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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0/05 22:13:43 |
Name |
The Siria |
Subject |
함께 쓰는 E-Sports사(4) - 이지훈 열전 |
충무공의 위대한 승리도 그 기록이 없다면, 한낱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노니는 그런 것이 되었으리라. 조선왕조실록과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 전하듯, 열 두척의 배로 백척이 넘는 적선을 격파하고, 스물 세번의 해전에서 단 한 번의 패배도 허락하지 않은 이 불멸의 영웅의 위업은 그 기록이 전했기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역사를 볼 것도 없다. 짧게는 우리 야구를 보자. 송진우의 대단함, 선동렬의 그 위업., 모두 기록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던가. 200승을 이루기까지의 그 꾸준함은 어떤 것이며, 통산 1점대 방어율이라는 그 엄청난 업적은 또 무엇이던가. 상대적으로 우리는 실업야구의 그 기록이 적기에, 그 시절 활약했다는 영웅들, 박현식, 장태영, 김응룡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감이 오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겨진 그 위업은 사람들의 찬탄을 낳고, 특히 한 시대를 풍미하며 기록을 쌓은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짧은 역사라고 하지만, E-Sports라는 것이 문을 연지 7년이라는 시간이 니난 지금, 우리는 어떤 기록을 했던가.
1999년 12월, 최초의 프로팀이라고 해도 좋은 KTF MAgicNs의 창단부터 이지훈은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은퇴할때까지 이 팀의 주전이었고, 상징이었고, 주축이었다. 사실, KTF의 로고의 별 두 개는 KTF가 우승한 20차례의 우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윤열이 KTF 시절에 기록한 세 번의 우승을 제외한다면, 이 별을 달 때까지 우승 기록의 상당수는 바로 이 이지훈이라는 프로게이머가 만들어낸 전설이었다. 10차례가 넘는 우승으로 피파라는 게임의 아이콘이 된 그는 왜 이렇게 잊혀졌을까.
사실, 피파라는 게임이 아케이드적인 요소가 강해, 골이나 실제 경기의 모습이 축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이 항상 피파리그의 고질적인 약점이었고, 실제 축구에서는 거의 보기 드문 다득점 경기들의 양상과 단순한 경기 진행 패턴은 리그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였다. 어떤 전술적인 움직임이나, 파격적인 전략의 구사보다는 누가 기본적인 패턴을 더욱 완벽하게 구사하는가의 싸움이었던 것이 그간의 피파리그의 특징이었고, 그 점이 피파리그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이 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딜레마였다. 우승을 위해서는 그런 플레이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기본 패턴 외에도 전략적인 운용에 비교적 강했던 선수였다. 2003년 MBC게임 싱크마스터 피파 최강전을 보자.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을 고른 그는 수비력과 중거리 슛이라는 전략적인 요소를 선택했고, 결국 4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득점 자체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실점 또한 많이 기록하지 않으며 성적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그의 성과를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또한, 우선권을 가졌음에도 한국을 선택하는 쇼맨십 같은 것은 그를 피파를 대표하는 게이머로 만드는 한 요인이었다.
그는 단순한 패턴에 의존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다양한 전략적인 선택으로 게임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선수였고, 이를 통해 게임을 지배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리그의 운용에서 그는 패턴에 결코 약한 선수는 아니었다. 그도 패턴을 통한 움직임에 능했던 선수이고, 그런 모습이 약한, 즉 기본기가 부족한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기에, 그의 전략적인 구사는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는 그의 무수한 우승 횟수로 증명한다. 십여 차례의 우승은 모두 당대의 게이머들을 제압하고 얻은 것이며, 그 우승은 또한 이윤열과 조용호를 제외하고는 KTF소속의 그 누구도 바치지 못한 정규 시즌의 우승이었기 때문에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불행한 것은 그가 우승한 대회의 기록들이 지금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피파리그의 지속성의 부족과 기록에 대한 관심 부족은 이를 더욱 증가시키고 말았다. 필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의 통산 성적은 오직 MFL의 성적 뿐이며, 그 성적 또한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보면, 초라하다고 느낄 정도이다. 그는 MFL에서는 미미한 활약을 남겼을 뿐이었다.
