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의 기원은 파라솔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파라솔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2310년 전에 조각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죠.
중국에서는 기원전 25년 왕광의 무덤에서 접을 수 있는 파라솔(우산)이 발견되었는데요. 유럽에서는 18세기나 되어서야 비슷한 기능이 있는 우산이 등장하죠.
고대에 쓰였던 파라솔(우산)은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하늘, 권위, 죽음 등의 상징으로 이용되어왔어요. 우산은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기도 했는데요. 명나라 시기 황제는 커다란 붉은 비단 우산 2개를 들고 다녔고, 고위직은 붉은 비단으로 안감을 대고 주름 장신을 단 검은 우산, 양반은 조롱박 모양 주석 손잡이가 달린 붉은색 우산, 천민은 종이로 만든 우산을 사용했어요.
영국의 사업가 조나스 한웨이는 1750년경 러시아와 중동을 여행한 뒤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진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데요. 그중에서는 그가 페르시아에서 본 양산(우산)이 있었어요. 그는 영국에 와서도 옷이나 가발이 비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을 사용했는데요. 당시 런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야유를 보냈죠. 그럼에도 그는 죽을 때까지 우산을 썼어요.
프랑스에서는 한웨이가 영국에 우산을 가져온 시기보다 50년 일찍 우산이 등장했는데요. 프랑스에서도 우산은 탐탁잖게 여겨졌어요.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망상자이거나 옷이 망가질까 봐 유난 떠는 사람 혹은 마차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졌죠.
이러한 사회적 인식 외에도 도로의 상태와 우산의 퀄리티도 문제였어요. 보행로는 너무 좁아 한 명씩만 지나갈 수 있는 경우가 많았고, 우산도 비싼 가격에 비해 질이 좋지 못했죠. 초기 우산은 고래의 뼈로 만들어져 무거웠고, 부러지기 쉬웠거든요. 천도 방수가 완벽하지 않아 젖기 일쑤였죠.
3. 계급별로 다른 우산
19세기가 되어서야 우산은 인기를 얻게 되어 남성들도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는 다양한 우산들이 등장했는데요. 향수나, 글 쓰는 도구를 담을 수 있도록 속이 파인 손잡이가 장착된 우산. 커버에 커튼을 친 우산, 손잡이에 병이 달려 있어 고인 빗물을 담을 수 있도록 한 우산, 접으면 커버와 우산살이 우산대 안으로 들어가 지팡이가 되는 우산도 있었어요.
이처럼 수제로 제작되던 우산은 신분과 세련된 취향을 보여주는 사치품이었는데요. 1830년대부터 유럽에 중산층이 자리 잡으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고품질 유사품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불필요한 기능은 점차 사라졌어요.
19세기 영국에서도 계급에 따라 우산이 달랐어요. 실크 우산은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면으로 만든 우산을 썼어요. 손잡이의 소재, 우산을 마는 방식도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는데요. 실크는 면보다 깔끔하게 밀렸기 때문이죠.
[고래뼈 우산 ⓒ national museum of american history]수요가 늘자 공장형 생산업체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기존 우산의 문제점들도 해결되기 시작했죠. 1848년 폭스사가 강철 튜브로 우산살을 만들어 기존 고래 뼈 우산살의 무겁고 부서지기 쉬운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 우산에 파라곤이라는 상표를 붙여 판매했죠.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는 윌리엄 생스터가 알파카 직물을 사용한 우산을 선보여 수상했는데요. 알파카 천은 기존에 사용하던 실크나 면보다 훨씬 방수가 잘 되었죠.
폭스사와 윌리엄 생스터의 아이디어가 결합된 우산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1855년에만 400만 개 가까이 팔렸어요. 심지어는 군인들이 나폴레옹 전쟁 당시 전쟁터에도 지참했죠.
4. 양산은 여성의 전유물?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부터 양산(우산)은 여성만 사용하는 물건이었어요. 기원전 520년 아나크레온의 <아테나이오스>에는 아르타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성처럼 양산을 사용한다고 조롱받았죠.
