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 러시아에서는 흔히들 대조국전쟁(Great Patriotic War - 이 단어는 비단 독일뿐 아니라 독일 편으로 참전해서 계속전쟁을 일으킨 핀란드와 벌인 계속전쟁을 아우르기도 합니다)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양군을 합쳐서 민간인 사망자를 제외한 전투원 사망자만 무려 1,676만 명을 기록한(다시 말하지만 전투원 한정, 그리고 사망자 한정입니다. 서부 전선에서의 전투원 사망자는 이의 1/10 수준인 176만 명)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이 전쟁의 결과로 소련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피를 쏟아내야 했습니다. 일단 전쟁터 자체가 소련이었고, 그로 인해서 벌어진 엄청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은 그야말로 뒷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 정도였죠. 그러니 소련에서 이 대조국전쟁을 크게 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기념하는 방식 중 하나가 '영웅 도시'라는 칭호를 독소전 당시 주요 격전지 및 중요 요충지에 부여한 것이었죠.
유럽의 전쟁은 1945년 5월 7일에 끝났습니다. 항복 과정에서 약간의 촌극이 있었기에 서방의 경우는 5월 8일, 소련의 경우는 5월 9일을 승전기념일로 지정하여 크게 기념하고 있죠(각각 항복문서에 공식적으로 승인한 날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니키타 흐루쇼프(흔히들 흐루시초프로 알고 있는 그 대머리 아저씨)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잡은 시기인 1965년에, 종전 20주기를 기려 여섯 도시와 요새 하나가 각각 영웅 도시와 영웅 요새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에 여섯 도시가 더 영웅 도시로 지정되면서 총 12개의 도시가 영웅 도시 칭호를 받았죠. 시작은 스탈린이 1945년 5월 1일에 몇몇 도시를 지정한 것이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은 20년 후의 일입니다.
영웅 도시를 하나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5년 5월 8일 지정 여섯 도시 :
모스크바(Moskva, Москва) -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다만 모스크바는 영웅 도시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비단 소련의 수도라서 상징적인 의미에서 부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독소전쟁 당시 최고의 격전지 중 하나라 할 만했으니까요. 불과 수도 40km 밖에서 독일군이 포격을 하고, 쌍안경으로 첨탑이 보일 거리였다고 하니 말 다 한 거죠. 얼마인지 상상이 안 가신다면, 북한군이 휴전선을 돌파해서 고양 북부 혹은 동두천에다가 자리잡고 서울 중심부에 냅다 포격하는 상황이라고 보시면 확 감이 오실 겁니다. 게다가 이 시기는 대숙청으로 인해 지휘 체계가 그야말로 맛이 간 후폭풍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독-소 국경지대에 요새를 깔던 방위 계획이 하필이면 진행 중이었던 상황이었던지라 더더욱 독일군이 손쉽게 밀고들어왔습니다. 독소전쟁 입문서로 가장 이름높은 <독소전쟁사>를 쓴 데이비드 글랜츠는 독일군이 1년만 늦게 침공했어도 소련군의 기계화 부대를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죠. 하여간 수도가 털리냐 마냐 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소련군은 결국 버텨냈습니다. 이렇다할 전술이라는 것 자체도 없었고, 질은 물론 양에서도 밀리고 있었으며(당시 모스크바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은 약 2백만, 소련군 약 1백 20만 가량 -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심리적으로도 엄청나게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소련군의 모스크바 사수 성공은 그야말로 기적이었고, 이는 독소전쟁의 향방을 가르는 큰 플래그 중 하나가 됩니다. 특히나 이전까지 무적의 부대라 알려졌던 독일을 상대로 끝끝내 승리를 거두었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사기를 고양시키는 효과가 있었죠.
