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모스 꾸에에님의 글입니다.
연재 속도를 어기고 좀 건너뛰었습니다. 너무 옜날 글만 올리면 식상할 것 같아서 새 글이 올라오면 새글은 바로 올리고
옜날 글을 그 사이사 이에 넣는게 더 좋을것 같아서요.
http://sininus.egloos.com/4340953
http://sininus.egloos.com/4343040
-----------------------------------------------------------------
9.0
저그라는 종족을 SM에 비유하면 역시 매조히즘 쪽이다. 너무 선정적인가. 저그라는 종족은 유닛의 컨트롤로 재미를 보기 힘든 종족이다. 더해서 프로토스의 사이오닉 스톰과 같이 사용 여하에 따라 대량살상무기가 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장에서 변수를 만들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며, 다시 말해 싸우기 이전에 모든 변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 더해서 크립 위가 아니면 해처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는 특성으로 인해 도박을 걸기도 아주 어렵다. 상대방이 자신의 본진을 정찰했을 때 있어야 할 건물이 없다는 건 생각보다 큰 혼란을 유도한다. 도박적인 멀티인가, 아니면 전진건물?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몸을 움츠려야 하고 이 기세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 당연히 저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움츠리는 쪽이다. 1.08패치로 스포닝풀 가격이 상승하여 1해처리 전략 대부분이 사장되어버린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다. 상대방의 정찰병력을 잡을 때까지 자원을 쌓아놓다가는 순식간에 밀려버릴 것이기에 결국 대놓고 자신이 하는 것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그는 SM에 비유하면 역시 매조히즘 쪽이다. 그러면 얻어맞다가 끝나는가. 그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SM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것은 암묵적인 룰을 공유하는 기싸움의 성격도 갖고 있는데 새디즘 쪽으로 시작하더라도 매조히즘 쪽이 온갖 가학행위를 견디면 새디즘 쪽이 기세에서 밀려버리고 관계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이는 일반적인 비유가 아니기에 망설인 측면도 있으나 가장 확실하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적게 되었다. 조금 더 일반적인 비유를 하자면 바둑에서 후수를 노리는 입장이다. 일단 선방을 맞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에서는 5집반을 공제하는데,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그런 배려는 불가능하다. 결국 불리함을 안고 시작해야 하는데 해처리라는 건물이 갖는 사기성으로 인해 저그는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해처리는 모든 유닛을 생산할 수 있다. 적정수의 해처리와 자원만 확보되어 있다면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든 대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드론 한 부대가 생산되어 멀티기지가 순식간에 활성화될 수도 있고, 러커-저글링으로 응전하다가 갑자기 무탈리스크로 주력유닛을 바꿔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맞추는 것이고, 그 이전에 할 것은 대응이 가능한 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맞춰가기이다. 교전을 중심으로 경기를 진행하는 저그들은 그래서 특정시점까지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SD를 연타한다. 그리고 맞춰가기가 가능해진 어느 시점에 와서부터는 드론생산을 멈추고 병력생산에 몰두한다.(labylinth 인용) 홍진호가 드론만을 뽑다 3연속 벙커링을 당한 것, 박태민이 하이브 이후 어택땅 저그로 변신하는 것 모두 같은 이치이다. 맞춰가기가 핵심이기에 한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던 저그들 중 정찰이 약한 저그를 찾기는 힘들다. 동시에 맞춰가기가 운영이라 한다면 모든 저그는 운영형이다.
9.1
이번 장의 시작에 저그는 유닛 컨트롤로 변수를 만들기 힘들다고 미리 언급했다. 그래서 저그유닛의 운용은 어디까지나 부대 단위 병력운용이 중심이었다. 강도경에서 시작한 병력운용의 묘는 홍진호 시대에 와서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어떤 형태로든 홍진호를 이은 저그들까지도 공유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교전 도중 소수유닛의 컨트롤을 어택땅으로 해놓다 폭사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그유저에게 이건 그렇게 뼈아픈 부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큰 변수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딱히 컨트롤미스로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그건 계산의 오차범위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해설을 들으면 저그유저들은 컨트롤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는데, 그나마 랜덤 경험이 있는 김동준 해설위원의 경우는 더 정확한 해설을 했다. 컨트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컨트롤은 임요환의 마린 한 기로 러커 잡기나 서지훈의 레이스 펼치기 같은 바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소수유닛의 미세한 그것을 의미한다. (테란은 이런 컨트롤의 중요성과 효과가 바로 드러나는 종족이다보니 많은 이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이렇게 어택땅식으로 경기하던 저그유저들도 저저전에 들어가면 교전 도중에 맞는 저글링을 새저글링으로 바꿔치는 어려운 컨트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 보여줬는데, 저그유저들이 컨트롤에 집중하지 않은 이유는 못해서가 아니라 별 필요가 없어서였다. 나무에 집중하다 숲을 놓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다.
