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아니 새벽.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지친 몸과 두뇌의 회복을 위해 샌드맨(Sandman)의 부름을 받고 무의식의 경계면에 파묻힐 만한 시간. 시계마저 하품을 하며 억지로 초침을 밀어내릴 그 때에도 전력을 맘껏 소비하면서 보내는 자들은 생각보다 많다. 도서관에서 암호 같은 책을 해독하는 학생부터 살아오며 배워온 모든 욕을 상사를 대상으로 복기하고 있는 야근 회사원, 언제고 철저함을 내보여야하는 경찰과 그런 그들의 빈틈을 노려야하는 도둑은 그 안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그런 밤과 낮의 시간 경계가 허물어진 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는 다른 직업 종사자가 하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 날 새벽은 뭔가 수상쩍었다. 원래대로라면 밤의 어둠을 뚫고선 무수한 잡담과 고함이 새어나오고 컴퓨터의 진동 소리가 끊이지 않으며 가끔씩은 야식을 먹고 끓이고 엎어버리는 요란함까지 나와야 정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너무 고요했다. 조용한 정도가 아닌 과연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의심이 될 정도의 적막감. 물론 빛도 한 줄기 비쳐지지 않았다. 그저 별빛과 달빛이라는, 원시인들도 사용했던 자연적인 조명만이 희미하게 보여주는 내부는 달라진 것은 없다. 가구도, 컴퓨터도, 냉장고 안의 식량과 먹다 남은 음식물까지 그 자리 그대로 남아있다.
아니, 달라진 것은 하나 존재했다. 사람이 쓰러져 있다. 뭔가 강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완벽히 무방비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는 사람. 한 둘이 아니다. 각자 자신의 유연성을 과시라도 하는듯한 자세들로 연습실과 거실 등지에 쓰러져있다. 화장실 변소에 반쯤 걸친 흉한 포즈로 엎어져 있는 사람까지. 평소라면 폭소를 일으킬만한 자세였지만 냉담한 분위기는 그럴 기분을 완전히 말려버린다.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럼 죽은 걸까? 어떤 냉혹한 살인마가 급습을 해서 이런 참변을 만들어 낸 것일까? 다르다. 분명 작은 움직임 하나 없지만 이들에겐 시체에게서 느껴지는 무생물적인 냄새가 없다. 오히려 게임 속의 좀비처럼 쓰러진 척하지만 등을 돌리면 순식간에 일어나 뒤에서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생동감마저 느껴진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걸까. 사람은 언제나 바로 옆에 해답이 있으면서 놓치고 지나가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건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생물학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역사학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쉽게 멸절하는 종이 아니다. 어느 상황, 어느 적이라 하더라도 살아남는 법을 체득하고 유전하면서 살아남는다. 그런 살벌한 긴장감이 맴도는 공간 안에서도 이유 모를 습격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다. 2층 숙소의 한 구석방. 밑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소리와 빛이 이유모를 반가움마저 느끼게 해주는 그 곳에 이 참사 속에서 벗어난 두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안도는 금물. 어떤 의미에서 그 둘은 생존자가 아닌 공범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한 명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정신 어느 한 곳이 이상하다던가 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한 명은 무슨 짓을 하려는 할 마음이 굴뚝같다 하더라도 손가락 하나 끄떡 할 수 없는 상태로 보이니까. 그래도 입은 움직일 수 있었는지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간신히 문장다운 대사를 꺼내는데 성공했다. 그건 이번 사건에 걸 맞는,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인류의 문명과 공존해왔던 그런 말이었다.
[으으, 확실히 너무 많이 마셨나봐.]
리허는 늪 속에서 갓 꺼내진 사람처럼 신음소리를 냈다. 술독은 가장 악독한 늪지보다 더 지독한 경우가 있으니 크게 다른 점은 없을 것이다. 조우렌은 걱정 섞인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아니, 죽을 것 같아.]
