단점은 서사에 있다. 이 영화의 서술 방식은 불친절을 넘어 기만적이다. 그 기만이 극의 핵심을 이루는데, 만듦새가 치밀하지 못해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복선은 충분치 않고 반전은 영성(데우스 엑스 마키나)을 빌어 제시된다. 물론 이러한 서술법은 <곡성>의 주제의식과 밀접해 있다. 그러나 플롯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감상자의 호의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시나리오다.
그 실패 위에서 영화의 성취가 빛난다. 플롯의 허점이 명확함에도 감상자는 빈틈을 쉽게 찾아내지 못한다. 적어도 극장 안에선 그렇다. 영화의 힘이 워낙 대단하여 관객은 극 중 인물마냥 홀려 버린다. 이 힘은 서사, 연출, 연기, 편집 어느 하나의 공로가 아닌, 총체적인 의미의 '영화'가 지닌 무언가에 가깝다.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은 그 기세에 진이 빠져 극의 단점을 되새김질할 여유가 없다. 최초 시사회 이후 평단과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부턴 매 문장이 스포일러입니다.-------------------------------
오프닝 씬으로 돌아가 보자. 외지인이 낚싯대에 미끼를 꿰고 있다. ‘미끼를 물었다’는 포스터의 카피는 영화의 서술법인 동시에 주제다. 사전 정보가 유례없이 적었던 것을 기억한다. 시사회 이후에도 떠돈 건 뜬구름 잡는 극찬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장르조차 모르고 극장을 찾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르 자체가 스포일러니까. <곡성>의 전반부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시골에서 알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경찰은 비이성에 기대 범인을 찾으며, 토속적 유머가 밸런스를 잡는다. 벌어지는 일들은 기괴하나 그 기괴함은 ‘꿈’으로 치부되고, 영화는 여전히 리얼리즘의 고삐를 쥐고 있다. 이건 전형적인 한국형 스릴러의 문법이다. 그러나 일광이 등장하는 순간 장르가 오컬트로 뒤바뀐다. 동시에 서술법 또한 오컬트의 그것으로 전환된다. 이 ‘한국형 오컬트’의 주 서술법은 샤머니즘과 기독교적 알레고리다. 스릴러의 서사는 지상의 것이며 사건엔 이유가 있다. 오컬트의 필수 요소는 ‘영성’이다. 신적 존재(Deus)를 빌어 전개되는 서사에는 이유가 없다.
하지만 관객은 전반부의 스릴러적 문법에 익숙해져 있다. 때문에 애써 이유를 찾으나 서사의 연결고리는 텅 비어 있다. 초반부 원인으로 지목되는 독버섯은 결국 맥거핀으로 사라져 간다. 처음 외지인의 집을 찾았을 때, 경찰은 저주의 흔적들을 발견하나 결과는 검거가 아닌 공포일 뿐이다. 자살한 여자는 외지인에게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외지인의 집에선 춘화가 비치고 효진의 노트엔 여자의 나체와 폭력적 이미지가 가득하다. 이어지는 효진의 반응은 성폭행당한 아이의 그것이다. 성이 저주의 매개일까 싶지만 성적 메타포가 다시 언급되는 일은 없다. 일광은 사건의 원흉으로 외지인을 지목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처음부터 무명을 귀신으로 몰면 될 일 아닌가. 굿 씬의 교차 편집은 기만이다. 외지인이 귀신이라는 일광의 설명과 장승에 대못을 꽂을 때마다 발광하는 효진과 외지인의 모습에서, 일광이 외지인과 한패라는 발상은 불가능하다. 이미 일가족을 몰살시킨 박춘배를 향해 굿을 벌이는 외지인의 모습은 후에 관객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 영화 내에서 기능하지 못한다.