그나마 유닛 컨트롤을 적극활용한 저그는 조용호 정도였는데, 이 빠른 손은 수비와 견제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하이브 이후의 목동체제든 레어 단계에서 폭탄드랍이든 자신이 공격을 결정한 타이밍까지는 수비와 견제를 위주로 했으며, 자연스럽게 빛을 발하는 것은 소수유닛이었다. 조용호는 그래서 극소수의 유닛이 부딪히는 초반에는 극강이었고, 컨트롤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저저전에서도 오랫동안 강자였다. 심지어 저 이윤열에게 부정당하는 순간에도 지긋지긋한 초반흔들기를 모두 막아내고 경기를 중반으로 몰아갔었는데 이는 빠른 손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맞춰가기를 위한 노력의 연장으로 홍진호를 모태로 하는 저그들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한계였다. 맞춰가기 자체가 불가능한 최연성을 만난 순간에는 결국 다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9.2
테란을 무너뜨려라. 이것은 모든 저그들의 숙원이었으며 최연성의 등장 이후에는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도 무조건 이뤄야만 하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여러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그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최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저그에게 없는 다른 무엇이 필요했다. 자신에게 없는 무엇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랫동안 저그들이 압살당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글쓴이가 잘 모르는 부분이기에 반박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인데, 진화가설에 따르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종을 보존하고 또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는 것은 돌연변이라 한다. 이질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본이 되는 것들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통이라 불리는 세력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이단이라고 불리는 동형이면서도 이형인 세력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홍진호의 그림자가 너무도 크고 짙은 저그 내에서 소위 돌연변이를 찾는 작업은 너무도 어려웠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해가 뜨기 직전에 가장 어둡다고 하는가, 결국 이 오랜 기다림의 끝에서 저그는 빛을 만난다.
테란을 무너뜨려라. 다시 말해 최연성을 무너뜨려라. 이것은 저그만의 것이 아닌 프로토스의 숙원이기도 했는데 결국 그들은 최연성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최연성의 노쇠나 슬럼프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업적은 동족인 테란이나 강약관계에서 앞서는 프로토스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저그, 특정 기간 동안 44승 2패의 압도적인 전적을 보여주며 저그에게만큼은 지지 않을 것 같던 최연성은 결국 그 저그에 의해 무너졌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그 저그가 이전의 저그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저그였다는 것. 홍진호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그 근원이 테란이었기에 누구보다도 홍진호를 오해하고 받아들인 저그, 가장 저그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천적을 박살낸 이 선수로 인해 저그는 혁명을 맞이한다. 바로 컨트롤 혁명, 그것은 박성준과 함께 찾아왔다.
9.3
박성준이 질레트 스타리그 대활약할 때 엄재경 해설위원은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그의 최종진화형, 폭풍의 공격과 목동의 물량을 갖춘 폭동저그입니다!」 신명이 난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으나 워낙 폭동저그의 반응이 좋지 않아서 결국 박성준은 당시 스타크래프트 관련 커뮤니티에서 나온 <투신>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말 박성준이 저그의 완성형 폭동저그가 되었다면 엄재경 해설위원의 굴육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것 같다. 웃고 넘길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이니 여기서 넘어가기로 하고,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하면 아쉽게도 박성준은 저그의 완성형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성형 저그를 꿈꾸는 당대의 수많은 저그들이 놓쳤던 한 가지를 저그에게 주었다. 바로 유닛 컨트롤을 통한 우위 점유이다.
