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이 다른 장르의 만화들보다는 떨어지더라도 히로인의 존재는 스포츠 만화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승부의 세계다보니 계속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하는 스토리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런 반복적인 상승으로 단조롭고 건조해지는 내용을 순박한 연애스토리로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에서도 그런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런 여주인공에 의해 주인공이 그 거친 세계에서 버텨가는 힘을 얻게 되는 설정도 그럴싸하다. 어쨌든 사람들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믿는 법이니까.
그런 사랑의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한 법.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은 주로 자신이 하는 운동에만 엄청난 집중력과 천재성을 가지고 있을 뿐 순박하다던가, 성격만 좋은 호인이라던가 하는 경우가 많고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성격은 연애에 서투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연애세포가 말라버린 듯한 ‘열혈바보운동소년’ 급의 주인공에게 여주인공이 친근감을 넘어선 연애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작가의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각양각색이지만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의 운동에 전신전령을 다해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중 하나. 평소에는 개성 없고 멍한 인물이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에 열중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그런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만화의 경우 여주인공도 연애에는 쑥맥인 경우가 많아 그 후로도 무수한 밀고 당기기의 보는 이 속 태우는 상황은 꾸준하게 이어나가지만 말이다.
민혜는 그러한 만화 속의 구태의연한 설정이 현실성 없는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지금까지 진희를 그런 ‘열혈바보’ 정도로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3학년 선배 중에 워3로 TV에도 나왔던 게이머가 있다는 것을 알고선 이것저것 조사를 했다. 조사라고 해봤자 전적 정도 찾아본 것과 나왔던 VOD를 찾아서 봤던 것 정도였지만. 결국 겉모습을 보기에 성격이 모질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부탁하러 찾아갔을 때도 마음속으로는 반신반의, 이상한 여자라는 소리라도 듣지 않는다면 다행일거라는 각오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만났던 그는 생각보다도 더 좋은 성격을 지닌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민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런 그와의 만남은 그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예상했고, 그 예상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 좋은 추억이란 단어의 뜻이 살짝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기대와 걱정이 섞인 전망을 하게 되었다.
‘봄도 아닌데 말이지.’
민혜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살짝 설레설레 흔들었다. 익숙하지 못한 기분일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젖살이 빠지기 시작한 고1의 소녀에게는 주제 넘는 생각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의 게임이 자신의 부탁으로 하게 된 것임을 떠올리며 화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을 했던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화면상의 상태는 달라진 점이 크지 않았다. 끊임없는 밀고 당기기 싸움. 둘 모두 영웅과 최소한의 기본 유닛만을 생산한 상황에서 맵을 왔다 갔다 하며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 틈을 봐서 끝을 보겠다는 그런 치열한 공방전은 아니듯 보였다. 하지만 권투에서 잽은 견제에 쓰인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합이 끝날 수 있다. 상대가 맘 놓고 사냥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목적이 우선인 가벼운 술래잡기일 지라도 영웅이라도 사망하게 되면 중심축은 급격히 기울게 된다. 아니, 워3란 게임의 특성상 풋맨 하나 잃게 된다 해도 그것은 치명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꾸준하게 진지한 진희의 얼굴과 머리가 고정된 상태로 빠르게 화면을 움직이는 손동작은 그런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민혜는 손을 턱에 괸 자세로 게임 화면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게임에는 흐름이라는 존재가 작용한다. 이 흐름은 흔히 말하는 빌드 선택과 운영이라는 측면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세세한 부분으로 파고 들어가 견제 타이밍이나 멀티 타이밍, 가장 적합한 사냥코스의 선택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어느 정도 고수 반열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흐름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갈 능력은 갖추게 된다. 하지만 그 수준을 다시 넘어서게 되면 각각의 흐름들을 자신의 것으로 하려는 양쪽의 의도가 충돌을 일으키고 그 주도권을 뺏기 위한 싸움도 치열해져서 이전처럼 어떤 법칙이라던가, 최적화라던가 하는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 처음 영웅이 나왔을 때부터 누군가가 gg를 선언하고 나갈 때까지 너무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것이다. 정석과 변칙의 혼용, 허를 찌르는 비틀기와 그것을 다시 비트는 돌려놓기. 거기에 위치에 따른 거리나 아이템의 종류와 같이 게임 자체가 가지는 태생적 변수들이 결합하게 되면 연습대로, 혹은 하던 대로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의미인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실제 게임에서 선수들은 오직 수많은 연습과 시합들로 다져진 경험과 무수히 보고 분석했던 연구의 결과와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주 나와 주는-혹은 나와 준다고 믿고 싶은-자신의 천부적인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기고 매순간을 보내게 된다. 거친 폭풍과 험난한 파도 사이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진행시키려 고전분투 하는 선장과 같은 심정으로.
