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을 한줄기로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믿음’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누가복음서의 말씀을 인용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눅24:38)
이 말씀은 악마로 변한 외지인의 마지막 대사이기도 하다. 영화는 수미상관으로 ‘믿음’을 말하고 있다.
종구는 영적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처음 살인사건이 났을 때도 그는 ‘버섯, 환각증세’를 말하며 동료의 ‘외지인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경찰인 그는 ‘증거’만을 믿었다.
하지만 기이한 사건은 계속 이어졌다. 파출소 앞에 나체로 나타난 여자, 그리고 집단 살해 사건. 종구는 ‘이거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기의 딸이 비슷한 현상을 보이자 이제 의심에서 끝나지 않는다.
분노와 집착. 외지인에 대한 의심은 확증으로 바뀌었다.
종구의 어머니는 유명한 무당을 알아뒀다며 빨리 굿을 하자고 한다. 종구는 어머니의 제안이 탐탁치 않지만 별다른 대안도 없다. 굿판이 제대로 벌어졌다. 굿이 진행될수록 효진의 고통은 더욱 커진다. 종구는 일광의 굿을 끝까지 믿지 못한다. 결국 깽판을 놨다.
일광의 굿은 유대교의 제사와 부두술이 혼재돼있다. 흰닭(비둘기)과 흰염소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유대교, 정승에 못을 박는 모습은 부두술의 장면이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 지적한 우상숭배의 모습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이후에 오는 저주도 성경에서 나온 것과 유사하다.
이 영화에선 ‘굿=살인’으로 이어진다. 영화에선 외지인과 일광만 다루고 있지만, 어쩌면 다른 무당이 또 있었을지 모른다. (살해현장 등을 보면 굿의 방식이 약간씩 차이가 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선 모든 무당은 악마의 조력자라고 보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
성경 마태복음서 12장에는 이와 관련한 부분이 있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자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는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고 반론한다. 귀신으로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게 성경적 관점이다.
미완성의 굿을 마친 후, 종구는 친구들과 클랜을 결성해 몹을 잡으러 떠난다. 몹잡이를 실패하고 돌아가던 중 외지인이 갑자기 떨어져 차에 치였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유기한다. 병원에 와보니 효진이가 정상으로 돌아와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주는 끝이 아니었다. 종구에겐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다. ‘무슨일이 생겼다’는 직감. 일광을 찾아갔지만 일광은 이미 떠났다. 그리고 걸려온 전화, 일광은 종구에게 ‘집으로 가라’고 한다. 집으로 가던 중, 무명이 그를 가로 막는다. 그는 ‘가지마라’고 한다. ‘가려면 닭이 3번 울고 가라’고 한다. 일광과 무명사이에서 흔들리는 종구.
무엇을 믿어야 하는걸까. 결국 그는 일광을 믿어서가 아니라 무명을 믿지 못해서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영화는 진실의 몇 컷을 보여준 채, 막을 내린다.
종구가 무명을 믿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사실 이 영화는 무명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엔딩컷만 조금 손본다면 무명이 악령이었다고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영화는 묻는다. ‘넌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느냐’
또 다시 말한다. ‘너는 왜 그것을 믿느냐’
효진의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라는 대사는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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