유닛 컨트롤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질 것 같은 전투를 이기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특히 파이어뱃을 제외하면 모두가 원거리 공격유닛인 테란의 경우 그 효과는 더욱 크다. 박성준은 처음에 테란이었으며 이후 저그로 전향했는데, 테란으로 경기할 때의 경험은 여기서도 작용하여 스스로에게 유닛 컨트롤을 통한 득점을 요구했다. 특히 박성준을 발굴하고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지금은 협회직원인 서형석 코치도 프로토스 중심의 랜덤이었기 때문에 둘 다 저그를 오해하고 시작했는데 그래서 두 사람에 의해 해석된 저그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박성준은 레어단계까지 대부분의 유닛 컨트롤에 손을 댔고, 그를 통해서 저그유닛은 새롭게 태어났다(labylinth 인용). 조용호보다 손이 더 빠른 저그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나, 어쨌든 박성준은 유닛 컨트롤로 점수를 딸 수 있었다는 말이다.
9.4
「러커를 방패로 저글링이 공격한다.」 울트라리스크를 러커로 대체해놓은 것 같은 말이다. 박성준의 저글링-러커 운용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게 전부인데, 안타깝지만 이건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저글링-러커가 동시에 달려들면 당연히 테란이 일점사하는 유닛은 러커다. 가장 걸리적거리는 유닛이기 때문이다. 저그에게도 저글링-러커에서 핵이 되는 유닛은 러커다. 교전에서 서로의 병력이 피해를 입었을 때 후속유닛이 도착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해주는 유닛이 러커이기에 당연한 결론이다. 더불어 저글링은 쉽게 충원할 수 있다. 그래서 병력운용에 어느 정도 감이 온 저그라면 누구도 러커를 앞세우고 저글링을 뒤따르게 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박성준의 저글링-러커 운용에 대해서 저렇게 알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제대로 설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두번째는 정말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병력운용이 나쁜 저그들의 경우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저글링과 러커를 하나로 운용하는 것이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교전 시에는 저글링이 앞서나가고 러커가 뒤따르는 모양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테란의 마린메딕은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저글링을 공격할 것이고, 뒤늦게 러커가 버로우 하는 시점에 와서는 후퇴하게 된다. 저그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병력운용이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상위저그 몇몇의 경기를 제외하면 이런 운용을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글링이 러커의 안전한 버로우를 위한 방패일 수 있으나, 저글링과 유리된 소수의 러커는 마린메딕에게 순식간에 전멸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저그들은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pain 인용)」는 말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성준은 어떻게든 유닛 컨트롤로 이득을 보려고 했고, 그의 빠른 손은 사람들이 생각으로만 하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실현하는데 바로 러커와 저글링의 이원운용으로, 간략히 적어보면 이런 것이다.
러커가 달려든다. 마린메딕은 러커 버로우 직전까지 공격하다 후퇴를 하려고 하는데 퇴로가 저글링에 의해 이미 봉쇄된다. 그래도 저글링은 근접공격유닛이기 때문에 마린메딕의 외곽에 피해를 주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미 버로우한 러커에 의해 마린메딕은 총체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저글링이 러커의 화력을 뒷받침하여 마린메딕을 전멸시킨다.
러커가 방패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공격의 핵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박성준은 마린메딕과 거리까지 재며 어떻게든 러커를 보존하면서 버로우시키려 했고, 러커가 공격받는 사이 저글링으로 하여금 퇴로 차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걸 당하는 상대방은 컨트롤이 용이한 소수병력을 운용하고 있다. 나아가 저그가 부대 이하의 병력으로 소위 쌈싸먹기를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활로를 뚫을 수 있다. 그래서 박성준 이전 저그들은 이길 수 있는 타이밍 이외에는 싸움을 걸어오는 테란을 피했다. 그러나 박성준은 오히려 싸움을 걸었다. 그는 수많은 연습을 통해 테란이 움직일 수 있는 경로 대부분을 예측할 수 있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바로 옮길 수 있는 빠른 손을 갖고 있었다. 때로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손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여주기도 했으니, 자신이 공격할 타이밍에 역습을 당한 테란의 빌드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린 것은 굳이 더 쓸 필요가 없다.