그런 점은 아실도 마찬가지. 프로즌 쓰론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많이 부족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보여준 무서운 열정과 집념으로 다진 감각은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승이라는 모습으로 가치를 드러내고 있으니 신용도는 꽤나 높은 편. 그는 그 감각을 통해서 지금 화면 너머 이름 모를 상대가 어떤 항로를 정했고 어떻게 파도를 넘어 전진하려고 하는지 어렴풋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비스트 마스터를 세컨 영웅으로 뽑았을 때 당황하지 않았고, 병력과 함께 일꾼들이 자신의 본진으로 달려왔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타워 러쉬는 워3에서는 가장 전통 있는 작전에 속하는 부류였고 각 상황에 따른 대처법들은 구상한 이들의 상상력이 내보일 정도로 다양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가 달려오는 일꾼들과 매지컬 유닛들을 끊어주기 위해 마중 나갔을 때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장소에는 이미 타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파도를 쥐어 잡을 줄 아는 녀석이군.‘
실로 절묘한 위치였다. 그 위치에서 직접적인 타격은 불가능하지만 건물이 닿는 위치에 타워를 지을 경우 엄호를 하는 것은 가능한 장소. 더욱이 유닛의 이동로에 살짝 벗어나있어 쉽게 발견할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결과적으로 타워 러쉬를 할 경우 결전지가 상대의 본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낭비가 될 수도 있지만 여느 RTS게임과 마찬가지로 워3에는 금과 나무라는 자원 말고도 그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인 시간이 존재하고 그 자원의 측면에선 나무랄 때가 없는 효율성을 지닌 타워였다. 아실은 깨물었던 입술을 살짝 벌리고선 혀를 찼다. 싸울 위치를 이미 상대에게 내줬고 진형 상으로도 뛰어드는 쪽이 불리했다. 너무 멀리 봤고 너무 크게 그림을 그렸다. 그는 판의 주도권이 상대에게 넘어갔음을 시인했다.
두 개의 타워가 동시에 올라간다. 일꾼을 데려왔음에도 타워는 오직 아이보리 타워뿐이니 낭비라고 볼 수도 있지만 피전트의 용도는 단순히 타워 건설만이 아니다. 수리는 기본이고 진형을 구성할 시 자신의 매지컬 유닛들에게 상대 유닛이 달라붙는 것을 막는 벽의 역할과 같이 활용도는 얼마든지 있다. 하다못해 체인 라이트닝의 데미지 분산 역이라도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의 용도를 발견해 냈다.
‘자신을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밀어 넣는 용도.’