직후의 좀비 씬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흠이다. 극은 한창 클라이막스에 오르는데 인물은 실없는 개그를 치고, 카메라는 뼈다귀를 비추며, 뜬금없는 B급 호러물 패러디에 관객은 실소한다. 이 씬은 낚시와 감독의 자기만족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후에 죽음에서 돌아와 신적인 존재로 화하는 외지인이 여기선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친다. ‘육신을 지닌 신’이라는 기독교적 알레고리를 위해 욱여넣은 장면이다. 절벽 아래서 괴로워하던 외지인은 무명을 보자 서둘러 뒤쫓는데, 이 구도는 반대여야 맞다. 무명이 귀신이며 외지인이 무당이라는 의심을 위해 들어간 장치일 뿐이다. 주인공 일행은 외지인을 찾아가나 그곳엔 아무런 흔적도 없고, 귀가하는 와중 절벽에서 떨어진 외지인을 치고 시체를 숨기나 재앙은 계속되며, 그는 동굴 속에서 부활한다는 전개가 좀 더 깔끔하지 않을까. 일광이 사진을 떨어뜨리는 씬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해석의 여지를 제한한다. 사진함이 사라진 것은 종구가 일광을 만나기 전이었으므로, 일광은 애초부터 외지인과 한패가 된다. ‘역살’이 맥거핀으로 사라지며 역살을 맞았다는 해석의 가능성이 닫히고, 얕은 복선은 부랴부랴 메워진다. 일광에 대한 복선은 훈도시와 이전 살인 현장들에 있던 굿의 흔적들뿐이었다. 하지만 훈도시는 그 전의 개그씬들에 묻혀 유머 코드로 지나가며, 우물에서 시체로 발견된 다른 무당들은 이전의 굿판에 일광이 개입했음을 부정한다.
이 모든 서사적, 기능적 허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오컬트의 장르적 특질이다. 영성은 모든 걸 가능케 한다. 이유가 없다는 건 모든 것이 이유라는 뜻 아닌가. 스릴러적 접근법으로 독해할 때, <곡성>에서 남는 건 개연성 없는 반전과 나홍진 특유의 진 빠지는 찝찝함뿐이다. 이 영화는 관객의 호의적 해석(장르적 접근법)을 필요로 한다. 이건 명백한 결점이다. 영화가 반드시 답을 줄 필요는 없다. 도리어 질문을 던지는 영화야말로 텍스트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러나 모든 서사는 내적 완결성을 지녀야 한다. 장치는 비록 맥거핀일지라도 나름의 기능을 다 해야 옳다. 극이 막을 내렸을 때, 저 장면은 왜 있냐는 의문에 ‘서사적 완결성을 해치지만 낚시와 종교적 상징성을 위해’라는 답이 나오면 곤란하다. 물론 오컬트에서 ‘신성’은 필수적이지만, 이는 서사의 빈틈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처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단의 열광 뒤에 냉소가 따르는 기저가 여기에 있다.
분명 이 영화의 시나리오엔 허점이 많다. 그럼에도 호평할 수밖에 없는 건, 그 ‘이유 없음’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곡성>의 주제의식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죽었던 외지인은 동굴 속에서 살아있다. 부활은 직유로서 신성을 말한다. 영화가 리얼리즘의 탈을 벗고 완전한 오컬트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순간이다. 신성을 뒤집어쓴 외지인은 예수의 말을 인용한다. 의심하는 이삼의 눈에 악마가 비치고, 사진을 찍는 그의 손엔 성흔이 있다.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것이 사제의 역할임을 기억하자. 이삼은 불완전한 사제다. 의심하는 사제는 주님을 찾지만, 눈앞의 ‘신’에겐 성흔과 악귀가 공존한다. 선도 악도 아니라는 뜻이다. ‘고놈은 미끼를 던졌을 뿐이여. 누가 걸릴 줄은 지도 몰랐것지’ 신이 인간의 운명에 무심하듯 미끼를 던지는 이는 고기의 운명에 관심이 없고, 고기가 미끼를 무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없듯 곡성이라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재앙 또한 이유가 없다. 종구는 왜 내 딸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묻는다. 관객이 복선을 찾듯 종구는 이유를 찾는다. 비극적 운명 앞에서 끝까지 원인을 찾아내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일까. 무명은 의심을 말한다. 아비가 남을 의심하고 또 죽였기 때문이라고. 딸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라는 종구의 대답은 합당한 동시에 무력하다. 처음 종구가 외지인을 찾았을 때, 저주의 흔적은 선명했고 효진의 실내화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외지인을 절벽에 떨군 건 무명이지 종구가 아니다. ‘의심’과 ‘살인’은 바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결국, 구원자의 위치에 있는 무명조차 재앙의 원인을 명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의심은 원인이며 또 원인이 아니기도 하다. 무명이 말하는 의심은 재앙이 아닌 파국의 원인이다. 재앙의 시작엔 이유가 없으나 사람을 파멸로 모는 것은 의심인 법. 종구는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무명을 의심한다.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피 칠갑을 한 가족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의심 때문일까. 두 번째 닭이 울었을 때 일은 이미 벌어져 있었다. 끝까지 기다렸더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종구와 효진 정도였을 것이다. 믿음의 대가는 반 쪽짜리 구원일 뿐이다. 재앙에는 선악 같은 인격적 개념이 없고, 그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벌어진다. 어떠한 구원도 이를 완벽히 막아내지 못한다. 분명 수습할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가장이, 무력한 인간이 그 앞에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운명적 재앙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파멸할 수밖에 없다.