[2000년 0월] -경인방송 열전게임챔프 5주우승왕중왕
[2000년 0월] SBS하나로배 멀티게임챔피언쉽 우승
[2000년 0월] KIGL 하계,추계,동계 리그 우승
[2000년 0월] WCGC 월드사이버게임챌린지 금메달
[2001년 0월] KIGL 2001 상반기 우승
[2001년 0월] 제 1회 WCG 개인 4위 단체전 3위
[2002년 0월] WCC 월드사이버컵 국가대표선발전 준우승
[2003년 0월] 사이버 피스컵 코리아 준우승
[2003년 0월] 제3회 전국 사이버체전 금메달
[2003년 0월] 제3회 월드사이버게임즈 국가대표
[2003년 0월] 제3회 월드사이버게임즈 국가대항전4위
[2004년 0월] 싱크마스터배 피파2004 4강
[2004년 0월] 온게임넷 PS2아레나 피파2004 3위
[2004년 0월] 싱크마스터배 피파2004 클럽챔피언쉽 준우승
그가 남긴 무수한 기록들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더욱 많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의 기록이 이렇게도 적을 수가...
그리고 그 구체적인 승과 패를 알 수가 없다는 것에 필자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2000년 온게임넷의 피파리그 4강에 그가 이름을 올렸다는 기록도 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 유명한 기욤과 국기봉의 결승 전에 피파리그의 결승도 열린 것으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2003년 WCG 한국 예선전.
그는 16강에서 안대현을 최종 스코어 6:2로 제압을 했다.
8강에서는 김성재를 9:5로 눌렀다.
그리고 4강에서는 황상우를 13:4라는 압도적인 스코어로 제압했다.
피파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안대현과 황상우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도 기억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이 정도의스코어로 격파했다는 사실에서 어떤 것이 느껴지지 않은가? 비록 최대한에게 결승에서 11:3이라는 스코어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간의 경력에 비추어 볼 때, WCG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그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열린 그 해 WCG는 그에게 우승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예선전에서 접전끝에 3승 2패로 탈락의 고배를 들어야만 했다. 최대한과 짝을 이룬 국가 대항전에서도 4위. 네덜란드에게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이탈리아에게 지며 또 다시 고배를 들었다.
그의 기록 중에 남아있는 것은 2004년의 기록 뿐이다.
SKY클랜을 맡아 피파 클럽 챔피언십에서 활약할 때의 그 모습.
그는 팀을 결승으로 올리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워낙 SKY의 전력이 강했던 요인도 있었지만, 고비마다 승리를 거둔 그의 활약도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문제는 결승이었다. 아니, 그 전의 준결승에서부터 그는 흔들리고 있었다. 김두형과의 4강전에서 그는 1:2로 패했다. 다른 팀원들의 성과로 결승에 올랐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결승에서, 그는 비겨도 우승을 할 수 있던 경기에서 ASD의 에이스 백성욱에게 3:0으로 무너진다. 그것은 결코,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모습이었다. 사실, 조금씩 그는 지치고 사라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에 열린 MFL. 그는 8강에는 오르지만, 그것까지였다.
너무도 짧은 그의 무대는 여기까지였고, 그는 군에 입대를 한다.
그가 남긴 MFL의 성적은 필자가 수집하기로는 클럽 챔피언십까지 포함해서 15전 4승 5무 6패. 무수히 우승을 거두었다는 영웅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전적이다. 왜 그는 이런 전적만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정말 엄청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겨우 4승만을 기록에 남겼다. 4승만을.
이 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잊혀지기에는 너무도 뛰어난 영웅이기에.
참고로 그는 이제 병장이라고 한다. 제대가 200일도 남지 않은 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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