아실은 상대 영웅의 인벤토리 창을 찍어보고 한 가지 가졌던 의문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영웅을 뽑고 투 어케인 생텀을 지어 매지컬 유닛을 꾸준히 생산하면서 타워 러쉬를 하기에는 자원이 꽤나 빡빡했을 것인데 상대 진영이 생각보다 두터웠던 것이다. 상대는 타운 포탈을 팔아버렸다. 선 영웅이 죽기 쉬운 지능영웅 아크메이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위험한 모험이다. 이번 타워 러쉬로 끝장을 볼 각오. 비록 게임이라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무대를 매개체로 만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실은 이름 모를 상대의 각오가 느껴지는 듯싶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런 각오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웃어 넘겼을 것이다. 확실히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무슨 상금이 걸려있는 대회의 시합도 아니었고,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을 걸만한 상대와의 한 판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아이서치로 우연히 만나서 벌어지는, 수많은 배틀넷 상의 시합일 뿐. 그런 사소한 게임 한 판에 각오를 한다는 건 동네꼬마들 야구 시합에 스퀴즈 번트를 대고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행동과 마찬가질 것이다. 하지만 아실은 웃지 않았다.
그는 자신 역시 모든 게임을 그런 각오로 해왔음을 떠올렸다.
게임을 매체로 두고 어떤 정신적 교류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진희도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민혜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까지 그가 원하던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중간에 유닛을 끊겨 잃지도 않았고 상대 본진에 타워를 짓는 일도 성공을 했으니 좀 더 여유를 가져도 될 상황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집중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거는 행동은 바람직한 행동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궁금함을 속으로 삭혀 들어갔다.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점은 진희 역시 찬성했다. 그리고 문제 역시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가 계산한 손익 분기점에서 흑자가 나오는 기간은 이미 지나버렸다. 아이보리 타워를 건설할 시기에 상대가 달려올 것이라는 계산을 했고 그렇기에 포탈까지 팔아버리면서 원하던 영웅과 유닛들을 구성했다. 그래서 타워도 두 기 건설에 멈춰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타워가 건설될 때까지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며 타워가 완성되어 바깥 건물의 에너지를 갉아가기 시작한 후에도 그는 꾸준히 유닛만을 모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타워와 매지컬 유닛의 데미지로는 건물을 쉽게 부술 수는 없다. 버로우라면 쉽게 깰 수 있지만 건물 배치가 좋아 오히려 비집고 들어가다가는 굉장히 불리한 진형으로 싸울 처지에 빠져들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여기서 시위만을 할 수도 없었다. 꽤 많은 수의 일꾼을 데려왔으니 자원의 차이가 점점 벌어질 것이다.
‘조급하면 안 돼.’
상대도 무작정 맞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데미지를 계속 받고 있고 무엇보다 상대가 자기 진영 앞에 타워라인을 형성하고 진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방어적으로 타워를 짓고 버티기를 한다면 더 이상 전진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타워가 늘어나 라인이 더 단단해지고 돌파는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아마 그쪽도 서서히 달려 들어올 순간을 마음속으로는 재고 있겠지. 그는 형식적으로나 타워를 더 짓는 척하면서 상대를 끌어들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가 가늠하는 타이밍이 좀 더 빠를 것으로 생각하고 그만뒀다. 첫 번째 디몰리셔가 생산되는 순간. 디몰리셔가 나오면 타워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노려줄 수밖에 없으며 상대 역시 보호를 위해서 유닛들이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의 예상대로 거대한 투석기가 모습을 드러내자 둘은 그동안의 대치 상황이 매우 지겨워서 참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유닛들을 달려 보냈다. 오크 버로우와 휴먼 타워 사이에서 벌어지는 좁은 공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오크였다. 슬로우 마법의 소서리스를 다수 보유한 휴먼이 밀리 유닛 위주의 오크 유닛의 접근을 불허하면서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기교를 부린다 하더라도 오크에게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려주는 스피드 스크롤이라는 아이템이 있다. 프리스트의 디스펠을 개발하지 않은 상황에선 일단 오크 유닛들이 붙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요한 점은 그 유닛들이 자신의 어떤 유닛들과 맞붙게 만드느냐이다.
“성공이다!”
