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되게 낮은 확률을 표현해 소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확률" 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이 2014년 월드컵에 우승할 확률, 옆집사는 이춘복씨가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 내가 소녀시대의 멤버를 사귈 확률... 이렇게 현실의 세계에서 분명히 일어날순 있지만, 그 확률이 너무나도 낮고 낮아 기대 안하는게 속 시원한, 아니 기대 하는것 자체가 멍청하다고 판단될정도의 일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홍진호가 우승할 확률? 수많은 콩빠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거다. 이 역시 낙타 바늘구멍에 들어갈 이야기라고.
우리는 2인자의 제왕이든, 콩라인의 수장을 까든, 과거에 테란들을 압살한 저그의 우두머리를 찬양하든, 지난 몇년간 이스포츠의, 아니 인터넷의 아이콘이 되어온 이 선수에 대해 암묵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것이 하나 있다.
'홍진호의 게임'에 대한 분석이다. 우리가 (요즘 간간히 모습을 보이는) 홍진호에 대해 얘기할수 있는건 옵저버가 본진을 비쳐줄때 인구수에 방해만 되는 극도로 적은 수의 드론과, 상대의 대비가 되있는것을 보고도 일단 던지고 보는 폭풍의 모습이다.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플레이는 저그의 탑인 이제동-박찬수는 커녕 요즘의 연습생들과 경기해도 이기기라도 할까.
아, 슬프다. 스타크래프트의 아이콘, 프로게이머들을 대표하는 프로게이머인데, 정작 그의 게임은 얘기거리가 못된다. 조롱과 그리움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꺼리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 전부다. 몇 년된 남자친구가 있는 옛 첫사랑을 보는 기분이 이런걸까?
각설하고, 이쯤에서 전제를 바꿔보자. 이건 어떨까.
"홍진호가 부활할 확률"
있기라도 할까? 지난 2년간 공식전에서 1승도 못거둔 저그가? 프로브 한기에 드론이 2기 잡히고, 올인러쉬를 갔는데 저글링에 랠리가 찍혀있지 않고, 기본기의 '기'자도 제대로 기반되지 않은것 같은 이 상황에서?
명백히 어렵다. 그러나,
이 글은 그 끊어질듯한 실같은, 그러나 여전히 모양만은 유지하고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한 얘기다.
홍진호와 다른 게이머들을 비교해봤을때, 홍진호에게 부족한건 너무 많지만, 가장 크게 3개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가장 큰 첫번째 결여는 최적화의 부재다. 태초에 프로리그가 생겼을때 팬들은 한손에는 스톱워치를 들고 임요환의 바카닉의 타이밍을 제보면서 경기 후, "3초 늦었습니다" 라고 언급했던 명장 주훈의 모습에 경악했다. 만약 요즘 그런일이 생겼다면? 전시행정이라고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스타크래프트는 1초, 유닛 한기가 아까워서 그것을 분석하고 실행에 옮기는 게임이다. 몇 분 몇초에 드론이 나오고, 몇분 몇초에 첫 뮤탈이 뜨고, 테란이 이 타이밍에 가스를 짓고 있으면 메카닉이고, 이 타이밍에 scv를 쉬고 있으면 타이밍 러쉬이고...
이러한 이론들은 단순히 외워서만 되는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발견하고, 분석하여, 상응하는 행동을 실행하는 삼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속도의 이영호는 저 세 단계에 있어서의 처리속도가 그 어떤 게이머보다 우수하고, 전성기의 마재윤은 넓은 시야로 "발견"에서 큰 득점을 봤다. 이제동의 뮤짤은 그 실행능력이 남들보다 좋고, 등등. (이러한 방법으로 여러 게이머들의 스타일을 분석할수 있는데,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 해보겠음)
홍진호가 저 세 단계에서 가장 부족한것은? 다른것도 있겠지만, 역시 분석이다. 분석은 단순한 이론적 암기보다 수많은 연습끝에 나오는 경험에서 자동적으로 누출되어 나오는것이다. 백전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이년간 연습을 얼마 하지 않았던 홍진호의 알고리즘은 낡은, 구시대적인 분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혹 그 분석이 얼추 맞아 실행을 하려고 해도, 자신이 갖춘 병력과 일꾼의 수가 현시대의 최적화된 저그와 차이가 나기에 이 마저도 영락없이 밀리게 된다.