내부에 박힌 폭탄이 터져 버린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쑤시고 울리고 뒤엉키는 머리에 비해서 그나마 속이 박박 긁혀 나간다거나 위액이 역류를 하며 올라온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 이유도, 다른 이들과 달리 지금 이 시간에 깨어난 것도 조우렌이 특별히 만들어준 ‘중국 수 천 년의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비전 숙취 해소즙’의 효과일 것이다.(두려움에 성분을 물어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리허는 그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그걸 먹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나 머리를 부여잡고 있지는 않을 것이니까.
[리허 씨답지 않았어요. 그렇게 많이 마시다니.]
리허는 결국 억지로 고개를 든 다음 머리를 침대 옆의 벽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사람의 뇌도 가전기계와 다를 바가 없는지 머릿속이 시원해지면서 한결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연습하듯 입술을 몇 번 움직인 다음에 말을 꺼냈다.
[뭐, 나도 사람이고 가끔은 그렇게 미친 듯이 마시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야. 그리고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내가 지금은 이래 보여도 대학 입학할 시기에는 정말 대단했었다고.]
[네네, 잘 알고 있어요. 과 선배들 앞에서 술상 뒤집어 엎어버린 것이라던가, 길거리에서 뻗은 후 일어나보니 공안에 끌려간 상태라던가, 자신도 모르게 링과 소이와 같이 아침을 맞이해서 점심때까지 싸움을 벌였다는 등등 말이죠.]
리허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누가 봐도 숙취의 고통 때문은 아니다.
[.......어이, 네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제 술 취한 상태에서 줄줄이 말했다고요.]
[.......망할.......설마 다른 것도?]
[네. 다른 것도.]
조우렌은 어린아이가 지을만한 순진하고도 잔인한 미소를 지었고 그 얼굴을 본 리허는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망할.]
리허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금 상태를 봐서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제대로 기억할 인간은 나이를 핑계로 주스로 대신한 조우렌 뿐일 것이니 어떻게든 녀석의 입만 막아버리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예상 아래에 그는 필사적으로 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조우렌의 생각을 읽었다면 둘은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사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우렌은 어떻게 하면 그 소문들을 자기가 그랬다는 흔적 없이 퍼트릴까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리허는 두통 때문에, 그리고 조우렌은 그에 따른 보복과 언제고 쓸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아끼자는 생각으로 사고를 그만 뒀을 때 다시 대화가 재개되었다.
[정말 나답지 않게 들이 부은 모양이네.]
[그래도 기분 좋았죠? 자신이 따낸 우승컵에 술을 부어서 마시는 것은.]
[그래. 정말 좋더군.]
[만족해요?]
[응?]
[그토록 원하던 우승이었잖아요. 아, 별로 신경 안 썼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니까요.]
[쳇, 어린놈이 그런 말 하면 사랑 못 받는다.]
[리허 씨의 사랑 같은 것은 링과 소이, 아니면 메리 씨에게나 충분히 주세요.]
[.......젠장.]
리허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가 일어난다거나 할 만한 상태가 아님을 잘 알았기에 그 움직임은 그가 허리를 벽에 기대는 것으로 그쳤지만 그래도 누워있을 때와 달리 방 안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와 답답함은 좀 해소되었다.
[어쩐지 눈이 좀 부신다 싶었더니 또 연습 중이었어?]
[네, 매일 하던 일이잖아요.]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어도 되잖아.]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우승을 한 사람은 리허 씨지 제가 아니잖아요.]
오호라, 리허는 씩 웃었다. 김진호가 그 얼굴을 봤으면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미소 어쩌구라고 했을 만한 웃음. 그는 처음 조우렌이 이 숙소를 찾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어린 아이였다. 그리고 그 나이 때 소년들이 으레 그렇듯이 게이머로서의 야망이라던가, 경쟁심리라던가 하는 점은 제로에 가까운, 그저 게임을 즐기고 그래서 이 길로 온 녀석이었다. 승리를 즐기고 게임을 즐긴다. 하지만 아이는 어린만큼 빨리 자란다고 했던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소년은 더 이상 그저 즐거운 게임을 맘껏 하고 싶어서 온 그 아이가 아니었다.
