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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7/21 13:34:17 |
Name |
박진호 |
Subject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본 글은 현실과는 무관한 픽션입니다.
*본 글은 현실과는 무관한 픽션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씨 유 앳 배틀넷! 오늘은 최고의 프로게이머 정성찬 선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정성찬 선수, 방금 시청자와 게임한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네, 방금은 시청자 분께서 운이 너무 없으셨어요. 로템에서 12시 2시 자리면 테란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거든요. 시청자
분께서도 자리에 압박을 받으셔서 빠른 9드론을 하셨는데, 예상을 할 수 있어서 쉽게 막고 이겼습니다."
"그렇군요. 이거 너무 하는 걸요. 정성찬 선수와 일반인이 시합을 하는데 자리마저 정성찬 선수에게 유리하게 걸리다니요."
"하하하."
"정성찬 선수는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행운의 여신도 정성찬 선수를 사랑하는 가 봅니다."
"네? 아, 예."
"정성찬 선수 솔직히 말해보세요. 메이저 대회 5번째 우승을 휩쓸면서 운도 좀 작용했죠?"
"그.. 그건, 열심히 하다보면 운도 따라주고 그렇지요."
"하하하. 그렇군요. 역시 운도 따라줘야 우승도 하고 그런 거네요. 아마도 정성찬 선수 옆에는 저처럼 예쁜 행운의 여신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아.. 네."
"헤헤. 네, 그럼 다음 시청자와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어디 사는 누구시죠?
"형, 뭐 봐? 어? 추은주네. 잠깐 이거 씨 유엣 배틀넷 아니야? 와 이게 언제 적 거야. 하하 형 이 때 머리스타일 왜 이렇게
웃겨. 지금은 와, 용 됐네, 용 됐어."
동료 프로게이머 상훈이 성찬에게 와서 치근덕거린다. 성찬은 말없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의 볼륨을 키운다.
"야, 추은주가 저런 시절이 있었지, 저 때 싸인이나 받아 놓을 걸. 씨유앳 배틀넷 엠씨하던 여자가 이렇게 뜰지 누가
알았겠어? 지금은 국민 요정이다 뭐다 완전 대스타 됐잖아."
상훈이 목소리를 더 키워 분위기를 띄워 보지만 성찬은 묵묵부답이다.
"참, 저 때 형 진짜 잘 나갔지. 1년 내내 우승했잖아. 하하. 그러고 보면 형도 대단해. 벌써 5년 전이잖아. 저거 찍을 때가.
그런데도 이렇게 계속 잘하는 거 보면. 나도 형처럼 오래오래 잘해야 될 텐데."
"후."
성찬 한 숨을 쉬며 상훈에게 리모콘을 건넨다.
"너 볼 거면 봐라."
성찬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간다. 상훈은 건네진 리모콘을 한 손에 쥐고 어리둥절하며 성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텔레비전은 어두운 거실에서 혼자 빛을 내며 즐겁게 떠들어댄다.
상훈이 비디오를 끈다. 덜커덕, 윙, 비디오 테이프가 멈추는 소리가 난다. 텔레비전은 곧 소녀 아이돌 그룹의 무대로 꾸며진다.
정확히 하루 전, 이 시간, 성찬은 상설 게임 경기장 스튜디오 박스 속에 있었다. 2년 만에 올라 온 4강 무대, 성찬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찾아 온 기회였다. 3년 전 마지막 우승 후,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고, 2년 전 4강에서 3대 0으로 진 뒤에는
양대 메이저대회마저 모두 탈락해 버리고 PC방 예선을 전전 하였다. 그 뒤로 간간히 메이저 대회 16강에 이름을 올렸지만
제대로 경기도 펼치지 못하고 탈락을 거듭하였다. 그러다 어떻게어떻게 해서, 힘들고 힘들게 올라 온 4강 무대였다.
대회 무대는 성찬의 올드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성찬은 자신을 위해 팬들이 준비한 피켓과 현수막을 보며 절대 질 수 없다는
다짐을 했다. 중계진이나 방송국은 왕년의 스타 성찬의 4강 진출을 e-sports의 최대 호재로 보고 각종 광고와 보도를 했다.