레닌그라드(Leningrad, Ленинград) - 現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명색이 소련 제2의 도시이자 제정 러시아 당시에는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도시였고, 그만큼 상징적인 측면에서는 뭘로 보나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발트 해로 나가는 항구가 바로 이 레닌그라드에 있었고 위로는 핀란드, 아래로는 북부 집단군으로 둘러싼 독일군이 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발트 해가 추축국의 손에 완벽히 떨어질 판이었던 터라, 독일군은 기를 쓰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자 했죠. 하도 도시가 저항이 심해서 뚫고 들어가기 애매해지자 독일군은 급기야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해서 도시를 통째로 굶겨죽이려는 작전을 펼칩니다. 이게 1941년 9월 8일부터 개시된 레닌그라드 포위전이었고, 이 결과 레닌그라드는 무려 2년 반 동안이나 적의 포위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독일군을 상대로 한 격전이 아닌, 보급을 상대로 한 격전이었고, 당연하게도 수많은 시민들이 굶어 죽어야 했습니다. 보급로가 다 차단된 마당에 유일하게 희망적이었던 것은 겨울에 얼어붙은 레닌그라드 인근의 라도가 호를 통해 얼어붙은 호수 위를 달려오는 보급이었고, 또 라도가 호를 통해서 시민들이 탈출하기도 했었죠. 그렇게 북부 집단군의 빌헬름 폰 레프(Wilhelm von Leeb)와 게오르그 폰 퀴흘러(Georg von Küchler)를 상대로 오랜 기간 버텨내고, 레닌그라드는 마침내 1944년 1월 27일이 되어서야 완전히 포위에서 풀려납니다. 여담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이 태어난 곳이 바로 이 레닌그라드이고, 블라디미르의 형 빅토르는 이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디프테리아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고, 소련군 전투원 사상자도 350만 명에 달하는(독일군 피해 약 58만 명) 처절한 싸움이었죠. 먼 훗날 소련의 위대한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가 이 도시에 교향곡 한 편을 헌정하는데, 그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인 "레닌그라드"입니다.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Сталингра́д) - 現 볼고그라드(Volgograd, Волгоград). 어마어마한 인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13근위소총부대(근위라는 말이 있어서 헷갈리실 수도 있는데 소련군 소속 부대입니다)의 경우는 30%가 넘는 인원이 투입된 지 24시간 만에 사망하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남겼죠. 1만 명의 부대원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나고 살아남은 인원은 불과 320명(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시가지였고 그만큼 전차가 활약하기 어려운 지형인데다가 하필이면 배후에 볼가 강이 있어서 독일군의 장기인 포위 섬멸전을 쓰기도 어려웠던 터라 결국 도시의 건물 하나하나를 이 잡듯이 뒤지는 소탕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틈에 주코프의 역포위 작전인 천왕성 작전 및 이와 연계된 토성 작전이 발동되면서 독일군 25만 명이 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박살납니다. 9만 명이 살아남았으나 포로가 되었고 전후 동독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인원은 이의 1/10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더군요. 그러나 독일군의 피해를 몇 배로 상회해 가면서 어마어마하게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은 소련군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전투원 손실(사상자 + 포로)이 85만 명에 이르렀을 때 소련군의 손실은 그보다 훨씬 많은 110만 명을 넘고 있었죠. 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및 레닌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세 전투로 꼽힙니다. 사상자의 집계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자료마다 약간의 순위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한 사실은 이토록 기록적인 사상자를 냈다는 것 자체가 비극적인 일이라는 것이죠.