‘약간은 씁쓸한 변화기도 하지만 말이야.’
[어라, 뭐라고 했어요?]
[응? 아아. 만족하지 않는다고.]
[안 해요? 우승인데요?]
[눈치가 있다는 놈이 할 말이 아니잖아. 내가 우승 하나 정도로 만족할 인간으로 보여? 더욱이 CEG는 엄연한 국내 대회. 세계에는 아직 내가 전적에서 뒤지는 녀석들이 많이 버티고 있어. 더 매지션 안현호, 난폭한 유럽의 지배자 군나르 페데르센, 세계 최강의 언데드 라이센 신, 그리고 이번에는 어떻게 이겼지만 그래도 껄끄러운 한국 언데드 군단의 중심 최성훈 등등. 그런 놈들을 모조리 잡아내고 세계대회는 우승해야 조금 갈증이 풀리겠지.]
그래도 은퇴라는 마지막이 찾아오기 전까지 만족이라는 느낌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승부의 세계에 끝이나 정점과 같은 말은 사용할 수가 없다. 노장들은 언제나처럼 위에서 버티고 눌러앉아있지만 새로이 들어오는 유입되는 신예들은 항상 그 자리를 넘본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몇 몇 인물들이 최상위권을 독점하고 있는 형태의 워3계였지만 이곳도 마찬가지로 무서운 신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짜오룽쒀도 그 중 한 명이겠지. 그가 진호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어린이들은 작은 경험이라도 빠르게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 아이는 자신과 다른 상위 선수들을 위협할 만한 강적이 되어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그는 앞에 있는 조우렌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일이다. 가뜩이나 지금만 해도 겨루고 싶은 인간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어쩌면 그들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어린 유망주들이 계속 올라온다. 이런 느낌, 그런 실력자들과 겨루는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이 가망성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뛰어들었던 것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성공에 축배를 들었다.(물론 현 상황에서 입에 댈 엄두는 상상 속에서도 하지 못하였다)
[그나저나 애인은 잘 있어?]
회심의 일격. 열심히 게임을 하던 조우렌의 마우스가 엇나가면서 얼굴이 빨개진다. 아무리 성장했다고 해도 그건 게임에서의 이야기 일뿐 이런 문제라면 여전히 애다.
[애인 같은 거 아니에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항상 나오는 궤변일 뿐이에요. 어쨌든 그런 거 아니니까 으레 짐작하지 말아줘요.]
알고 있어. 조우렌이 상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정확히 말해 연애 감정은 아니다. 일종의 경애, 혹은 존경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그는 조우렌을 놀릴 만한 일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에-특히 취중에 할 말 못할 말을 모조리 해버린 이후로는 더더욱-속으로만 그렇게 대답했다.
‘하긴 나도 놀라긴 놀랐지.’
그녀를 조우렌이 알게 된 과정은 이렇다. 조우렌의 리플레이를 몇 번 보고 나서 리허는 상대 언데드의 스타일이 누군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상대를 알아내기 위한 마음에 폭발할 지경이었던 조우렌의 무수한 재촉을 받으면서 그는 그게 누군지를 생각해냈다. 라이센 신. 언데드란 종족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 게다가 그의 아이디는 Blue_Sky
[K.D]로 리플레이의 아이디와는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일 뿐 같은 뜻이었다. 이렇게 심증과 물증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에서 조우렌은 자백(?)을 원하였다. 물론 그의 영어실력은 기본영단어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그 말을 받아내는 역할을 리허에게 떠넘겼고, 리허 역시 리플레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인컵에서 라이센 신 본인은 아니었지만 같은 팀이고 친구로 알려진 로이 앤더슨을 만났던 것이다. 거기서 그는 충격적인 말을 알려줬다. 그 아이디의 장본인이 라이센이 아니라 그의 여동생이라는 말이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그 상대의 실력을 알고 있는 상황이라 둘은 그 말을 쉽게 믿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로이는 증거라면서 그와 라이센, 그의 여동생과 이름 모를 상대가 맞붙었던 2:2 팀플 리플레이와 덤으로 절대비밀 보장이라는 조건 아래에 그녀의 사진까지 보내줬다. 로이가 원래 장난꾸러기에 사람이 좀 가볍다는 평은 많았지만 적어도 이런 일을 가지고 멀리 있는 중국의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둘은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조우렌은 그녀의 사진을 프린트해 항상 지갑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한국이름이라 머리에 딱 남지 않았고 숙취로 인한 두통은 기억 발굴을 방해했다. 확실히 예쁘장한 얼굴의 여성이긴 했다. 그도 사진을 보고 어느 정도 매력을 느꼈을 정도로. 그래도 조우렌이 그녀에게 푹 빠진 것은 그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예전에 붙었던, 그리고 자신에게 영원히 기억될 게임을 해주었지만 아이디 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더욱 강해진 것이다.