모든 것은 성찬이 주인공인 무대로 꾸며졌다.
"정성찬, 과연 3년 만에 결승 진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경기는 명승부였다. 4강전 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은 승리자를 연호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5판, 갈 때까지 가서야 끝이 난 승부. 2대0으로 몰린 상태에서 상대방의 전진 게이트를 막아 낸 후 2대 1, 몰래 팩토리로
벌쳐를 돌려 2대2, 그리고 마지막 경기는 근래 보기 드문 치열한 접전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부르기에 자신도 어느 새 그렇게 인식되어버린 말, 올드게이머. 성찬은 올드게이머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데뷔한 어린 선수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피지컬. 드라군 댄스로 마인을 제거하면서도 미네랄이
200대를 넘지 않게 게이트를 돌리는 상대방 앞에서 정면 대결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5경기 모두 전략을 준비하였다.
그 중 2번은 실패하고 2번은 성공한 상태로 마지막 경기가 찾아왔을 때 성찬은 준비해 온 마지막 전략을 포기하였다.
정찰이 꼼꼼한 상대방에게 들켜 허무하게 승리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하여 상대방과 대등한
경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련한 작전으로 신예들을 상대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물량에서 밀려 패배한 적이
많았던 성찬이었지만, 4강전 마지막 경기에서 만큼은 물량에서 밀리지 않았다. 성찬은 정말 언제 그래 봤을까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10개의 팩토리를 돌렸다. 어깨는 빠져나갈 듯 아팠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성찬은 마지막 경기를 하는 동안
자신이 이제까지 했던 어떤 게임에서보다 빠르고 정확한 화면 전환과 컨트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과는?
...패배였다.
걱정했던 물량에서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상대방에 뒤쳐지지 않았다. 마지막 10분경에는 상대방 앞마당 넥서스에 탱크의
포화가 닿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자신이 기가 막히게 잘 구사했던, 무수히 많은 상대에게 눈물을 뿌리게 했던
'몰래 멀티'에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바로 자신의 본진 옆 섬 멀티에.
성찬은 팩토리를 모두 띄워 섬 멀티 넥서스로 날리면서도 '지지'를 치지 못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계속해서
뺨으로 흘러내렸다. 오랜만에 성찬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에 찾아왔던 팬들은 오랜만에 경기장에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
무대가 정리되고 숙소로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대기실로 성찬과 맞붙었던 상대방 선수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지훈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성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패배한 상대에게 찾아오다니, 그것도 새까맣게 밑에 있는 후배가.
"같이 게임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선배님과 게임하는 게 꿈이었거든요."
"영광은 무슨.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마지막에는 솔직히 제가 진 경기였어요. 마지막까지 몰래 멀티가 들키지 않는 바람에."
"그러냐."
성찬은 씁쓸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참, 너 전에는 테란으로 했잖아. 왜 프로토스로 바꿨냐."
"맵이 그렇잖아요. 테란하기에는 요즘 맵이 안 받쳐 주네요."
"그래? 테란으로도 잘하던데. 테란 유저로서 좀 아쉽다."
"헤헤, 저는 프로토스가 더 잘 맞는 거 같아요. 참 선배님 이로써 저희 3대3 동률입니다."
상대는 뿌듯한 듯 환하게 웃었다.
"응? 그래? 언제 우리가 게임을 했었나?"
"선배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전 기억하거든요. 혹시 5년 전 8월 16일자 씨유앳배틀넷 녹화해 놓으신 거 있으면 보세요."
"씨유앳배틀넷?"
"네, 확인해보세요. 5년 전 8월 16일이요. 그럼 전 이만. 다음에 뵙겠습니다. 영광이었어요."
상대는 그렇게 활짝 웃으며 대기실을 떠났다.