키예프(Kiev, Киев) - 現 키이우(Kyiv, Київ). 사실 키이우는 키예프를 우크라이나 어로 표현한 것이라서, 現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분리 독립하면서 그 나라에 맞는 명칭을 쓴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독소전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면서 남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의 합작 공세로 키예프에서 무려 70만 명의 소련군이 포위 섬멸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집니다(사망 + 포로 60만이라 60만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 근원은 스탈린의 무리한 현지 사수 요구에 있었다고 많이들 지적하고는 하죠. 당시 중부 집단군의 제2기갑군을 맡고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의 경우 자기 부대가 모스크바로 나가기 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이 키예프로 방향을 틀어야 했고 때문에 모스크바로 도달하는 시간이 늦어져서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글쎄요? 70만이나 되는 병력을 배후에 두고 모스크바를 그리 쉽게 점령할 수 있었을까요? 바르바로사 작전의 문제는 애초에 적의 군세를 오판해도 한참 오판했다는 것과, 먹을 능력도 되지 못하면서 무리하게 엄청난 스케일로 작전을 벌인 바로 그 스스로의 문제에 기인했지 히틀러 한 사람의 문제에서 기인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하간 독일군의 포위작전에 제대로 걸려들면서 70만의 병력을 잃은 죄과로 파블로프 중장이 총살형(!)을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이 와중에 독일군의 전쟁 범죄짓은 여전해서 3만 명의 유대 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러시아 문명의 발상지인 키예프 공국의 수도이자 유서 깊은 이 도시는 1943년에 가서야 해방됩니다.
오데사(Odessa, Оде́сса) - 現 오데사(Odesa, Оде́са). 의외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소전에서 크게 이름이 났던 전투지역이 아니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독일군이 아닌 루마니아군이 밀고들어간 곳이었고, 독일군은 주공이 아니라 일종의 조공 역할을 한 셈이었거든요(이 때 독일군에 있었던 게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입니다. 북부 집단군의 제56기갑사단으로 있다가 남부 집단군의 11군 사령관으로 영전했죠). 사상자 수도 다른 전투에 비해 적었지만(어디까지나 다른 전투에 비해서 적었다는 것이지 양군 합쳐서 최소 13만 명에서 15만 명 가량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전투 자체는 꽤 치열했던 격전이었기에 73일간의 격렬한 항전 끝에 오데사는 간신히 추축국 손에 떨어집니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오데사 전투 문서에서도 아예 Pyrrihc victory, 즉 이기기는 이겼으되 손해가 컸다고 언급하고 있죠. 얼마나 그 당시에 치열한 격전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오데사가 해방되기도 전인 1942년에 이미 오데사 방어 기념 훈장(Medal "For the Defence of Odessa")가 수여될 정도였죠. 이 메달을 받아든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독소전의 명장 중 한 명인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Rodion Yakovlevich Malinovsky,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입니다. 일명 "죽음의 아가씨(Lady Death)"로 불렸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성 스나이퍼 류드밀라 미하일로비나 파블리첸코(Liudmyla Mykhailivna Pavlychenko, Людмила Михайловна Павличенко) 역시 이 오데사에서 활약한 바 있습니다. 이 오데사에서의 손해 및 이듬해에 이어진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의 극심한 소모로 인해 만슈타인의 제11군은 세바스토폴에서 공세한계점에 도달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스탈린그라드의 치열한 공방전 및 역포위를 야기하는 한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오데사는 놀랍게도 1945년에 스탈린이 비공식적으로 지정했던 네 영웅 도시(나머지 셋은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중 하나였다는군요. 1944년 4월 10일이 되어서야 오데사가 해방됩니다.
