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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3 21:05
블랙 코미디 자체가, 상황의 부조리에 따른 우발적인 개그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괴상하게 삽입된 코미디까지 포함한다면,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의 정석입니다. 중간에 웃긴 장면이나 실소가 나오는 장면이 많거든요. 그리고 그런 유머가 진짜 웃음이 결코 되지 못하게, 진지한 상황에서 섞어놓는, '독일식 유머가 이런 것인가?' 싶은 수준급 있는 연출이 많습니다. 중간에 몸에 맞지 않은 노획한 바지 때문에, 팬티차림으로 연설을 하는 장면이나, 중간에 탈영병이 즉결처형때 총알이 떨어져서 도망을 가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유약한 단역으로 생각되던 수용소 장교의 여자친구가 총을 뺏어서 쏴버리지 않나... 진짜 비틀린 웃음이 되게 많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역사적 맥락을 잘 아는 관객이라면 피카레스크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해서라도 시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진짜 그렇기에 역겨운 영화지만요.
21/11/23 21:07
넵, 작품에서도 그런 총통의 광기가, 히틀러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인데도 엄청나게 중요하고 위압적으로 다가옵니다. 아이젠하워나 처칠은 결코 가지지 못할 그런 독재자의 맛이랄까요. 온갖 괴상한 즉결처형을 남발하는데도, 막상 나치당원이나 현직 장교라는 놈들이 '크으, 그렇지 총통이라면 이런 말씀하셨겠지'하면서 같이 어울리는게, 진짜 작품의 부조리함을 증대시키고, 정치적인 비판을 하는 장면이 없어도, 그냥 그 시대 자체가 미친 시대였고, 다시는 돌아오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팍팍 들게 해줍니다.
21/11/24 14:42
히틀러의 명령은 아니었지만 몰라도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후방에선 그라이프코만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패배주의자들을 즉결처형하고 다녔습니다. 실제로 도망치는 자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쇠르너는 정작 본인은 아무한테나 즉결처분을 남발해놓고 본인은 미국에 포로로 잡혔죠.
21/11/23 21:25
글 잘 읽었습니다. 어쩌면 일종의 망령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캐릭터 설명이시네요.
저는 글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도쿄!>라는 옴니버스 영화(우리의 봉감독님도 참여한!)의 레오 카락스 감독의 <메르드>가 떠오르네요. 특히나 말씀하신 크레딧 장면에서요. 그때 당시에는 뭐지? 싶은 느낌과 묘한 불쾌감이 들었던 영화였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 낸거 처럼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망령은 참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는 거죠. 오래된 기억이지만 갑자기 저의 주의를 끌고 원래 하려던 일을 까먹게 만들고, 자신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모아놓은 다음에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감정, 그 상황은 오래오래 남게 되는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제가 지금 미뤄놓은 과제와 공부 같은 것 처럼이요. 크크. 어쩌면 영화의 끝이 단순히 자막으로 처리된건 괄호의 느낌은 아닐까 싶긴 합니다. 기괴하고 기묘한 부조리극에서 붙잡혀 사형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도 조리에 맞는 결말이니까요.
21/11/23 22:34
저는 저번에 리뷰한 영화 "남부군"하고 엔딩이 영화에서 다루는 나중의 일은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같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어쩌면 영화 본편과는 어울리지 않는 결말들을 주석처리 해버린 것일 수도 있겠군요.
제가 미뤄놓은 과제와 공부를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흐... 말씀해주신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한번 확인하고 싶어지네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둠의 심연"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좋습니다. 한때 뭔가 대의 같은게 있었던 것 같은 집단이 어느 순간에 그냥 손에 쥔 폭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집단으로 타락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몇번의 사칭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곧 전쟁은 끝날텐데...), 끝까지 영혼을 담아 '대위님'이 되어서 끝까지 가고선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결국 행운과 행운에도 불과하고 죽었다는 결말은, 이 빌리 헤롤트라는 일병이, 그냥 일병이 아니라 폭주 중이던 나치즘의 화신 그 자체로 (부정적으로) 승천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인간 본연의 악행을 보여주니까요. 참으로 교묘한 영화입니다. 당시 독일의 미쳐가던 현실을 사정없이 공격하면서도, 마지막에 크레딧으로, '그런데요 비독일 및 현대 독일 관객 여러분, 거울은 안 보십니까?'라고 꼬집으니까요 흐흐흐. 정말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배경 자체의 설명이 불친절하는 점을 제외하고는 정말 '공부해서 볼만한' 그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1/11/23 23:51
어울리지 않는 결말을 주석처리한다. 고 볼 수도 있고, 마지막 맺음을 교묘하게 관객들에게 떠넘기는 것일 수도 있겠죠. '여러분 나치즘이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진짜로? 저런 부류의 인간이 살아있지 않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도쿄!>는 추천은 잘모르겠습니다. 미셸 공드리 역시, 봉준호 오!, 레오 까락스 음? 정도로 정리되는 단편들이라. 당시 봉준호 감독은 괴물 직후 작품이었죠. 크크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레오 까락스의 불친절하고 기괴함이 도쿄 아래의 불편한 진실을 뒤집어 엎는 느낌이긴 하네요. '공부해서 볼만한' 영화도 좋은 영화지만, 개인적으로는 '공부하게 만드는 영화'가 더 좋은 영화같아요. 영화를 보고 어? 나무위키라도 한번 둘러볼까?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는거 같아요. 실화 바탕의 영화들, 혹은 탄탄한 원작을 가진 영화들이 개인적으로 잘 맞는 것도 이런 부분이 있는거 같아요. 여튼 좋은 영화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졸업사정해야하는데 글쓰기 싫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내용만 글 쓰면서 지내고 싶은데 이놈의 학부는... 크크크 농담입니다.