면식도 없는 후배가 선배에게, 그것도 게임을 이겨 놓은 상대에게 불쑥 찾아와 인사를 하는 것은 분명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평소 같으면 뭐라 훈계를 했을 성찬이었지만 조카뻘 되는 상대가 너무나 천진하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싫은
소리 하나 하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어리다는 건 이래저래 유리했다.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성찬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간다. 상훈 때문에 미처 풀지 못한 4강 상대가 언급했던 5년
전의 '씨유앳배틀넷'의 비밀이 궁금하다. 불이 꺼진 거실에서 작은 함성, 음악소리가 미적거린다. 껌뻑거리는 텔레비전
빛이 쇼파에 앉아 있는 상훈의 그림자를 벽에 드리운다. 성찬은 비밀 풀기를 포기하고 잠시 서성이다가 텅 빈 연습실로
들어간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은 성찬은 마우스를 몇 번 흔든다. 절전 모드에 있던 컴퓨터가 돌아가고 '띡' 하는 소리를 내며
CRT 모니터는 파란색 윈도우 바탕화면을 비춘다. 열린 동공으로 쏟아지는 밝은 빛에 눈이 찌푸려진다.
바탕화면 빈 공간에 마우스 오른쪽 키를 누른 채 왔다갔다를 반복하면서 점선으로 변을 이루는 사각형을 몇 번 만들다가
결국에는 '레이스 아이콘'을 더블 클릭한다.
"윙, 삑, 삑, 철컥, 쿵"
성찬은 습관적으로 /stats와 /f l을 쳐 본다. 그리고 /time을 친다. 오전 12시 10분.
비어 있는 사설 채널에서 괜히 타이핑을 해본다. '하이' '반가워요' '우웩'. 성찬이 엔터를 칠 때마다 배틀넷은 연신
'메시지를 볼 수 있는 사용자가 없습니다' 로 답을 한다.
"에휴.."
한 숨이 나온다. 마우스 커서를 불을 쫓는 벌레 마냥 빙빙 돌려보다 Quit로 가져간다. 그 때..
'No3old: 뭐하냐.'
성찬은 마우스에서 손을 놓고 키보드에 양손을 갖다 댄다.
'Crazy"CrasH": 누구?'
처음 보는 아이디다. /f l로 친구 목록을 재차 확인하지만 동일한 아이디는 찾아 볼 수 없다.
'Crazy"CrasH": 누구시죠?'
'No3old: 뭐하냐니까.'
'Crazy"CrasH": 그냥 있습니다만, 누구신가요. 신원을 밝히시죠.'
'No3old: 연습 안하냐. 그러니까 맨 날 지지.'
아이디를 아는 악성 팬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든다.
'Crazy"CrasH": 장난치지 마십시오.'
성찬은 다시 Quit를 향해 마우스 커서를 가져간다.
'No3old: 어라, 아직 내 소식 못 들었냐? 올드 킬러 No3 몰라?'
'올드킬러 No3!'
2주 전이었다. 성찬이 '올드킬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휴식 시간에 부엌으로 가서 마실 거리를 찾고 있는 성찬에게 상훈이 다가 왔다.
"형, 형은 아직 안 당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뭘 당해?"
"소식 못 들었어? 올드킬러가 올드 게이머 박살내고 다닌다는 얘기."
"그게 무슨 소리야."
"벌써 덕진이 형이랑 창익이 형도 당했대."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야. 덕진이랑 창익기가 뭘 당했는데?"
"그러니까 한 달 전인가 부터 배틀넷으로 어떤 놈이 프로게이머한테 귓말을 보내와서 시합을 신청하고는 전부 이기고 있대.
그런데 그 놈이 시합을 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일명 올드 게이머라고 해서 전성기 지나고 요즘은 성적 떨어진
프로게이머들인데다가 아이디도 넘버3올드라서 애들이 올드킬러라고 부르고 있어."
"그런 일이 있었냐?"
"형은 요즘 개인리그에 준비하느라고 바빠서 몰랐나보구나."
"아무리 올드 게이머니 뭐니 해도 프로게이먼데 그렇게 전부 다 질 수 있냐?"
"아직 한 판도 안 졌대. 대단한 건 3판 2선 승제를 제안하는데 아무 누구도 3판까지 간 적이 없다는 거야. 전부 2대0으로 졌어.
웃긴 게 아이디 스펠링이 no3old 인데, 이게 어떻게 해석하면 3번 째 판은 없다 라는 뜻도 될 수 있거든. 이 놈 작정하고
올드게이머 죽이기 하는 거 같아."
"그 정도면 무슨 핵 같은 거 쓰는 걸 텐데."