세바스토폴(Sevastopol, Севастополь) - 現 세바스토폴 연방시.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도 크림 반도는 일종의 자치국 비슷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토폴은 아예 직할시 취급을 받았죠. 실제로 우크라이나 당시에도 місто зі спеціальним статусом, 직역하면 City of republican subordinance, 다시 말해 공화국 직속 도시라 하여 별개의 행정구역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크림 반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우리 나라의 도(道)에 상응하는 오블라스티(Oblast, Область)로 구분되었죠. 하여간 그렇게 특별한 취급을 받았던 이유는 흑해 함대에 있었습니다. 소련 시절에는 Closed City, 즉 폐쇄 도시라 해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도시 중 하나였거든요. 즉 이 도시를 잡는다는 것은 흑해를 잡는다는 것에 진배없었고, 따라서 독일군이 이 도시를 탐내는 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일대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인데 하필 이 크림 반도는 위성 사진으로 보면 구릉지가 상당히 끼어 있기 때문에 도시 자체가 요새나 진배없었고, 이 세바스토폴을 공략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야포와 포병, 심지어는 그 유명한 구스타프 열차포까지 동원됩니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앞서 언급한 만슈타인의 제11군이 1942년 개시된 청색 작전 기간 동안 공략한 도시가 바로 이 도시입니다. 독일군 사상자 약 7만, 소련군 손실 약 10만 가량이 발생한 이 공방전은 특이하게도 요새 공략전인 주제에 공격측의 손해가 수비측의 손해보다 적기 때문에 전술적으로도 특기할 만한 전투로도 주목받은 바 있죠. 그러나 어쨌든 여기에서 11군이 전력을 다 소진해버린 탓에 제6군은 제11군이 바탕이 되는 측면의 보호 없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 측방 엄호를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루마니아군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되면서, 결국 천왕성 작전이 먹혀들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제11군이 로스토프로 대표되는 스탈린그라드 남서부의 측방을 지키기만 했어도 6군이 포위당하는 일은 없었겠죠. 뭐, 인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매우 천만다행인 일이었겠습니다만. 역시 방어측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바스토폴은 오데사보다 동쪽에 있음에도 1944년 5월 9일에서야 해방됩니다. 공교롭게도 유럽에서의 종전에서 정확히 1년 전이었죠. 물론 종전이 언제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1973년 9월 14일에 케르치와 노보로시스크가, 1974년 6월 26일에는 민스크가, 1976년 12월 7일에는 툴라가, 마지막으로 1985년 5월 6일에는 무르만스크와 스몰렌스크가 추가로 영웅 도시로 지정됩니다.
케르치(Kerch, Керчь) - 크림 반도의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도시로, 세바스토폴에서 직선거리로 약 250 km 가량 떨어진 도시입니다. 웬 듣보 도시야 싶겠습니다만 이 도시, 의외로 치열한 격전지였습니다. 크림 반도에 잔존하고 있던 소련군 병력이 각각 세바스토폴과 이 도시로 몰렸거든요. 소련군의 병력 손실만 16만 명에 달했는데, 이게 이 도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계속 발생했던 거죠. 이 와중에 독일군이 여기에서 약 1만 5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1만 4천 명의 민간인을 쫓아내는 전쟁범죄까지 일으킵니다. 최종적으로는 1944년 4월 11일에서야 해방되었습니다만 그 기간 동안 벌어진 인명 손실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죠. 여하간 이 저항에 대한 공로로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노보로시스크(Novorossiysk, Новороссийск) - 케르치의 반대편에 있는 도시입니다. 역시 흑해의 항구 도시인데, 이 도시의 경우는 크림 반도에 묶여 있던 소련군의 철수지로 기능하기도 했거니와(케르치 시의 크림 역과 노보로시스크의 캅카스 역간의 직선거리는 불과 4.5 km인데 문제는 이 4.5 km가 바다 위에서 4.5 km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철수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죠), 이 노보로시스크의 말라야 젬랴(Malaya Zemlya, Малая Земля)라는 작은 마을에서 선원들이 무려 225일이나 저항한 기록이 있던 덕분에 이를 기념해서 영웅 도시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민스크(Minsk, Минск) - 現 민스크(영어로는 똑같이 Minsk입니다만 벨라루스 어는 Мінск를 씁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이미 30만의 인구가 사는 공업 도시이자, 스탈린이 애착을 가지고 특별히 집중 육성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시가 함락되자 스탈린이 길길이 날뛰었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죠. 나름대로 상징성이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독일군 역시 이 도시를 먼 훗날 제국 동부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는군요. 하여간 여기에서도 병력 손실이 35만 명에 달했습니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가 이끌었던 중부 집단군의 두 주먹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과 헤르만 호트(Hermann Hoth)의 완벽한 손발이 귀신같이 맞아들어가면서 깔끔하게 포위 섬멸에 성공한 거죠. 이후 몇 달 뒤에 상기 서술한 키예프가 넘어가면서 병력 손실이 1백만을 돌파합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으로 정해진 새 독-소 국경선에 워낙에 가까웠던 터라 이 도시가 해방되는 것은 1944년 7월 3일에서야였는데, 이게 의외로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바로 바그라티온 작전(1944년 6월 22일 발동,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6월 22일 개시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일부러 이 날에 작전을 개시했다고 보기도 합니다)이 개시되고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플래그였거든요. 이후에 거대한 붉은 해일이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드디어 전쟁터가 소련 바깥이 된 것이죠.