두번째로는 임기응변의 부족이다. 어쨌든 적은 연습시간에 승리를 차지할려하는 공군이기 때문에, 경기에서 어떠한 필살기든 전략이든 가장 일반적인 상대의 플레이에 맞춰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경기내에서 약간의 변수가 생긴다면? 홍진호는 유감없이 무너진다. 박영민과의 신의 정원 경기에서보면 박영민의 프로브 한기는 의외의 활약을 해주면서 드론 한기를 잡는다. 이까지는 뭐, 간혹 일어나기도 한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예상못한 드론의 사냥에 흔들렸는지, 2번째 멀티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드론을 뽑다가 어영부영 저글링+히드라를 섞어서 헤메던 모습은 분명 홍진호가 준비했던 전략은 아니였을꺼다. 또 다른 예로 마찬가지로 위너스 리그에서의 박영민과의 콜로세움 전. 홍진호는 캐논이 없는 박영민의 진형을 보고 빠르게 드론 몇기를 미네랄에 찍어서 이동시킨다. 그런데 이 것은 아마 홍진호가 "돌발적으로" 판단해낸 결정이였을것 이고, "아아 성큰짓고 컨트롤만 잘해주면... 심장은 두근두근" 한 상황에서 저글링을 상대진영으로 랠리 찍는것을 깜박 잊어버렸다. 임기응변이 부족하다는것은 바꿔 말하면 두가지의 경우가 안된다는건데, 상대가 주도권을 지고 있으면 자기가 하고싶은걸 못하게 되서 무너지고, 상대가 불리하더라도 난전을 유도하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져서 무너지고. 단순히 두가지지만 가장 중요한 두가지이기도 하다.
바꿔서 말하면, "홍진호는 자신이 원하는데로 경기가 진행되지 않으면 무너진다."이다. 이것은 사실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옛날 테란 상대로 70~80% 승률을 보일때도 보여온 홍진호의 고질병이다. 그래서 서지훈과의 결승 비프로스트전에서 예상치 못한 마린특공대에 다잡은 경기를 말렸고, 그래서 드론을 가난하게 하고 저글링을 쏟아붇더라도 홍진호는 무조건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한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감의 부족이다. 홍진호는 공식전에서 승리의 맛을 느껴본지 너무나도 오래된것만 같다. 전성기 홍진호의 저그는 웅장하진 않았어도 날렵했고, 이름 날리지 못한 신인들은 홍진호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에 오히려 움츠려 들곤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홍진호의 자신감은 언제부턴가 훼손되었고, 점점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다 어느샌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모습이 조금씩 보인다. 두 맹수가 싸움을 하는데 한 맹수가 움츠려든채 눈싸움을 피하고, 격투를 겁내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 녀석은 맹수가 아니라 허약한 짐승에 불과하다. 요즘 기사에서 수백, 수천게임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는 홍진호의 소식이 들리는데, 이 세번째의 경우는 연습으로 딸수 없는, 일부 게이머들만이 가지고 있던 특수능력이다. 쩝, 홍진호도 분명 가지고 있었는데.
가장 큰 세가지 고민을 뽑고 나니, 또 한숨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부활은 가능한거야?" 라는 생각. 홍진호의 부진이라는 매듭은 엉키고 엉켜 칼로 자르지 않으면 풀수 없을정도로 엉망이 되어있는것 같다. 아니, '부진' 이라고 논하는것 자체도 멋쩍기만 하다. 실력이 바닥난 이 게이머 앞에서, 그 적디 적은 가능성이 제시해주는것은 뭐가 있을까? 감히 이 복잡한 매듭을 풀어보려 한다.
첫째로는, 앞서 말했던 발견-분석-실행 과정에서 홍진호가 여전히 녹슬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그래, 바로 실행 부분이다.
이번 예선에서 홍진호가 가끔 이긴 경기들을 보면, 전부 다 초반에 저글링, 히드라, 혹은 럴커등으로 토스를 몇번 이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낡은 분석시스템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초반의 양상은 어쨌든 예전과 다를바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파일런 이후 포지, 포지 이후 넥서스 혹은 캐논, 그리고 언제까지 질럿은 뽑지 않고... 등은 저 예전 강민이 처음 더블넥서스를 발견할때도 토스가 그려왔던 그림이다. 컨트롤이라던가, 물량이라던가, 실행을 빛내게 하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는데, 홍진호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그 위대한, "스타급 센스," 다른말로 하면 직감이다. 승부사 홍진호는 사라졌을지 모르나 그 피는 아직까지 몸속에서 돌고있다고 하면 좀 너무 서사적인가. 어쨌든 이 "실행"이라는 엔진만큼은 아직 쌩쌩하게 사용할수 있기에, 앞에서 언급한 약점인 "분석"에 최신 정보들을 결합시킨다면 구려만 보였던 홍진호의 게임은.. 회생할수 있다!