그는 다시 조우렌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을 놀리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모습으로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시 한 번 웃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지금은 사랑과는 약간 다른 감정뿐이라고 하더라도 사춘기로 접어드는 소년에게 있어서 결과적으로 연애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법이다. 어쨌거나 ‘좋아 한다’라는 단어 속에 모두 들어있는 것들이니까. 결국 그는 어떻게 하면 조우렌을 더 놀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잠에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로이 앤더슨도 자기가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했다. 물론 그의 성격상 그가 우연히 만난 중국인 선수에게 했던 말이 한 유망주의 집중력을 배가 시켰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래?’ 한 마디로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그는 결과를 예상하고 행동을 하는 신중한 인물이 아니다.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생각이 없는 것일 거다.
그런 인물답게 그는 아무런 우회나 은유 없이 직설적으로 라이센에게 물어보았다.
[어이,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 아무리 애를 써도 가연이와 결혼은 할 수 없잖아. 혼자 가망 없는 일에 들떠서 날뛰고 있는 거 아니야?]
다행히 라이센 신은 신사적이라는 평에 부끄러움이 없을만한 인격자였고 오랜 기간 로이와 함께 하면서 그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욕을 쏟아부어주거나 주먹을 날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입을 열 뿐이었다.
[할 수 있어.]
[여동생인데? 유럽에서도 그런 관계는 인정 못 하는데 더욱이 한국은 그런 쪽에선 우리보다 심하잖아.]
[상관없어. 가연이와 난 친남매도 아니고 이복남매도 아니야. 어디까지나 재혼으로 이루어졌던 법률상의 남매일 뿐 피는 한 방울도 섞여있지 않지. 혈연적인 이유로 방해받을 이유는 하나 없다는 말이야.]
[흐음, 그렇군. 하지만 그 법률상의 남매인 것도 안 되지 않아?]
[역시 상관없어. 내가 가연이와 남매지간이 된 것은 아버지가 가연이 어머니와 재혼을 했었기 때문이지. 지금은 다시 이혼한 상황. 역시나 법적으로도 더 이상 가족이 아니야. 지금 상황에선 나와 가연이는 완전 남이나 마찬가지.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버지나 가연이 어머니나 이혼했던 상대와 사돈 간으로 만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도 없어. 대판 싸우고선 갈라진 것이 아니라 원만한 합의에 의해 헤어진 것이니까. 서로 가끔 연락하고 잘 지내시니 그런 문제는 없을 거야. 예전에 아들, 혹은 딸이었던 사람이 사위나 며느리가 되는 것에도 거부감은 없고.]
[흐음, 사랑에 빠진 남자가 보통 그렇듯이 상대 여성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더니,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너와 달리 난 언제나 진지해.]
[그럼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연이의 마음이겠네.]
이번에도 라이센은 침착했다. 그가 상식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곡을 찔렀기에.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지.]
누군가가 가연에게 가서 그녀에게 오빠를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가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대답에 라이센은 만족하기는커녕 남몰래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좋아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 대해 말하는 ‘좋아해’에는 어디까지나 사이좋은 남매의 애정만이 가득 담겨있을 것이다.
