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트코에 왔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일요일 오전에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주로 가는 편이다. 우리 집 최고 존엄께서 카트에 물건을 담고 빼고를 즐기실 때마다 옆에 서서 가슴 중간에 내 양손을 악수하듯 맞잡고 비굴한 자세로 훌륭하십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원수라도 감탄 할 것입니다 라며 응원하는 척 비꼬는 것도 가슴 조마조마한 묘미이고, 시즌 마다 바뀌는 시즌을 대표하는 물건을 전시한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입구 전시해둔 거진 구천만원인 금괴를 큰놈과 함께 구경하며 언젠가는 아빠에게 이걸 사줘야 된다 라고 반복해서 세뇌하기 위함도 있다. 금 가격은 싯가이니 금액이 아닌 무게로 1kg 금괴를 사줘야 함을 알려주고, 옆에 다이아는 번쩍거림에 현혹되어 구매하는 순간 가치가 하락함을 명심하고 반드시 금만이 안전자산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세뇌 했다. 그걸 다 들은 큰놈은 옆에서 서서 나를 올려다 보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멍하게 입을 벌린 표정을 볼 수 없기에 눈꼽 만큼은 진정성이 더 있어 보였다. 고맙다, 아들 이제 옆으로 가보자. 하며 아이패드, 갤럭시 탭이 있는 곳으로 가 큰놈과 같이 토킹 톰 고추를 만지거나 미니언 러쉬를 하다보니 와이프에게 전화가 와 매번 미친척하고 들고 가는 아이패드 12.9인치 교환 카드를 들고 큰놈과 함께 옷 가판대로 갔다.
와이프를 찾아 쓱 교환 카드를 내미니 작은놈 목에 이런 옷 저런 옷을 대 보고 있던 와이프는 그걸 받아 자연스레 옷 가판대 저 멀리 두었고 나는 그걸 다시 가지고 와 카트에 다시 넣었다. 카트에는 양 어깨에 레이스가 달린 유아용 티가 몇 개 들어 있었고 나는 그걸 들고 와이프에게 의문을 든다는 식으로 내미니 집에서 막 입힐 것이라 레이스가 달려 있어도 싸기만 하면 상관 없다고 했다. 카트에서 앉아 아빠와 눈이 마주치자 해실 해실 해 맑게 웃고 있는 작은 놈은 앞으로 자기가 남들 몰래 은밀히 공주 옷을 입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을까? 측은한 마음 동시에 레이스가 달려 나오는 싸고 큰 사이즈의 티가 있었다면 나도 집에서 남들 몰래 공주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오싹오싹한 의문이 들었다. 레이스가 달린 아동용 분홍티를 손에 들고 큰놈에게 가져다 대볼까 말까 고민하는 와이프를 보고 눈치 빠른 큰놈은 황급히 카트에 올라타 벌렁 누워 아이패드 교환 카드로 얼굴을 가렸고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은 뒤 와이프는 카트를 밀고 이동했다.
목적 없이 이리 저리 구경하다 큰놈하고 창고에 들어간 뒤 누가 먼저 나가서 문 닫는가 하는 눈치게임을 했고 내가 안 져주고 이긴 뒤 큰놈을 놀리니 큰놈은 삐쳤고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던 와이프는 작은놈을 안으라고 하며 큰놈을 카트 의자에 앉히고 달래기 시작했다. 얼핏 듣기에 큰놈이 시무룩하게 아빠 금괴 안 사준다는 말을 하기에 작은놈을 와이프에게 맡기고 큰놈을 안아 든 뒤 다시 창고로 들어가 큰놈이 지 혼자 후다닥 나간 뒤 문이 닫으니 안에서 내가 무서워하며 우는 척을 하고 나와서 분해하는 척을 보고 큰놈의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그걸 보니 내 금괴는 걱정 없을 듯하여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코스트코 방문 목적인 오란다 한 박스와 몇몇 먹거리를 더 산 뒤 와이프의 눈짓 한번에 매번 그렇듯 순순히 아이패드 교환 카드를 다시 가져다 놓고 계산 후 불고기 베이크를 산 뒤 코스트코를 나섰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지역 유명 김밥집을 지나기에 김밥을 먹을는지 와이프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니 먹을 것을 많이 샀으니 안 먹겠다가 했다. 그래서 김밥 집에 도착 후 그럼 내 것 만 사오겠다 달라고 해도 안주겠다 하니 자기 것도 사오라며 웃었다. 내 것만 사왔으면 십중팔구 뺏겼을 건데 다행이다 안도하고 두 도시락을 샀다.
