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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0/06 14:54:01 |
Name |
The xian |
Subject |
[만화 '식객' 이야기] '부대찌개' |
'만화 '식객' 이야기'는 기본적인 존칭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어체로 쓰여지며, 비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이야기입니다.
사회인이라는 이유로 지갑 여는 데에 깐깐해진 나이건만,
'식객'과 눈이 맞아 지갑을 연 지 벌써 열네 번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부대찌개"
"●●씨는 왜 여기 오면 부대찌개만 먹어요? 질리지도 않아요?"
"맞아요, 여기 음식 맛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조미료 투성인데."
"콘텐츠가 가장 많잖아요. 부대찌개가. 집어먹을 게 라면에, 햄에, 소시지에..."
"으이그. 누가 업계인 아니랄까봐 콘텐츠 타령은."
"자, 드십시다!!"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어떤 식당을 가면 나와 동료들 사이에 실제로 오가는 말이다.
(당연히 부대찌개만 먹는 사람은 바로 나다.)
부대찌개를 즐겨 먹는 나이지만 부대찌개 이야기만 나오면, 난 내 살기에 바쁜 줄만 아는 개인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귀차니스트나, 헛똑똑이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부대찌개(의정부찌개)의 원조는 굳이 식객에 나오는 '오뎅식당'이 아니더라도 거의 다 의정부인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그 의정부에서 파는 부대찌개를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정부가 멀면 내가 자아비판을 할 것도 없다.
두세 시간도 아니고 전철로 기껏해야 한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가 뭐가 멀다고...... 그렇게 밥 때마다 부대찌개 노래를 부르던
내가 왜, 대체 왜 그 곳을 찾지도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일까, 지난번 밥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내가 집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니까 직접적인 공감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조 부대찌개를 맛보지 않은 상태의, 간접적 공감만으로 이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원조 부대찌개를 먹어보지 않은 나이지만 나는 부대찌개를 먹으면서 부대찌개와, 내가 일하고 있는 게임과의 공통점을
여러 모로 느끼는 일이 많다.
첫째는 위의 대화에서 나왔던 것처럼 '콘텐츠'이다.
아무리 컨셉이 좋고 첫인상이 좋으며 익숙하고 친근한 게임이 있다고 해도 소비자들이 즐길 거리를
충분히 마련해 놓지 않은 게임은 결국 망한다. 그것이 요즘의 게임 세상이다.
왜 블록버스터급이라 이름붙여졌던, 안정성도 좋고 규모도 제법 있는 게임들이 시장에서 잊혀져 버리는지 따져 보면,
대부분 콘텐츠 문제이다. 부대찌개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게에 따라 스타일이 있는 거야 이해하지만,
내가 주로 보는 건 햄, 김치, 소시지 등의 각종 재료가 '얼마나 푸짐한가'이다.(으이그, 그러니 내가 살이 찌지)
어느 정도면 이해하지만, 밥 한 그릇조차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빈곤한 양에 김치와 두부만이 많이 담겨져 있고
햄과 소시지는 몇 조각 보이지 않은 것이 부대찌개라고 올라오면 난 정말 밥상을 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 날의 점심 식사는 단지 내가 낸 5,000원이라는 돈이 아까워 먹는 것이다.
둘째는 '빌드 오더'이다.
부대찌개를 먹는 데에는 스타크래프트의 '빌드 오더'에 해당하는 초반 순서가 중요하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 있으니 다른 순서는 무시하고 제 멋대로 해도 되지만,
내 개인적 경험으로 무시할 수 없는 초반의 '빌드 오더'가 두 가지 있다.
하나. 부대찌개 위에 얹혀져 있는 '라면'의 면발은 불기 전에 모두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고 본다.
국물 안에 불어 터진 면발이 남아 있으면 마치 스타크래프트를 하다가 매너파일런이나 개스 러쉬를 당한 것처럼
초반 빌드가 꼬여 버린다. 심지어는 그 날 식사를 완전히 망치기도 한다.
'그깟 라면 면발 하나가 뭐 어떻겠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남은 면발이 라면 이외의 재료들이 끓으면서
맛을 내야 할 찌개 국물을 흡수해서 놓지 않는다. 화합을 해야 하는 부대찌개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다.
또 하나, 찌개는 뜨겁고 맵게 끓여야 제맛이라지만 나는 부대찌개 국물은 (특히)너무 졸이면 곤란하다고 본다.
부대찌개 국물은 햄이나 소시지에서 나오는 설탕이나 첨가물 등이 녹아나기 때문에 너무 졸이면 정말 걸쭉해지고
맛 없는 국물이 생긴다. 본진 자원만 짜내다 보면 결국 먹을 수 있는 자원이 하나도 남지 않는 이치와 똑같다.
끓는 중이면 그나마 참고 먹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찐득한 국물이 식었다고 생각하면......
내가 밥숟갈을 다시 드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마지막 세째는 '조화'이다.
달리 말할 것 없이 이 에피소드 중에 테드 오 박사가 부대찌개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말하는 대사를 보자.
"햄의 강한 맛이 양념이랑 김치랑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제 3의 맛이야!"
바로 그것이다. 부대찌개에는 햄과 김치라는 이국적인 재료들의 조화 뿐만 아니라, 가슴아픈 우리의 역사도
녹아 있다. 그것뿐이랴.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노력도 녹아 있다. 어떤 이들은 찌개에 햄이나 소시지를 넣는 것을
찌개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하며 부대찌개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지만, 부대찌개는 그런 이들의 마음까지도
포용하여 한 끼 식사로 삼기에 충분한 음식이다.(거기에, 만화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구찜보다도 역사가 오래 된 우리 음식이다.)
스타크래프트만 예를 들어도 종족 밸런스와 상성 문제는 엄청난 논란거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흥미거리이자
스타크래프트의 재미에 시너지 효과를 더하는 것이기도 하다. 테란, 프로토스, 저그... 이 세 종족이 따로 놀아서
상성도 없고 강약도 없이 자기의 색깔을 내는 데에만 치중했다면, 그리고 같은 종족을 플레이한다 해도
모두 천편일률적인 빌드를 쓰고 예측 가능한 경기 결과를 낸 경우들만 있었다면
과연 오늘날 내가 지금처럼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을까...?
회사에서 일하며 점심으로 조미료 범벅이 된 부대찌개를 먹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었는지,
오늘 잘 차려진 추석 음식상을 보고도 부대찌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대찌개에 중독된 것일까. 아니면 조미료에 중독된 것일까??
......아. 부대찌개 잘 끓여주는 여자 어디 없나.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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