두번째는, 지금의 스타판에서 홍진호의 마인드를 가지고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그러니까 지금의 홍진호가 벤치마킹할수 있는 좋은 롤 모델이 제시되어 있다. 박찬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박찬수의 가장 큰 강점은 물론 그 뛰어난 뮤탈 컨트롤에 있지만,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마인드 자체가 팀 선배와 흡사하다. 물론 한상봉의 스타일도 뒤를 바라보지 않고 올인 이라는 분위기에서 '폭풍스럽다' 라는 표현을 쓰지만, 홍진호의 폭풍러쉬는 '무조건 올인 안되면 지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파생되었다고 하면 오해다. 공격형 저그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굳이 거기서 갈라보자면,
한상봉은 자신의 빌드를 공격에 극대화 시켜 상대의 약한 타이밍을 찢어서 짜내는것이고, 박성준은 상대를 분석후 그 약한 타이밍을 꿰뚫고 있다. 홍진호는? 그게 뭐랄까, 좀 묘했다. 상대가 약한 타이밍인지 강한 타이밍인지 판단하기 미묘한 시점에, 상대에게 돌격하더니 어찌어찌 하다보니 경기는 끝나있더라... 뜬구름같은 말이지만 그랬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지금의 박찬수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로스트사가 신상문과의 카르타고 4차전을 생각해볼까. 분명 신상문의 바이오닉이 상대의 앞마당에 진입했기에 유리했는데, 뮤짤로 이리저리 흔들어주고 단 한번의 찬스를 잡더니 그대로 상대를 메쳐버렸다. 진영수와의 16강전은 더 하다. 데스티네이션에서의 1차전은 가난함속에서도 운영의 묘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신 청풍명월에서의 3차전은 럴커 단 3기로 상대방을 마비시켰다. 홍진호가 잘하던 플레이들이다. 허영무와의 결승전 역시, 올인같지 않은 올인으로 전지전능한 프로토스를 꺽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더블커맨드를 넘어 메카닉이 대세가 되고, 삼햇을 지나 뮤짤이 사랑받는 시대에서 박찬수는 '홍진호스러운' 스타일로 리그를 지배했다. 홍진호가 본인에게 맞는 최적화된 저그를 찾는다고? 박찬수라는 훌륭한 롤모델이 있다. 항해를 하는데 나침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두 말하면 입아프고, 세 말하면 짜증난다.
마지막으로 찾아볼수 있는 홍진호의 가능성, 그것은 최근 그의 행보를 주목 해볼 필요있다.
임요환, 이윤열, 마재윤, 허영무, 염보성, 박지수. 홍진호가 그들보다 나은점은? 이번 예선에서 그들보다 더 좋은 성적을 냈다.
'콩라인의 수장답다'라고 웃어넘길순 있지만, 어쨌든 홍진호는 난다 긴다하는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양대리그 PC방 예선 준우승을 차지했다. 상대가 신인이건, 금방 전역한 선임이였든, 토스였든, 저그였든, 맵이 어쩌고 저쩌고 왈가왈부 하든, 중요한건 홍진호가 이겼다는 사실이다. 홍진호가 이겼다니! 웅진과의 위너스리그 전, 홍진호가 몇백일만에 프로리그 공식전에 모습을 드러냈을때, 엄재경은 말했다.
"오랜 갈증끝에 물 한모금 딱 마시면, 물이 더 먹고 싶습니다. 미칠듯이 먹고 싶게 되는거에요!!"
비록 공식전도 아니고 프로리그도 아니였지만, 어쨌든 홍진호는 예선에 나가 대다수의 선수들보다 더 좋은 결과를 받았다. 비록 아쉽게 두번 다 예선 결승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단순히 "아이콘"인줄만 알았던 그가 타 게이머들을 하나 둘 씩 이기면서, 홍진호의 게이머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마련되지 않을수 없다. 앞서 말했던 자신감의 부재를 찾을수 있는 방법은, 연습이 아니라 승리다. 그 승리의 시원함을 잊은채 자신의 갈증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던 홍진호가, 한경기 두경기씩 이기고 있기에 사기는 더더욱 충전될수 밖에 없다. 박정석을 봐라, 공식전 십 몇연패하다가 송병구 잡고, 어느새 프로리그 100승을 채워서 부활의 날개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군대 입대하기 몇개월 전, 홍진호는 김정민의 스팀팩에 나와 5할성적을 간신히 유지하던 임요환을 일컬으며 말했다.
"나도 공군가봐, 저렇게 할수 있어. 맨날 매달려서 연습만 할텐데."
그 발언이 단순히 동시대의 천하를 함께 호령했던 라이벌이 건재한 모습을 봐서 샘이 났기에 나온건지, 정말로 독기를 품으며 사람들에게 홍진호의 힘을 또다시 증명시켜주고 싶었기에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눈 딱 감고 후자라고 믿을수 밖에 없다. 홍진호의 팬이기에, 그리고 팬과 선수간의 관계에는 신뢰라는 것이 있기에.
홍진호의 부활확률? 여전히 미미하다. 하지만 어제의 경기들을 보며 나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환호하고, 저글링 한기, 드론한기에 숨조리며 조용히 지켜보다가, 그가 패배를 인정했을때의 허탈함을 느꼈다. 나뿐만의 얘기가 아니다. 엄재경이 그랬고, 전용준이 그랬고, 스타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날 홍진호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간 소소한 사건에서, 우리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될수 있을까? 또다시 홍진호가 이기는 경기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는 거기에 환호와 감사를 표시할수 있을까?
2.69 퍼센트보단 높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