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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0/10 02:10:28 |
Name |
하이팀플러 |
Subject |
지하철 기행 |
약수역은 뭐랄까, 강북에서 강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따고나 할까. 아무튼 그래서 그런지 항상 붐비는 역이다. 나는 귀가하기 위한 지하철 여행을 할 때마다 무관심한 척 하면서 사람들 관찰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 약수역으로부터 집까지의 20여분이 그 관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쩌다 보니 그곳에 살긴 하지만 그곳에 속하진 않은 타자로서 가끔 가다 '뼛속까지 강남삘'인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네들의 상태를 나름대로 진단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엊그제도 그랬다. 여느때처럼 피곤한 척을 하며 여유 넘치는 3년차 대딩 흉내를 내기 위해 귓구멍엔 이어폰을 꽂고 수서행 지하철에 막 올라타는 순간,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말았다.
얼마전에 유행했던 된장녀 텍스트에 나열되어 있는 모든 사항들을 온몸으로 발현해주고 있는 듯한 그녀. 매일같이 트리트먼트를 하는건지 비단기 흐르는 전지현같은 생머리. 남들보다 두세 톤은 낮은,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화사한 피부에, 빈폴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쉬크해 보이는 스타일의 옷차림. 게다가 나조차도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명품 브랜드의 앙증맞은 핸드백까지. 만약에 양장본 전공서적 한권만 무릎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있었다면 영락없이 된장녀 텍스트의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그녀. 역시나 새침한, 사람을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선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흘깃 눈이 마주치자 코웃음을 치며 얼른 시선을 피해버린다. 아, 그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법한 도도함이라니!
나는 사회학도이기 때문에 '된장녀따위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버린 집단이 그들의 분노를 풀어버릴 대상을 상정하기 위해 만들어버린 이념형에 불과하다'고 애써 생각하려 했으나..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오르는 까닭모를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에 결국은 '계속 그녀가 하는 꼬라지를 훔쳐보고 씹어야겠따'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마침 그녀는 앉아있는게 지루했는지 핸드폰을 꺼내들고 문자질을 시작했다. 보나마나 그녀는 '뭐하남?(키읔키읔)' 이따위 문자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제기랄, 30원은 돈이 아니란 말인가! 라고 분노하는 순간 ..교대역이다. 쑤욱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왠만큼 정정해 보이시긴 하지만 머리는 하얗게 새신, 한 허름한 할머니가 우리칸에 올라타셨다. 어라..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녀가 주저없이 벌떡 일어나서 그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한다. 어이없는 문자질에 대한 실없는 답변을 기다리며 목적지까지 삐대고 있었어야 할 그녀가 말이다. 더구나 체면사양을 하시는 그 할머니께 나이팅게일같은 눈부신 천사의 미소를 샤방샤방 날리면서 말이닷.
그제야 그녀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내 옆에 같이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한듯 안한듯한 내츄럴한 여대생 화장을 해서 그런지 더없이 맑고 선량해 보인다. 자신이 열심히 알바해서 번 돈으로 지른게 분명한 핸드백과 옷은 고급스럽되 천박해 보이지 않는 교양인의 풍모를 완성시켜 주고, 아까 문자를 보내던 핸드폰은 여전히 손에 들고 있는데, 이제보니 꽤 오래된 모델같이 보인다.
그렇다.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진 사건 하나가 한 사람에 대한 관점을 바꿔 놓았고, 관점이 바뀌는 것 만으로도, 똑같은 대상에 대한 평가가 이다지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에서 난 내렸기 때문에, 그녀를 더 오래 관찰 할 순 없었지만, 2분 동안 그녀와 나란히 서서 가는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그녀를 '완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에 코웃음을 친 것도 눈이 마주쳐서가 아니라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났기 때문이리라. 아울러 난 집으로 걸어가면서 만약 나였다면, 과연 똑같은 상황에서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할 수 있었을까..라는 반성도 해보았다. 아마도 나라면, 된장녀같이 화사한 그녀가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한 창피한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으리라. 아....못난놈. 결국은 이날도 자조와 한숨섞인 하교길이 되버렸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녀는 강남삘 나는 근사한 오빠가 아니라 촌스런 꼬마가 앞에 서 있어서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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