"방금 창익이 형이랑 한 리플레이 보고 왔는데, 핵으로 의심 되는 것은 없고 실력이 진짜 좋아."
"종족이 뭔데?"
"테란."
"어디 다른 프로게이머가 장난치는 거 아닐까?"
"그래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그 놈이 게임하는 시간에 프로게임단 형들이 자기 팀 프로게이머 체크해보기도 했는데,
현 프로게이머는 아닌 거 같아."
"신기한 일이군."
"형도 조심해. 형한테 올지도 몰라. 형이야 말로 진짜 올드게이머잖아. 매너가 아주 더럽대. 막 욕하고. 나한테도 질 실력인데
무슨 프로게이머를 하냐고 그만두라고 그런대. 혹시 형한테 오면 그냥 게임하지마. 괜히 지면 컨디션만 안 좋아져.
대회 준비도 해야 되는데."
"알았다. 가뜩이나 바쁜데 그런 놈한테 까지 신경 쓸 시간 없다."
성찬의 두 손이 다시 키보드 위에 올라온다.
'Crazy"CrasH": 얘기는 들었다.'
'No3Old: 다행이네. 그 동안 대회 준비한다고 내 소식도 못 들었으면 어떻게 하나 했지.
'Crazy"CrasH": 용건이 뭐냐. 나와 게임을 하고 싶은 거냐?'
'No3Old: 그게 아니면 뭐겠어. 너랑은 붙었어도 진즉에 붙었어야 했는데. 대회 준비에 방해 될까봐 미뤘었지.'
'Crazy"CrasH": 고맙군. 내 생각도 해주고.'
'No3Old: 사실 내가 너한테 애정이 좀 있거든. 그 동안 올드게이머를 좀 까긴 했지만, 그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까는 거 거든.'
'Crazy"CrasH": 애정이 있다고? 도대체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뭐냐.'
'No3Old: 뭐긴 애정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Crazy"CrasH":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보아하니 실력은 프로게이머 급인거 같던데. 혹시 어디 연습생이냐.'
'No3Old: 너도 똑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걸 궁금해 하더군. 난 항상 이렇게 대답하지. 시합에서
이기면 가르쳐 주마.'
눈썹으로 땀이 흐른다. 여기저기를 오가는 상대방의 드랍쉽에 정신이 없다. 게임 시작부터 계속되는 공세에 힘이 빠진다.
성찬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든다. 드랍쉽 하나를 빼서 SCV 두 기를 빼내어 상대방 쪽 섬 멀티로 보낸다. 몰래 멀티.
스캔을 동원하여 드랍쉽의 경로를 살핀다. 결국 또 이렇게 해야 하는가. 자존심이 상하지만 지고 싶지는 않다.
몰래 멀티가 돌아가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진다. 하지만 호락하지는 않다. 멀티 하나를 더 먹고 있는데도 병력의 양은
호각지세다. 앞으로 5분, 5분만 더 버티면 승기는 기운다.
'No3Old: 섬멀티?'
아직. 아직은 아닌데. 지금 몰래 멀티가 들킨다면 패배다. 성찬은 상대방의 도발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다.
'No3Old: 후후. GG'
이겼다. 하지만 이 건 이긴 게 아니다. 성찬은 굴욕감에 휩싸인다.
'No3Old: 졌네. 역시 정성찬은 다르군. 좋아. 다음 게임 가지.
'Crazy"CrasH": 왜 나갔지?'
'No3Old: 졌으니까.'
'Crazy"CrasH": 알고 있었잖아. 몰래 멀티.'
'No3Old: 그렇게 이기고 싶어 하는데 져 드려야지. 몰래 멀티 하나 내주고는 어렵군.'
'Crazy"CrasH": 지금 장난하는 거냐.'
'No3Old: 당연히 장난하는 거지. 후후. 다음 게임 가자고. 3판 2승제니까.'
'Crazy"CrasH": 그만 둬. 니가 누구든 간에 이런 엉터리 게임 하고 싶지 않아.'
'No3Old: 뭐야. 그 정도 밖에 안 되나? 왜 그렇게 승부욕이 없어? 어쨌든 이겼잖아.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도 않아? 이제
한판만 이기면 되는데. 몰래 멀티를 해서 이긴 게 그렇게 자존심 상해?'