성량으로 따지면 중얼거리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집중된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이라 민혜는 자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서둘러 입을 틀어막는 고전적이고 보편적인 행동을 취한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진희가 반응을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고 살며시 안도했다. 멋진 광경이었다. 스피드 스크롤을 찢으면서 달려드는 오크 병력에게 거대한 몸집의 워터 엘리멘탈과 베어가 달라붙었고 그 옆의 공간을 풋맨과 일꾼들이 막아섰다. 매지컬 유닛을 가운데 둔 방어진이 구축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퀼비스트와 비스트 마스터는 살짝 밑으로 빠져나가 디몰리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초보인 그녀의 눈에도 타워를 중심으로 휴먼 병력이 제대로 진형을 형성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이번에는 안타까움이 섞인 감탄사였다. 휴먼의 방어진이 제대로 구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크가 빈틈으로 파고들어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빈틈을 억지로 비집고 만들어 파고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상대는 휴먼의 방어선이 재빠르게 구축되는 것을 보고선 무리하게 매지컬 유닛을 노리려 하지 않았다. 다만 곧바로 그 방어선 중 가장 약한 부분인 일꾼들을 집중 공격 했다. 파시어의 체인라이트닝과 칩턴의 쇼크웨이브가 일꾼들을 일제히 타격하자 순식간에 일꾼들이 무너져 내려갔다. 진희는 서둘러 방어진의 전선을 좁히면서 소환물로 길을 막으려 했지만 그 때 타이밍 좋게 그물이 날아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틈새로 칩턴이 움직였다. 쿵! 휴먼 유닛 한 가운데 창처럼 박힌 상태로 사용한 워 스텀프는 그야말로 치명적인 시간을 빼앗아갔다. 슬로우에 걸리면 말 그대로 답답할 정도로 느려지긴 하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워 스텀프가 작열한 그 짧은 시간은 그런트와 레이더들이 진영을 비집고 들어와 도끼와 칼을 내려칠 수 있는 시간으로 환산되었다. 진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상대가 접근전을 펼치기 위해 달려들었다거나 디몰리셔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였다면 그의 의도가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크 유저는 몇 대 맞아준다는 각오로 단단한 진영의 틈새를 벌리는 것에 주력했고 그것이 성공하자 좁은 방어진을 구축한 것이 유닛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타워는 훌륭한 공격보조 수단이 아닌 움직임을 스스로 막아버린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진형이 무너졌다. 난전이 벌어졌고 새로이 진형을 짜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디몰리셔 파괴를 위한 목적으로 빠져나간 비스트 마스터와 퀼비스트는 방어를 뿌리치며 소기의 목적을 다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렇게 유닛과 영웅과 소환물에 타워수리를 위해 빼놓았던 일꾼들까지 제각기 뒤섞인 난장판에서는 단단한 맷집을 지닌 유닛들과 범위공격이 가능한 영웅을 지닌 오크가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일. 진희는 무너져가는 매지컬 유닛들을 바라보며 이 시합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일어나야 할 거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진희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민혜를 바라보았다. 극적인 역전승이었으니 크게 웃으면서 즐거워해야 정상일지도 모르지만 누가 보더라도 그가 미친 듯이 잘해서 얻은 역전승이 아니었기에 그런 행동을 하기엔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침울해하거나 멋쩍은 듯 웃을 수도 없었다. 이긴 건 이긴 거니까. 그나마 그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민혜 역시 그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박수를 치며 승리를 축하해져야 하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위로를 해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잠시 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둘은 고개를 숙이면서 큰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멋진 모습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거 부끄러운데.”
“아니요. 충분히 멋있었어요.”
“운이 좋았지.”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항상 나오는 답변이지만 운도 실력이에요.”
이번에야말로 진희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운이 실력이라는 주장은 그도 찬성이긴 했지만 마지막 전투는 단순한 운이라고 평가하기에는 힘들었다. 졌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상대의 컨트롤이 갑자기 어긋났다. 단순한 컨트롤 실수 정도가 아니었다. 유닛이 제각기 놀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타워를 두드리기도 했다. 영웅은 스킬을 쓰지 않아 단순히 체력 많은 유닛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기본적인 무빙이나 일점사도 사용하지 않은 전투. 패배에 직면했지만 휴먼은 완전히 전멸하지도, 영웅이 전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타워가 건재했다. 아무리 단단하다 하더라도 체력 관리가 전혀 되지 않자 오크 유닛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고 곧바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마우스가 갑자기 미쳐 날뛰었다던가, 모니터가 꺼져서 컨트롤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가. 둘 중 하나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전개였다.