툴라(Tula, Тула) - 특이하게도 전투가 벌어져서 영웅 도시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항전의 바탕이 된 군수 기지였기 때문에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은 케이스입니다. 구데리안이 이 도시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던 때라서 더 이상의 공세는 불가능했죠. 근데 이 도시가 모스크바의 남쪽 측방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모스크바 역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치를 수 있었고, 그 결과 1941년 겨울에는 일부 지역에서는 반격까지 가능해질 정도가 됩니다. 르제프 같은 경우에서는 총통의 소방수라 통하는 발터 모델(Walter Model)에게 제대로 걸려들어서 르제프의 고기분쇄기라고까지 불리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독일군 입장에서는 그러한 반격 자체가 가능하다는 게 충격인 상황이었죠. 이후로도 계속해서 툴라는 최전선의 중요한 공업 기지로 기능합니다. 물론 툴라 서쪽에 있던 공업도시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드네프르 강 연안을 따라가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 現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Дніпропетро́вськ), 자포로제(Zaporozhe, 現 자포리지아, Запорі́жжя) 등이 있었죠. 그러나 독일군의 총검이 도시, 아니 기술자들의 목에 들이대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장의 장비를 죄다 뜯어서 멀리 동쪽으로 이전한 바 있습니다.
스몰렌스크(Smolensk, Смоленск) - 민스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중요 지점, 다시 말해 모스크바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 중 하나입니다. 이 스몰렌스크 인근에 옐냐 교두보가 있죠. 여기에서도 30만의 병력 손실이 발생합니다. 특이하다면 특이하게도 전차의 손실이 제법 있었는데, 독일군이 100대에서 200대 가량의 전차를 잃을 때 소련군은 무려 그 10배인 1,347대에서 최대 3,000대 가량의 전차를 잃었습니다. 장비가 좋았다기보다는, 당시 독일에 퍼지던 게 KV 쇼크(KV-1 소련군 전차가 의외로 강해서 받은 충격)였던 걸 감안하면, 그리고 병력 손실이 벌어진 시기(1941년 - 바르바로사 작전이 한창일 때)를 감안하면 소련군의 손실은 장비의 열세가 아니라 병력 운용상의 심각한 문제에서 기인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잘라먹기 및 집중 포격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이죠. 여기가 돌파되면서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스몰렌스크에서 특기할 만한 반격이 일어나는데, 미하일 카투코프(Mikhail Katukov,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атуков) 당시 대령이 펼쳤던 방어전이 그것이었습니다. 미끼 부대로 독일군의 포격을 이끌어내고 포격 후 안심하고 진군하는 독일군을 좌우에서 돌격하여 격멸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적의 진군을 늦추었고, 2주라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겨우 2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이 2주 때문에 구데리안의 군대는 툴라에 진격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련군이 끝끝내 버텨내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뛰어난 전술로 시간을 번 카투코프는 훗날 쭉쭉 승진해서 기갑부대 원수(Marshal of the Armored Troops)가 되죠.