'No3Old: 뭐야. 설마, 질까봐 두려운 거냐. 그런 거냐.'
두렵다. 패배가 두렵다. 상대는 이미 정상급 프로게이머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멀티 하나 차이를 내고도 몇 분을 계속
끌려 다녔다.
이길 수 없다.
'Crazy"CrasH": 내가 졌다. 난 널 이길 수 없다.'
'No3Old: 뭐야. 너. 그럴 거야? 왜 해보지도 않고 그만 둬? BBS든 몰래 팩토리든 해보고 그만 둬야 할 거 아니야.'
'Crazy"CrasH": 그렇게 널 이기는 건 의미가 없다.'
'No3Old: 제길. 멀티 하나 더 먹고도 물량에서 딸리니 할 마음이 없어졌구나. 정성찬. 넌 다를 줄 알았는데. 너도 정신상태가
썩어 빠졌구나. 연봉이나 잔뜩 받고 게임은 안하고 텔레비전에 얼굴이나 내비치는 그런 올드게이머와 다를 게 없어.
다들 그 따위야. 게임 시작하기도 전에 어차피 지겠지 하는 표정으로 앉아서 져 놓고도 이 정도면 됐지. 최선을 다해도 안 돼.
나는 올드게이머니까.
너네들이 왜 올드야. 너네들이 사오십대 아저씨야? 손이 안 따라가? 그럼 연습을 해야지. 죽어라 연습을 해야 될 거 아니야.
나이도 몇 살 차이 안 나는 애들인데 왜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해?
화가 난다. 연습? 왜 안 했겠는가. 치고 올라오는 어린 애들을 이기기 위해 그들의 배가 되는 노력을 했다. apm, 화면 전환
속도를 늘리기 위해 컴퓨터로 프로그램까지 만들어가며 연습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시작이 다르다.
'Crazy"CrasH": 시작부터 다르다. 그들과 우리, 그래 우리 올드게이머와는 시작부터 달라. 너도 마찬가지야. 니가 스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무엇을 보고 있었지? 마린 한 기로 럴커를 잡는 거? 뮤탈을 뭉쳐서 마린을 끊는 거? 하이브 체제?
드라군 댄스로 마인을 제거하는 거? 아비터 체제? 동시에 두 군데를 컨트롤 하는 모습?
우린 아무 것도 없었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황량한 벌판에서 전략을 세우고 컨트롤을 개발했어.
우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고. 우리가 처음 스타를 시작했을 때는 몇 년 후 이렇게 많은 화면 전환과 멀티 테스킹,
물량을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어. 그렇게 우린 프로게이머의 자질을 결정한다는 게임시작 3년을 보냈어.
하지만 너희는 어때. 너희는 우리를 보며 시작했어. 전성기의 우리가 너희들에겐 게임의 기본이었겠지. 테란을 시작하면서부터
마린을 펼치고, 저그를 시작하면서부터 뮤탈을 뭉치고, 프로토스를 시작하면서부터 드라군 드라이브를 하고.
우리에게 스타가 낯선 이방인의 언어라면, 너희에게는 친숙한 모국어라고.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연습만 한다고 해서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너희는 자신 있어? 몇 년이 지나고 너희들의 플레이를 보며 자란 아이들이 프로게이머가 되었을 때 지금 우리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성찬은 어렴풋이 자신, 그리고 동료 게이머들의 부진의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란 생각은 해봤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 적은 없었다.
대답이 없다. 상대방이 수긍하는 걸까. 하지만 부끄럽다. 치졸한 변명이다. 시작한 과거가 어쨌든 현실은 실력만이 모든 걸
말 해준다. 패배가 두려워 게임을 거부한 자신은 아무 말도 해서는 말아야 했다.
몇 분째 반응이 없다. 채팅창에 커서만 계속 해서 깜빡일 뿐이다.채널에 No3Old의 아이디는 여전히 남아 있다.
도대체 누굴까. 누구길래 이토록 올드게이머에 대한 애증이 이토록 강한 것일까.
2주 전 상훈과의 대화가 다시 떠오른다.