비극 앞에서 인간은 각자의 최선을 다한다. 오이디푸스를 떠올려보자. 그는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 ‘최선’이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운명 속에서 우리는 발버둥을 친다. 늪에 빠진지도 모른 체. 그렇게 <곡성>은 신화적 비극성으로 삶을 환유한다. 이제 외지인과 재앙을 ‘침몰’로, 종구를 ‘유가족’으로, 효진을 ‘희생자’로, 곡성을 ‘안산’으로, 무명을 ‘다이빙벨’ 정도로 바꿔 읽어보자. 이 영화는 서사의 기능적 완결에 실패했다. 그러나 삶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예술’로서 완벽한 알레고리를 지닌다. 그 모든 결점에도 <곡성>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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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이 사건의 원흉으로 외지인을 지목하는 이유가 전혀 없는게 아니라 종구가 무명을 만났다는 것을 일광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게 가장 종구를 현혹시키기 좋아서 그랬겠죠. 굿 씬의 교차 편집은 너무 노골적으로 관객을 속이고자 하는 것이어서 좀 그렇지만 외지인의 의식은 노골적으로 박춘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거기서 일광과 외지인이 한패라는 발상은 얼마든 가능하죠 확신을 못해서 그렇죠. 그리고 우물에서 발견된 시체가 무당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나요? 자꾸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확신을 하시네요.
처음에 나오는 기괴한 살인 현장, 그리고 거기에서 보이는 기괴한 피를 뒤집어쓴 범인의 모습, 그뒤의 이야기 전개....관객들이 그후에도 리얼리즘을 기대하고 칼같은 인과관계 서사를 기대하진 않았을꺼 같습니다. 저도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모르고 갔지만 별로 그런 어색함을 느끼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정신없이 몰입하다가 나왔다... 에 가까웠으니까요.
저는 리얼리즘을 기대했습니다... 영화 끝날 때까지요. 독버섯이라든지, 외지인이 흐느껴 우는 장면이라든지 그런 거에 낚여서 말이죠.
그런데 좀비가 나오고 악마가 나오고... 이게 뭔가 싶더라구요. 스릴러로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보니 오컬트였던...
사실 인터넷에 누가 곡성을 보고 살인의 추억을 보는 것 같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렇게 감상문을 쓴 것을 보고 낚인 것도 있네요.
오독이 많은 리뷰인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끝까지 기다렸더라도 구할 수 있는 건 종구와 효진 정도였을 것이다."라는 부분이 그렇죠. 불난 집에서 외지인에게 한번 당했던게 꿈으로 무효가 되었듯 닭울음 세번을 기다렸어도 똑같이 됐을거라 보는게 타당합니다.
뭐랄까 혹평을 하기위해 결론을 정해놓고 쓴 느낌이 드는게, 글쓴 분께서 복선이나 의미를 못찾은 부분은 의미가 없다고 혹평하고 복선이나 의미를 찾으신 부분도 각종 이유를 대어 혹평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냥 이 영화가 영화내적으로 싫으셨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런 식의 리뷰는 좀 불공정한 것 같아요.
[이 씬은 낚시와 감독의 자기만족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악마가 예수의 모습을 해도 너희들은 믿겠는가?' 라는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감독의 기만적인 서술 구조가 최악이죠.
좀비 씬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 가 감독 자기 만족을 위해 끝까지 고집을 부린 것 같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