무르만스크(Murmansk, Му́рманск) - 백해(White Sea) 함대의 기지라 할 수 있는 중요한 항구이고, 러시아 최북단의 항구입니다. 그리고 부동항이죠. 핀란드 군을 상대로 했는데, 은여우 작전(Operation Silver Fox, Silberfuchs)의 일환으로 밀어붙였거든요. 어찌나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는지 이 정도의 파괴에 비견될 만한 다른 도시는 오직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뿐이었다는군요. 그러나 워낙 이 일대가 정신나간 추위를 자랑하던 터였고, 게다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을 위시한 핀란드의 입장 - 나는 그냥 겨울전쟁으로 잃었던 영토(당시 핀란드 영토의 약 1/10 가량)나 수복하면 됐지 굳이 거기서 더 싸우고 싶지 않다 - 이 히틀러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갈기는 통에 더 이상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백해 보급선과 부동항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북해와 헷갈리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북해는 노르웨이 - 영국 일대의 북유럽 서쪽의 대서양 바다를 의미하고, 백해는 그야말로 북극권의 바다를 의미합니다. 여하간 이 은여우 작전으로 독일군에서 2만 명의 피해가 났고, 소련군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다는군요. 하여간 핀란드가 딱 잃어버린 영토까지만 진격하고 더 진격하지 않은 덕에 소련군은 부동항과 그 부동항까지 연결된 카렐리야 일대의 철도를 지켜낼 수 있었고, 이 부동항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가 들어오면서 소련은 정말 간신히 살았습니다. 바로 렌드리스(Lend-Lease)죠. 렌드리스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간혹 보이는데, 2차대전으로 인해 흘린 어마어마한 피를 깡그리 무시하고, 렌드리스 없었으면 흘렸을 훨씬 많은 피를 무시하며, 피를 흘리면서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 모든 인명 피해와 손실을 그저 통계로 치부하며. 남들의 피는 전혀 상관없고 그저 우리 나라만 잘 되면 장떙이라는 아주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렌드리스 없었으면 우리 나라는 독립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전쟁이 빨리 끝났기에 그나마 일본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지, 전쟁이 더 길어져서 휴전이라도 났으면 그야말로 우리 나라는 일본의 식민 속국으로 상당히 더 긴 굴욕의 시간을 보냈겠죠.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었나요, 그 사람이 한 말마따나 전쟁은 빨리 끝날수록 무조건 좋은 겁니다. 그래야 비극이 조금이라도 덜하니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웅 도시는 아닙니다만, 영웅 "요새"로 지정된 한 곳.
브레스트(Brest, Брест) - 일명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 現 브레스트(역시 영문명은 똑같지만 벨라루스 어로는 Брэст). 물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박살이 난 건 이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만, 이 요새에서 6일간 포위 끝에 전멸당하는 비극적인, 그러나 영웅적인 항전은 꽤 임팩트 있게 소련 국민들의 가슴 속에 남았습니다. 최전선의 요새 중에서 오직 브레스트 요새만이 개전 직후 독일군의 공세로부터 20일이 되는 시점까지 버텨냈기 때문이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만 독소전쟁 초기는 그야말로 비극의 연속이었고,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까지 소련군은 계속해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상황도 사기도 절망적인 벼랑 끝에서 브레스트 요새의 항전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기 위해 기를 썼고, 모스크바에서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소련 수뇌부의 한 줄기 희망의 역할을 하기라도 했을 겁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습니다만... 하여간 끝까지 저항한 그 항전 정신 덕분에 영웅 요새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요새에 기록된 낙서 중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는군요. "우리는 죽지만 요새를 떠나지 않으리." "나는 죽어가지만 항복하지 않는다. 조국이여, 안녕. 7월 20일, 1941년." ("We'll die but we'll not leave the fortress". "I'm dying but I won't surrender. Farewell, Motherland. 20.VII.41.")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의 브레스트 요새 방어전(Defense of Brest Fortress) 문서. 비극적인 요새 공방전은 훗날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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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전투를 확실하게 준비하고 갔으면 또 모르죠.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이 결국 깨졌던 한 원인이기도 했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추위로 인한 주석 페스트 현상으로 단추가 박살이 나면서 동계 대비 체계가 완전히 맛이 갔죠. 하긴 히틀러의 경우는 시작부터 적의 규모를 오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 누가 말했던가요, 처음 우리 앞에는 180사단이 있었고, 얘들을 모조리 격파했더니 360사단이 몰려왔고, 또 얘들을 모조리 격파했더니 이제는 500사단이 몰려오고 있다고 - 패배는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겠습니다만(그러나 그 필연적인 패전에까지 이르는 시기가 문제겠죠).