"형. 참, 그런데 누가 프로그램으로 그 놈 단축키 쓰는 거랑, 클릭 하는 습관 같은 걸 확인해 봤는데, 그게 어떤 프로게이머랑
비슷하긴 했대."
"그게 누군데?"
"이지훈."
"이지훈? 걔 플토잖아."
"왜, 저번 시즌에는 테란이었잖아. 지훈이 그 때 하던 거랑 비슷했대."
"그래서?"
"근데 지훈이는 아닌 거 같대. 그 놈이 게임하던 시간에 지훈이는 다른 게임 하고 있었대."
"그래?"
성찬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또렷하게 연결음이 들린다.
"여보세요?"
"어, 뭐하냐. 잤냐?"
"어. 이제 자려고."
"야 뭐 물어 볼 게 있어서."
"뭔데."
"너네 팀에 이지훈이라고 있지?"
"어."
"지금 뭐하냐?"
"지훈이? 왜?"
왜? 성찬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어. 그냥. 아, 어제 걔가 시합 끝나고 날 찾아 왔더라고."
"그랬냐? 이 녀석. 버릇없는 짓을 했군. 왜 뭐라고 한 마디 하게?"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잠깐만."
송화기로 멀리 대화 소리가 들린다. 지훈이 뭐하냐. 지훈이 자는데요. 언제부터 자는데? 아까요. 저녁 먹고 바로 잠들었어요.
성찬은 전화를 그냥 꺼버린다.
어느 새 모니터에 글이 잔뜩 올라와 있다.
'No3Old: 이봐, 미안하다. 아니 정성찬 선수 미안해요. 그냥. 너무 답답하고, 아쉬워요. 당신들이 사라져 가는 게. 이렇게라도
하면 당신들이 오기가 생겨서 살아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랬어요. 단순히 응원하고, 지켜보는 것 만으로는 안 되니까.
사실 정성찬 선수는 그런 게이머가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제가 보는 몇몇은 정말 너무 싫었어요. 패배에 익숙해져서 모든 걸
포기한 듯, 연습은 아예 뒷전이고. 그냥 예전 계약으로 주는 연봉이나 받아 챙기는, 내가 좋아했던, 나의 우상이었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어요.
정성찬 선수, 당신만큼은 오래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진짜 못해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어줘요. 승리를 위한
집념만큼은 꼭 잃지 말고 끝까지 남아 있어주세요.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어줘요
성찬은 아무 대응도 할 수 없다. 채널에서 그의 아이디는 사라져 버렸다.
'못해도 좋으니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어줘요,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어줘요 라......'
성찬은 그의 문장 하나를 따라 읊조려 본다.
연습실을 나간다. 거실은 적막과 어둠에 쌓여 있다. 쇼파에 몸을 기대어 앉아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의
말을 다시 읊조려보고 몸을 뒤척인다.
"덜컹, 위잉."
갑자기 비디오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엉덩이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성찬은 앉은 자리에서 리모콘을 꺼낸다. 텔레비전이
켜지고 5년 전 자신의 어색한 모습과 애 띤 추은주의 모습이 동시에 화면에 잡힌다.
"헤헤. 네, 그럼 다음 시청자와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네. 어디 사는 누구시죠?"
"저.. 저는 강원도 춘천에 사는 이.. 이지훈 입니다."
"이지훈.. 학생?"
"네."
"지훈 학생, 목소리가 무척 애 띤데, 우리 지훈이 몇 살?"
"네? 열한 살이요."
"열한 살? 아유 귀여워라. 지훈 학생. 여기 정성찬 선수 나와 계셔요. 인사하세요."
"네..네. 안.. 안녕하세요?"
"여기 정성찬 선수도 나와 계세요. 인사하세요."
"아, 네. 정성찬 선수 안녕하세요."
"지훈 학생, 오늘 정성찬 선수와의 시합 신청하셨죠? 어떻게 이길 자신 있어요?"
"네... 네. 꼭 이기겠습니다."
"아, 지훈 학생 자신감이 넘치는데요. 어때요? 정성찬 선수, 만만치 않겠는데요?"
"네.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 그럼 지훈 학생.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정성찬 선수, 자리로 가주세요. 자 다들 준비 되셨죠? 시작해도 될까요?"