분명 둘은 누가 보더라도 사이좋은 남매다. 혈연적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법률상으로의 연결점마저 끊어진 지금에서도 가연은 그를 좋은 오빠로 대했고 그 역시 그녀를 좋은 여동생으로 대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처음 만남 자체가 남매로 만난 것이고 서로 친해진 것도 남매로서 친해진 것이다. 그런 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계속 멈춰있을 수는 없잖아?’
예전에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자신에게 다가온 행운이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어느 날 막연히, 정말로 막연히 그는 자신이 미래에 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을 생각했다. 그녀가 데려온 남자가 과연 제대로 된 남편 역할을 할지 살펴보고 그렇게 되도록 충고하면서 결과적으로 행복한 결혼을 축하해 주는, 처남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일. 그리고 그는 그 다가올 미래에 끔찍함을 느꼈다. 물론 동시에 그런 자신의 감정에 불쾌감도 떠올랐다. 동생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가연 사이의 다리가 꽤나 복잡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알고 나서 그런 불쾌함은 사라졌다. 그렇기에 비록 내색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이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운해 하진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연은 달랐다. 그녀는 부모의 이혼에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 과격한 모습은 그녀를 알고 난 이후 처음이라 그는 꽤나 놀랐고,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이혼 이후에도 계속 좋은 오빠로 남아 주었다. 아마 그가 변화를 시도했다면 그녀는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둘은 평범한 남보다 더 먼 사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건 그가 결코 바라지 않는 결론이었고 그래서 그는 현상 유지에 만족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머나먼 유럽 스웨덴으로 떠나있는 동안에 가연은 더 이상 혼자 남는 것을 무서워했던 소녀가 아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을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한 명의 여성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이름뿐인 남매라는 연결점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만큼. 고마워해야 할까나? 그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의도하진 않았고 의도했을 리도 없지만 그의 존재가 지금과 같은 변화를 만들어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에 어울리는 보답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들이 변해야할 시기가 온 것이지.’
라이센은 연습실 구석에 있는 보드를 바라보았다. 대회를 비롯한 갖가지 일정들이 난잡하게 그려져 있는 가운데 한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어쨌거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있는 장소로 가야 한다. 그는 살짝 기지개를 폈다.
WEG 오프라인 예선 날짜가 서서히 다가왔다.
1부 : Romance
1. Boy meet Girl
2. Boy meet Guy?
3. 남매
4. 데이트
5. 발을 내밀다
6. 예선 7일전
7. 끝과 시작
8. Log Bridge
9. 그리고
2부 : Daydreamer
prologue
1. new challenger
2. 각자의 이유
3. 한국으로
4. meet again
5. 한여름날 어느 복도
6. 東과 西
7. The Benissant
8. 교점(交點)
9. 파란 하늘
10. collision
11. 신의 아들
이제 슬슬 터닝 포인트가 다가오고 있습니다......아직도 반 넘게 남았군요ㅡㅡ;;; 적어도 올해안에는 끝낼 계획이었는데 이제 복학도 했겠다 슬슬 바빠질 시기라서 장담은 못하겠네요. 가뜩이나 글 쓰는 속도가 느리니 원...그리고 Romance의 주무대(?)가 프라임리그(클라임리그;;)였다면 Daydreamer의 주무대는 WEG입니다. 물론 WEG가 주 무대를 중국으로 바꾼 것은 꽤나 지난 일입니다만 처음 구상 때는 한국에서 열렸기 때문에 그냥 한국에서 열리는 것으로 설정해두었습니다(어이) 솔직히 카스에서의 사건이라던지, 선수 중복 출전 문제, 얼마전에 불거졌던 시드 문제까지 불미스러운 일들이 많아서 좀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MIL의 성격이 국내예선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유일한 한국 주체의 오프라인 대회이니 아껴줘야 겠지요.(CJ채널 개국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만....사실 무리겠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