뭐 그 이전에 양면전을 스스로 저지른거가 더 큰 문제 아닙니까...뭐...
그 양면전쟁을 이겨낸건 2차대전의 미국뿐인데...(뭐...최소한 자기 본토는 당할리 없었다는게 미국의 이점이지만...)
그 미국도 현대에 들어서 아프간하고 이라크 동시에 저질렀다가...무슨 꼴 봤는지를 보면...(돈은 돈대로 쓰고 결과물도 영 시원찮....)
일단 타이밍 러쉬 자체가 (히틀러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기가 막혔고, 미국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즉 대서양 방벽을 칠 이유가 굳이 없었다는 거죠. 미국에게 선전포고한 건 소련으로 밀고들어간 6개월 후의 일입니다. 일본이 진주만 건으로 선빵을 때리는 바람에...), 영국의 경우는 일단 노르웨이를 접수함으로써 영국에 대항할 입체적인 방위망을 확보하고 있었고, 더구나 이 대의 영국은 U보트로 말라비틀어져 가는 판이라서 쳐들어간 시기 자체는 절묘했다고 봅니다. 양면전쟁보다도 더 큰 문제는 상대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에 있었다는 게 제 의견이죠.
더 중요한건 자기네 파티원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게 원인인거 같습....?(쓸때없는 어그로를 끌어서 보스강림시킨 일본이라던가...... 도움 안되는 이탈리아를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본인이 멱살잡고 캐리할 정도는 아니고...(미국이라면 했지만...랜드리스만 봐도...180사단이 360사단이 되고 500사단이 된거에는 미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택도 없죠 뭐...)
아닙니다.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군을 상대로 툴툴댄 바 있고, 이온 안토네스쿠로 대표되는 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 만네르하임을 위시하는 핀란드군이 약체 취급을 받고는 있습니다마는, 독소전쟁에 참전한 파티원인 이탈리아군,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핀란드군의 전투력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애초에 전투력이 문제였다면 후방의 파르티잔이나 소탕하고 자유 러시아 군처럼 선전 활동이나 하라고 보냈겠죠. 독일군은 전쟁 내내 파르티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니. 전투 지역이 다르기는 했지만 북부 아프리카 이탈리아군의 아리에테 사단은 뛰어난 전투력으로 그 명성이 드높은 부대였습니다.
물론 독일에 비하면 약체라 하겠습니다만 그건 이들이 약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그냥 전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봐야겠죠. 약체라고 평가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축국 군대 내에서 약체라는 것이지, 얕잡아볼 상대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당장 위의 오데사만 해도 피를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오데사 접수에 성공한 군대의 주공은 어디까지나 루마니아군이었죠.
아, 진주만의 원흉인 일본은 당연히 할 말 없죠.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소련 땅은 워낙 광활한 영토였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고 군수 물자를 찍어냈다면(생산 기지가 우랄 산맥 너머 있기도 했으니) 소련이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뒀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이를 피는 당연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 될 것이고, 그런 만큼 소련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결과가 되어 A-A 라인(아르한겔스크와 아스트라한을 잇는, 우랄 산맥 서부를 모두 내주는 라인)을 근처로 한 협상안이 도출되었을 가능성이 높죠. 하다못해 우크라이나라도 접수당하던가. 렌드리스가 갖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힘에 부쳐서 독일과 강화할지도 모르는 소련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주면서 피로스의 승리가 아닌 확실한(Decisive)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죠.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했기에 일단 손잡고 국공합작을 끌어낸 것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대장정 건도 있지 않습니까)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난 둘이서 손을 잡게 할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되죠. 쉽게 말하면 죽이지 못해 안달하게 만드는 녀석보다 더한 놈이 일본군이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는 당한 사람으로서 이가 갈리게 하는 범죄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런 전범들을 제대로 심판대에 올리지 않고 과거사에 대해 입을 씻어버리고자 하는 일본의 수뇌진들이 참으로 혐오스러울 따름이죠.