우산이 유행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던 19세기에도 양산만은 여성용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빅토리아시기에는 레이스와 자수, 보석 등으로 장식되어 여성 패션의 핵심 아이템이었죠. 20세기 초, 양산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졌는데요. 심지어 양산 때문에 말이 겁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폴로 경기 전에는 양산을 숨기는 것이 예의였죠.
1922년에는 개 양산이 인기를 끌었어요. 본래 개 양산이라고 하면 양산 손잡이에 개 머리 모양이 새겨진 양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요. 나중에는 정말 개가 사용하는 양산이 등장하면서 개를 위한 양산을 의미하게 되었죠. 하지만 이때쯤이 되면 하얀 피부보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인기를 끌게 되면서 양산은 구닥다리 물건으로 취급되었죠.
5. 3단 접이 우산[간지 쩌는 1938년 크닙스 우산 ⓒ Knirps]광산 평가원이었던 한스 하우프트는 전쟁의 부상으로 지팡이가 필요해 일반 우산을 들고 다닐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우산을 발명하고자 1916년부터 접이식 우산과 관련된 기술을 여러차례 특허를 냈죠. 1930년 마침내 3단 접이 우산을 발명하게 되죠. 그는 자신이 만든 우산을 가지고 크닙스(Knirps) 회사를 설립했어요.
6. 인간 우산, 체임벌린[사실 우산이 아니라 지팡이였던 것이 아닐까]20세기 유럽에서 우산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는데요. 바로 영국의 총리였던 체임벌린이었죠. 그는 어딜가든 항상 우산을 챙겨다녔기 때문에 우산이 그의 상징이 되었는데요.
1930년대 말 그는 히틀러의 비위를 맞춰 뭔헨 협정에 서명하였는데요. 대중들은 이로써 전쟁의 위협을 제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임벌린의 인기는 치솟았고, 덩달아 유럽 전역과 인도 등에서 우산 판매가 급증했어요. 물론 히틀러가 뭔헨협정을 파기하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체임벌린은 '우산 평화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받았죠. 심지어 히틀러도 1940년 체임벌린의 고향인 버밍엄에 폭탄을 투하하는 계획에 '우산'이라는 작전명을 붙이기도 했죠.
7. 우리나라에서의 우산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우산은 양산을 겸한 의례용으로 먼저 등장했어요. 고구려 벽화에서 시녀가 일산(우산)을 상전에게 씌워주는 모습을 찾을 수 있죠. 고려 이후에는 장량항우산(張良項羽傘)이 있었는데 볕을 가리는 양산과 우산을 겸한 것으로 벼슬아치만 외출 시에 사용했어요.
서민들은 우산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막는 것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우산 대신 짚으로 만든 도롱이와 삿갓을 이용해 비를 피했어요. 더 나아가서는 기름종이로 만든 전모와 갈모를 이용하기도 했죠. 갓이 컸던 조선 후기까지는 갈모가 커서 몸을 모두 가릴 수 있었으나 말기에는 갓이 작아지고 갈모도 좁아져서 머리만 비를 피하는 모습이었어요.
[신윤복 그림에서 나타난 쓰개치마]조선 중기 이후 양반층 부녀자들은 외출할 때 쓰개치마를 써서 얼굴을 가렸는데요. 이 쓰개치마를 기름종이로 만들어 비옷으로 사용하기도 했죠. 1911년 배화학당에서는 쓰개치마를 교칙으로 금지했는데요. 이 교칙 때문에 자퇴하는 학생이 생길 정도로 파격적이었죠. 그러자 배화학당은 검정 우산을 주어 얼굴을 가리게 했어요. 이후 배화학당 학생이 아닌 여성들에게도 크게 유행했고, 이 검정 우산은 펼쳐진 모양이 마치 박쥐처럼 생겼다고 해서 박쥐우산 또는 편복산(傘)이라고 불렸죠.
[1970년대 비닐 우산과 지우산의 끔찍한 혼종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