예상 외의 타격을 입고 본진에 틀어박힌 테란을 응징하는 것은 이전에는 하이브 단계에서 확보할 수 있는 가디언이었다. 긴 사정거리의 이 유닛을 통해 테란의 공성병력을 뒤로 물리고 저그의 병력이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성준은 레어 단계에서 끝낼 수 있었다. 레어 단계까지의 유닛 대부분은 박성준을 거치며 새롭게 해석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린을 잡아내는 드론과 지금 이야기할 무탈리스크, 이른바 무탈짤짤이라 불리는 무탈리스크 원샷원킬은 서경종이 무탈리스크 뭉치기를 발견하기 이전까지는 박성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어줍잖게 그를 따라하기는 하였으나 시간벌기 정도로 사용하는 것이 한계였는데, 박성준의 경우는 이것만으로도 언덕 위에서 농성하는 마린메딕탱크를 전멸시키는 일이 많았다. 남은 것은 언덕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저글링-러커의 본진장악. 러커에서 무탈리스크로 이어지는 콤보는 당시 수많은 테란들을 넉아웃시켰는데, 콤보가 등장한 적도 당시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저글링-러커에서 뚫리고 허둥지둥하다 본진까지 밀리거나, 무탈리스크만으로 정리되었다.
9.5
박성준은 2003년부터 신인왕전과 같은 하부대회에 출전하며 실전감각을 쌓고 오류를 수정해나가는 과정을 거쳤는데, 저그의 희망으로 떠오른 건 질레트 스타리그 4강 이후이다. 스타리그 데뷔 이전의 기록은 모두 무시하는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박성준은 파악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고 16강에서 한동욱을 상대로 4드론을 구사한 이후에는 올인하는 저그로 소개되었다. 그 와중에 박성준은 자기 앞을 막아선 상대를 하나하나 격파해나가더니 결국 스타리그 데뷔 동기인 최연성과 4강에서 붙게 되었다. 같은 신인이지만 요즘 말로 듣보잡인 박성준과 MSL 3회 우승자인 최연성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었고 대부분이 최연성의 우세를 점친 가운데 박성준은 3:2로 최연성을 격파해버렸다. 당연한 결과이다. 박성준의 병력과 벌이는 교전은 대부분 최연성의 예상과 어긋났다. 최연성의 강력함, 그것은 정교한 빌드-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대처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인데 박성준은 이 예상을 모두 무시하며 최연성의 강력함을 기저부터 흔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인 건 최연성이 졌다가 아니라 경기내용이었다. 머큐리에서 박성준이 돌을 던지기 직전 최연성의 드랍쉽 병력이 박성준의 본진에 강하한 것을 제외하면 최연성의 병력은 박성준의 크립조차 한 번 밟지 못했다. 최연성의 자존심에는 금이 갔고, 순간이나마 자신의 경기력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역대최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손에 꼽는 괴물의 시대는 거기서 막을 내린다. 비록 이후 스타리그에서 두 번의 우승을 했으나, 당시 맵에 대한 성토가 끊이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는 스타리그에서 가장 불우한 우승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최연성의 시대가 가며 비어있는 최강자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 당시 가장 잘 하는 세 명의 선수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격렬한 전쟁이 시작되는데, 바로 삼신전의 개막이다.
각설하고, 박성준은 iTV결승전과 스타리그에서 최연성을 연거푸 꺾었고 두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저그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의외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테란의 팬들은 저그의 우승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박성준의 우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테란 팬들의 대부분은 저그의 최초 우승자는 홍진호였어야 한다며 대놓고 박성준의 우승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또 그들 중 몇몇은 테란을 꺾고 우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우승으로 볼 수 없다고 비방하기도 했다. 당시 어떤 개인의 스타크래프트 사이트를 살펴보면 박성준의 우승을 축하하는 글보다 이후 EVER 스타리그 8강에서 홍진호가 박성준을 격파했을 때 환호하는 글이 더 많이 올라왔으니, 이 정도만으로도 그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그의 계보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박성준이라는 저그에 대한 분석도 공격 잘하니까 공격형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수많은 이들의 분석도 박성준은 피해갔으며, 그래서 아직까지도 박성준이라는 저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은 지금이다. 공격형 정도로 박성준을 분류하는 것은 뛰어난 컨트롤을 앞세워 전투에서 눈부신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옳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최초의 공격형 저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박태민의 영향을 받아 하이브 단계에서 디파일러 이후 목동체제 전환도 자유롭게 구사하는 저그였기에 단순히 공격형으로 그를 얽매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그는 홍진호처럼 저그의 이단아로 등장했으나, 끝까지 이단으로 남아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바른 설명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최연성이 쓰러진 후 열린 삼신전 시대에서 그와 끊임없이 비교된 박태민이라는 저그가 있었고, 박태민의 정수를 이은 마재윤이 저그의 계승자로 인정받았기에 그의 위치는 더욱 애매모호하다.