“그러니까 일단은 기뻐하기로 하죠?”
그는 그녀의 말에 따라 일단 그러기로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의 알 수 없는 기계고장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옆에 있는 여성이 행운의 여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여러모로 더 기분 좋은 생각이 될 것이니까. 그 여신은 씩 웃으면서 손바닥을 들어 올렸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가 부딪쳤다.
진희의 추측은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 아실이 컨트롤은커녕 유닛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 이유는 어느 하나가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다. 추측에서 틀린 점은 고장이 난 물건이 마우스나 모니터와 같은 장비가 아닌 그의 팔이라는 점이었다. 발작에 가까운 경련이 멈추었을 때는 이미 복구가 불가능한 정도였고 그는 힘이 쭉 빠진 손을 억지로 움직여 짤막하게 gg를 쳤다. 그리고 의자에 몸을 눕히듯이 기댔다.
‘나쁜 일은 꼭 결정적일 때 일어나는 법이지.’
거의 이긴 경기를 놓쳤지만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인간이니 만약 중요한 시합이나 대회에서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그의 손과 그의 과거를 원 없이 저주했을지도 모르지만. 연승이 끊어진 것이 아깝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가능하지만 어차피 그 자체에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날아간 연승 행진에 허탈함을 느끼는데 시간을 허비하느니 앞으로의 일들을 준비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아직 미숙해.’
아까의 타워 러쉬는 전투를 성공적으로 치러 사실상 막을 수 있었지만-혹은 거의 막았지만-그는 그 전 단계를 생각했다. 징검다리 타워가 건설되는 그 위치. 생각해보면 할수록 좋은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을 지금 상대가 순간적으로 발견했을 리는 없었다. 아마 꽤나 알려져 있는, 그래서 오히려 기습적인 용도로만 잘 활용되는 곳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먼지 풀풀 날리는 서랍을 뒤졌다. 모든 세상만사가 그렇듯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제약이 있는 법이다. 팔 뿐이 아니라 온 몸 전체가 뻐근하고 뭔가 어긋난 것 같아 작은 움직임도 하기 힘들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 안에서 종이 한 장 꺼내는 데는 성공했다. ESWC에서 만났던 한 남자의 개성 없는 명함. 정확히 3번의 통화음 이후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실 고메입니다.]
어차피 혼자서 계속 배틀넷만을 전전할 생각은 없었고 연승이 깨진 것은 좋은 핑계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팀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같이 연구하고 고정적으로 연습을 해줄 동료가 필요하다. 자신을 더욱 발전시켜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팀 합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진희와 아실 고메 모두 WEG 지역 온라인 예선을 통과했다.
1부 : Romance
1. Boy meet Girl
2. Boy meet Guy?
3. 남매
4. 데이트
5. 발을 내밀다
6. 예선 7일전
7. 끝과 시작
8. Log Bridge
9. 그리고
2부 : Daydreamer
prologue
1. new challenger
2. 각자의 이유
3. 한국으로
4. meet again
5. 한여름날 어느 복도
6. 東과 西
7. The Benissant
8. 교점(交點)
9. 파란 하늘
10화입니다. 오랫만엣 저번보다 속도가 빨라진 것 같군요(처음인가?) 이번 화는 원래 적었던 대사가 더 적어져서 대부분 설명과 묘사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과연 조회수 100을 넘길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드는군요^^;; 그리고 처음으로 워3 게임 내부적인 면을 거론했습니다만......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워3의 전략이나 전술에 문외한인 몸입니다. 지금까지 워3 소설을 쓰면서 게임 내적인 면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기 싫어서'의 측면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죠. 글을 쓰는 입장에서 철저한 분석과 고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