집에 도착해서 김밥과 불고기 베이크를 먹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김밥 꼬다리를 큰놈에게 자꾸 주었다. 애 좋은 거 주지 왜 그걸 줘 하며 와이프에게 말하니 나를 보고 개구지게 미소를 지었다. 김밥 4줄에 8개 있는 소중한 김밥 꼬다리. 나는 김밥 꼬다리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재료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맛이 진한 것이 첫 번째고 몇 개 두고 보면 재료 길이가 모두 다르기에 맛이 미묘하게 달라 맛이 다채롭기 때문이 두 번째이다. 그래서 나 김밥 꼬다리 좋아한다며 그 이유를 와이프에게 연애 할 때 몇 번 설명 했더니 그 이야기가 그럴 듯 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근데 연애 할 때나 큰놈이 김밥 못 먹을 때는 김밥 꼬다리를 안건들이더니 큰놈이 김밥 꼬다리를 한 입에 넣을 정도의 입 크기가 되자 큰놈에게 주기 시작했다. 서글프지만 내 좋은 것을 자식놈에게 주는 것은 타의로 양보하는 거지만 자의로 양보하는 듯 양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아직 불고기 베이크가 있으니까. 그런데 불고기 베이크는 꼬다리를 나에게 준다. 불고기 베이크는 김밥과 다르게 꼬다리가 맛이 없다. 왜냐 하면 불고기와 치즈가 적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와이프에게 한 적이 없는데 그 정도는 와이프도 아는 모양이다. 장난스런 마음이 섞인 섭섭함이 있다가도 큰놈과 와이프가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좋다.
작은놈을 재우러 들어간 와이프가 같이 잠이 든 모양이다. 큰놈이 살금 살금 걸어가 큰방 문을 빼꼼히 열어보고 그 보다 10배 더 조심 히 문을 닫은 뒤 지 엄마가 자는 것을 확인 후에 나에게 와 오늘은 일요일이고 아침에 도요새 잉글리쉬도 했으며 분수 문제도 한바닥 풀었으니 스마트폰을 하겠다며 조용히 내 귀에다 속삭였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큰놈의 의도에 반하게 뭐? 핸드폰 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니 재빠른 동작으로 몇 번이나 다급하게 검지를 입에다 가져다 대며 큰방 쪽을 슬쩍 보았다. 엄마가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 한 뒤 등 주먹 바깥치기로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고 나는 무서워하는 척하며 30분만 하라고 허락 하니 큰놈이 태권도 하원 차량에서 내린 뒤 사범님에게 인사하듯 90도 인사를 하며 감사합니다를 조용히 외치고 지 방으로 후다닥 가버렸다.
와이프와 작은 놈은 자고, 큰놈은 말이 30분이지 말리지 않는다면 한두 시간은 핸드폰을 할 것이니 영화 한편은 볼 시간은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티비를 보니 햇살 비친 티비 검은 화면에 작은놈의 손자국이 무수히 찍혀 있었다. 작은놈이 찍었다는 원인을 아니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무수히 찍힌 손자국은 마치 원한에 찬 영혼이 남긴 심령 현상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집 고스트 스팟을 정화하기 위해 유아 장난감용 알코올 소독 티슈로 티비 화면을 닦기 시작했다. 닦다보니 이건 작은놈 키높이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손자국을 찍은거지? 진짜 귀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심령 현상 정화를 마치고 넷플릭스에서 아무 영화나 한 틀고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좀 보다 보니 입이 심심해서 오란다를 하나 먹을까 하다 영화 볼 땐 팝콘이지 하며 주로 와이프가 종종 먹는 대용량 믹스 팝콘을 꺼내 들었다. 기본, 치즈, 카라멜, 딸기 이렇게 들어 있는 팝콘인데 기본, 치즈 팝콘은 맛이 없다. 에이 이건 맛없네 하며 팝콘을 먹다가 카라멜, 딸기 팝콘만 골라 먹기 시작했다. 영화 보며 골라 먹다 보니 분명히 카라멜 팝콘을 잡고 먹었는데 치즈 팝콘을 먹었고, 딸기 팝콘이다 싶었는데 기본 팝콘을 먹었다. 몇번 그러다보니 괜시리 성질이 나서 보던 영화를 멈추고 그릇 두 개를 가져와서 팝콘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카라멜과 딸기 팝콘을 반 정도 채웠을 때인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뒤를 보니 큰놈이 한손에 핸드폰을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엄마 팝콘에서 카라멜만 빼먹냐고 물어보는 큰놈에게 머뭇 머뭇 대답을 하지 못하니 지 엄마에게 일러준다며 큰방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급히 큰놈에게 포켓몬 카드 5장들이 1팩을 사준다 하니 발걸음을 멈추었고 몸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뒤로 돌려 포켓몬 카드는 3팩을 사주며, 자기도 카라멜 팝콘을 같이 먹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둘이 짬짜미를 한 뒤 카라멜 팝콘만 두 그릇을 골라 먹었다.
큰놈과 카라멜 팝콘을 먹은 뒤 안 먹은 팝콘을 다시 믹스 팝콘 봉지에 넣고 지퍼를 잠그니 큰놈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엄마는 맛 없는 팝콘만 먹겠다 그치? 그래서 나는 큰놈에게 엄마 치즈 팝콘 좋아해라며 반대로 말해 주었다. 가까울 시일 내에 오빠 이 팝콘 이상하다 믹스인데 그냥 팝콘 밖에 없네 라는 말을 할 와이프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큰놈도 뭐가 좋은지 같이 웃었고 거실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아래 큰놈과 나는 마주보며 낄낄 거렸다.
꽤 행복한 일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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