21/11/24 22:21
넵, 저도 '남부군'을 보고난 다음에 리뷰하게 된 영화여서 두 영화를 많이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체제의 사람들 역시, 끔찍해진다는 그런 상투적일 수도 있는 결론을 똑같이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전쟁 따위는 원래부터 없지만, 인간을 더 효율적으로 망가트리는 사악한 전쟁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영화 '남부군'의 비극과 '더 캡틴'의 비극은, '그냥 인간은 사악해, 전쟁은 끔찍해'라고 일반론으로 환원시키기에는 특정 전쟁의 더러움에서 특별하게 등장하는 추악한 인간상을 보여주는데 공을 들이니까요.
21/11/24 22:22
간만에 정말 재밌게 본 피카레스크로서 높게 평가합니다. 주말에 재밌는 관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생각할거리가 많아지는 우중충한 영화이기도 해서, esotere님의 리뷰도 한번 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1/11/24 14:09
군복을 벗어던진 독일군 탈영병 2명이 무사히 연합군에 항복하고 나서 전쟁도 끝나고 안도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어처구니 없게 흘러가는 전에 인상깊게 보았던 비슷한 소재의 부조리극이 하나 있었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군요.
21/11/24 22:24
오호? 그런 영화도 있군요. 저는 안타깝게도, 질문하신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지만, 그 영화 역시 보고 싶어집니다. 끔찍한 전쟁은 끝마무리조차도 이쁘지 못한 법이군요...
21/11/24 14:53
중간에 사진은 아마 바르샤바에 투입되었던 디를레방어 사단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쳄 바흐, 카민스키랑 더불어서 인간말종 집단 나치 중에서 특출한 쓰레기들이었던 특임부대(아인자츠그루펜) 내에서도 꼽을 만한 베스트 오브 쓰레기들이었죠.
디를레방어는 얘기로는 포로수용소에서 열악한 환경으로 사망했다는데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해당 부대원들은 죄다 치클론b로 죽였어야...
21/11/24 22:28
넵, 디를레방어 여단의 이미지로 참고자료를 찾아왔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영화 자체에서는 설명을 해주지 않고 그냥 종전 직전의 야만속으로 관객들을 던지기 때문에, 그냥 '독일군? 강한 군대였나? 막판에 전쟁에서 졌다지?'라는 정도만 아시는 영화애호가 분들에게는 꽤나 곤혹스러울 영화가 될 것이 뻔해서, 리뷰글에서는 관련 내용을 좀 보충하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흑백으로 촬영한 이유도, 잔인한 장면을 익숙하게 하면서, 변주적으로 끔찍한 웃음을 연출하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일텐데, 이런 2차대전 자료를 보니까, 마치 당시 전시필름 같은 톤으로 되게 잘 맞춰서 준비했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뭐에 홀린듯이 자료를 퍼왔습니다. 정예독일군, 같은 이야기는 이제 대부분의 민낯이 드러난 2020년대에는 정말 흘러가버린 옛 선입견이지요.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광신도-깡패들 모아서 전쟁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치에 대한 충격과 혐오만 늘어납니다.
21/11/25 05:28
각론은 훌륭하나 총론은 빈곤해서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는 건 독일군의 종특이죠.
그나마 1차대전은 빌헬름 2세가 외교를 말아먹었는데 군대가 어쩌란 거냐고 실드 쳐줄 수는 있는데 2차대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총체적 난국. 소련측의 자료가 공개 안 됐으면 국방군 출신자들의 자기변명, 반공주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가득 깔린 자료로밖에 검증할 수 없었을테니 우리도 여전히 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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