키예프는 크림사태 이후로 반러감정이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전승기념일 행사는 계속 성대하게 이루어지더라구요. 저번주 행사도 큰 일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현재 키예프 대조국전쟁박물관에 가면 1층에는 돈바스 전쟁을 비롯해 반러감정을 일으키는 전시전이 열리는데, 정작 2층부터는 나치에 소련의 붉은군대의 일원으로 맞써 싸운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하는지라 모순이 장난 아니더군요.
반면 러시아계가 키예프보다 더 많은 라트비아 리가는 나치 친위대가 축제를 벌일 정도로 막장화가 끝난지 이미 이십년입니다. 이번 3월에도 슈츠슈타펠 복무병들과 지지자들 천명이 리가 시내에 모여서 파티를 벌이는데 당국은 그냥 놔두고 있더라구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온 독일의 나치 피해자들과 반나치즘 연대자들은 공항에서 추방당하기 까지 했구요. 발트삼국은 여러가지로 유럽연합 차원에서 제재가 이뤄져야 하는데 약자가 EU의 적인 러시아계다보니까 넘어가는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 것이, 2차대전 중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군의 손에 많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독일이고 소련이고 다 싫다고 하는 파르티잔 활동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전승기념일 행사는 크게 기릴 만하죠. 독소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군을 소련의 압제에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킨 군대라 하여 열렬히 지지했지만 독일군의 눈에는 우크라이나 인들도 '청소'해야 할 인종들이었고, 아인자츠그루펜과 국방군의 잔학 행위가 벌어지자 곧 우크라이나 전역이 들끓게 되죠. 그러니 독일이고 소련이고 다 싫다고 할 수밖에요. 독일을 상대로 싸운 것은 인류의 악을 상대로 싸운 것이기 때문에 그게 민족주의 파르티잔이 되었건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싸운 것이었건 충분히 기릴 만한 일입니다.
반면 라트비아는 1940년에 (독일의 묵인이 있긴 했지만) 소련에게 강제로 합병당한 이후 50년간 소련 밑에서 서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 라트비아가 반소/반러 감정을 갖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가 소련 밑에서 서러운 나날을 보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저 두 공화국 출신의 모스크바 정계 진출도 활발했고, 무엇보다 월급이 높았거든요.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같은 주요 도시가 아닌 이상 보통 소련의 월급은 온도 및 고립도와 관련이 있었는데 발트국가의 경우는 예외라고 봐야 할 정도으니까요. 의무교육도 러시아를 비롯한 타 공화국보다 1년이 길었구요. 오히려 소련 내에서 동경의 대상이었지 차별의 대상인 적이 없습니다. 별로 민족주의에 감흥이 없는 라트비아계 중장년층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나구요. 소련 내에서 서러운 나날을 보냈다고 하려면 유대인 급은 되어야...
다른 동구권과 같은 이유죠. 독일, 핀란드보다 못살기 때문에 반발이 일어난 겁니다. 소련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1인당 GDP가 핀란드 수준일텐데 다 너 때문이라는 거죠. 지금 와서는 소련의 인권유린도 나치를 이겼다는 하나만으로 묻고 가자는 러시아인들의 인식에 대한 반감도 상당하긴 합니다만.
에스토니아인들은 소련 점령 전만 해도 핀란드보다 1인당 GDP가 높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실제로는 절반 수준이었거든요. 체코슬로바키아도 2차대전 직전 구매력 기준으로 소득이 덴마크의 절반이었는데 공산권 하에서도 그 비율은 유지됩니다. 1930년대 되면 체코슬로바키아의 몰락은 두드러져 유럽내 부유지역에선 아예 탈락합니다. 사실을 부정하고 남 탓하는게 제일 쉬운 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