9.6
그가 어떤 저그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의 저그가 테란을 상대하는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난다. 테란은 언제나 하던 것만 하며, 저그 역시 이제는 새로운 타이밍의 발굴을 포기하고 하던대로 해서 이기려고 한다. 예전의 변수가 모두 상수가 되어버린 이 함수에서 그나마 변수로 남아있는 것은 소위 무탈짤짤이의 성과이다. 이걸 잘하면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탈짤짤이는 박성준 이전의 저그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다. 종래의 저그에게 가장 필요한 미덕은 맞춰가는 것이었으며, 특히 테란을 상대로는 더욱 수동적인 자세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박성준은 부인했다. WWE의 프로레슬러인 '에지'의 PV를 보면 「난 내가 하고 싶을 때 한다」는 카피가 등장하는데, 이건 박성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이전의 저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앞서 카피와 대조하면 「내가 해야 할 때 한다」의 자세인데, 박성준은 놀라운 컨트롤로 인해 우격다짐식의 억지타이밍을 창출해냈다. 물론 이것은 박성준 혼자만의 것으로 다른 저그들이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서경종이 무탈뭉치기를 발견된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박성준을 따라할 수 있게 되었고, 드디어 저그가 타이밍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끌려다니는 저그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주도권을 원할 때 가져오는 저그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없던 것이다. 언제나 같은 선상에서 평가받은 박태민과 비교해보면, 박태민은 홍진호의 문법으로 다른 경기를 풀어나갔으며, 박성준은 홍진호의 경기를 다른 문법으로 풀어나갔다. 박성준이 겉으로 홍진호와 닮아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이며,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완전히 달라보이지만 박태민의 경기야말로 홍진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홍진호 이후의 저그는 모두 홍진호처럼 하고 있었는데, 박성준에 와서 전혀 다른 저그가 나왔다.(물론 박경락과 같은 예외가 있지만 그래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렇기에 굳이 저그의 계보를 적으며 박성준을 넣는다면 그는 요즘 말로 갑툭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저그가 갖는 힘은 자신을 그 위치에 놓는 것으로 끝내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마재윤을 거치며 잊혀진 박성준의 유산은 마재윤이 무너졌을 때에야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며 저그의 기본 중 하나가 되었다.
컨트롤 혁명, 그것은 저그가 만들어내는 타이밍, 박성준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었을 선물이다.
-----------------------------------------------------------------
컨트롤 혁명이라는 부분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테란전은 본문에서 심도있게 설명했기에 토스전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하자면
저는 본문의 이부분이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마재윤을 거치며 잊혀진 박성준의 유산은 마재윤이 무너졌을 때에야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며 저그의 기본 중 하나가 되었다.'
신사우론. 소울류의 최후의 계승자인 마재윤 선수가 비수류에 무너지고 나서 재등장한 저그의 고전입니다.
프리무라라는 분파로 소울류가 독립하면서 원조를 밀어내고 저그의 정통으로 자리잡았을때도 박성준은
다수의 해처리와 기본병력이라는 사우론의 이념을 추종하며 토스의 재앙으로 군림했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엠비시 히어로의 저그들에게로 꾸준히 이어졌고 비수류에 의해 소울류가 종언을 고한후 다시 그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동 선수가 등장했습니다. 테란전에서도 압도적인 컨트롤능력으로 테란을 압살하는 모습.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
아니던가요. 그런 이제동 선수는 비수류의 원조 김택용 선수를 상대로 다수의 해처리와 다수의 라바와 다수의 히드라 저글링으로
번번히 승리를 거둡니다.
모두가 마재윤이 되었기에 마재윤 선수는 몰락했습니다.
이때 이제동 선수는 거기에 박성준 선수적인 요소를 체화시켜서 모든 저그들중 으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갑툭튀'로서 그 순간을 불타올랐던 박성준이라는 횃불의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고
이제동이라는 또하나의 거대한 불길을 피워낸 게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