"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화면은 넘어가 프로토스와 테란과의 전투를 보여준다. 게임화면은 하나로 이어지지 않고 부분 부분 편집된 흔적이 보인다.
성찬은 5년 전 한 꼬마와 펼쳤던 30분이 넘는 게임을 회상한다.
"지훈 학생, 그럼 안녕히 계세요."
게임이 끝나고 이음새가 어색한 장면이 이어진다. 분명히 시청자와의 짧은 인터뷰가 있어야 할 텐데, 갑자기 인사로 끝이 난다.
성찬의 머릿속에서 게임과 추은주의 마지막 인사 사이에 있었던 꼬마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5년 전 그 때, 꼬마가 성찬에게 했던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전, 올드킬러가 했던 말을 생각한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거실은 새벽녘이 스며들어와 조금씩 환해지고 있다. 텔레비전은 칙 소리를 내며 울부 짖는다.
성찬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가 사라진다.
성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감독의 방으로 간다. 감독의 방 맞은편에 진열대가 보인다. 지난 5년간의 영광이 모여 있는 자리.
성찬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트로피들을 훑어본다. 마지막 트로피 옆은 비어 있다. 그 빈 공간에 어느새 2년 치 먼지가 쌓여 있다.
성찬은 정렬 된 트로피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벌려 마지막 트로피 옆 빈 공간을 채운다.
"똑똑."
"감독님, 일어나셨나요?"
"어, 웬일이냐, 이 이른 시간에. 무서운 꿈이라도 꿨냐."
"감독님, 농담은."
성찬이 방문을 열자 방에서 형광등 불빛이 뻗어 나와 진열 된 성찬의 트로피들을 환하게 비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트로피들을
뒤로하고 성찬은 감독의 방으로 들어간다.
"감독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감독님.. 저."
성찬은 문을 닫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닫히는 문이 형광등 불빛을 깎아 사그라뜨리자 트로피들도 다시 어둠에 묻힌다.
5년 전. 씨유앳배틀넷 촬영장.
"쥐쥐. 쥐쥐 나왔습니다. 아유 정성찬 선수 고생하셨어요. 겨우 이기셨네요."
"예. 지훈 학생 실력이 생각보다 많이 뛰어나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성찬은 땀을 닦으며 은주의 옆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지훈 학생. 수고하셨어요."
"......."
"지훈 학생? 지훈 학생?"
"네."
"지훈 학생, 정말 잘하시네요."
"네."
지훈의 전화 목소리가 어둡게 들렸다.
"정성찬 선수, 어떠세요. 지훈 학생과 게임한 소감이"
"네, 제가 케리어 타이밍에 치지 않았으면 힘든 경기가 될 뻔했어요. 케리어를 갈 때 지상군 확보를 많이 못해서 그 틈을 찌를
수가 있었네요. 지훈 학생 기본기가 무척 좋구요. 게임에 소질이 있어 보입니다."
"지훈 학생, 들으셨죠? 게임에 소질이 있으시다네요."
"네."
"지훈 학생. 마지막으로 정성찬 선수에게 하실 말 없나요?"
"......."
"지훈 학생?"
"네."
"정성찬 선수에게 한마디."
"저. 아무 말이나 해도 되나요?"
"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저.. 정성찬. 야! 도대체 언제까지 우승할거냐. 너 때문에 우리 태영이 형이 우승을 못하잖아. 진짜. 오늘 태영이 형 복수를
했어야 했는데. 너, 내가 다음에 프로게이머 돼서 꼭 복수 할 거야. 야. 제발 그만 좀 우승해. 좀 지라고 지란 말이야.
뭐야. 안 돼. 아직 나 할 말 남았어. 저리가."
지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멀어진다.
"야, 정성찬. 지라고 제발 좀 지란 말이야. 철컥. 뚜..뚜..뚜.."
-전에 썼던 어느프로게임단 숙소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나오는 정감독의 선수시절이야기 입니다.
글을 한창 통칭 올드게이머 분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군입대 얘기가 나온 시기에 썼었는데,
요즘 박성준 선수가 우승을 하고, 임요환 선수도 멋진 모습을 계속 보여줘서 올려 놓고 보니 조금 뻘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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