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기 전 거울을 보았다. 옆으로 누워 잔 탓인지 한쪽 뺨에 선명한 이불 주름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날의 피로를 미처 떨치지 못해 반쯤 감긴 눈으로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몸을 닦고, 머리를 말리고, 스킨을 바른 후 거울을 보았다. 주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때는 이십대 초반이었다. 피부는 생고무처럼 탱탱했다. 자국이 생겨도 금방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지금보다 기억력도 훨씬 좋았다. 스타크래프트 세 종족의 모든 체력과 공격력과 방어력과 공격타입을 달달 외웠다. 하다못해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업그레이드 공식 명칭까지 외웠다. 지금은 아니다. 스타2 유령 공격력이 얼마인지, 광전사의 이동 속도가 얼마인지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방금 전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교통카드를 찍었는지 아닌지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2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피지알은 내가 제대로 시작한 첫 커뮤니티였다. 후배가 알려준 주소로 접속해서 아이디를 만들었다. 닉네임을 만든 건 일평생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민하는 데 대략 2분쯤 걸렸고, 글 쓰는 곰이라는 뜻으로 글곰이라는 닉네임을 정했다. 그걸 지금까지 쓰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스타를 했고, 온게임넷과 MBC게임을 봤고, 피지알 게시판에 글을 쓰고, 자고 일어나 또다시 스타를 했다. 승률은 별로였지만 상관없었다. 스타를 하는 게 재미있었고 보는 건 더 재미있었다. 그리고 스타를 보고 나면 다시 피지알 게시판을 보고 댓글을 달고 가끔씩은 글을 썼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가 이십 년 가까이 피지알러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내가 20년 전에도 이랬구나.
e스포츠로서의 스타크래프트는 이제 수명을 다했고, 나는 마흔이 넘었다. 롤은 하지 않고 보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페이커 정도만 알고 있다. 대신 나는 가끔씩 소설을 쓰고, 그보다 많은 삼국지 글을 쓴다. 21세기 프로게이머 랭킹이라는 이름을 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는 이천 년 전 역사에 대해 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지난 이십 년을 되돌아보면 내게 제대로 활동한 커뮤니티는 피지알이 유일하다. 간혹 다른 곳에다 글을 쓴 일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내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의 98%는 피지알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는 스스로 피지알러라는 정체성을 느낀다. 그렇다 해서 피지알러 따위가 뭐 대단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 스스로는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 마치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이 말이다.
이십 년 전에 피지알을 통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 중 몇이나 되는 이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그들은, 아마도 지금의 나와 대충 동년배로 틀딱 꼰대 아재 소리를 듣고 있을 그들은, 어딘가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수는 결혼도 했을 것이고, 아마도 얼마간은 자식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매우 자주 사회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족들이 잠든 한밤중이면, PC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게임을 시작할 것이다. 이십 년 전에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했던 모습이겠지만, 마흔을 훌쩍 넘은 중년인데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피로와 싸워 가면서 신나게 게임을 할 것이다. 그러다 간혹 내킬 때면 이십 년 전의 게임도 한 번씩 해 보긴 할 것이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라떼는 말야, 라는 말을 주워섬겨 가면서.
그러다 어느 야심한 밤에, 가끔씩 감흥이 지나치게 솟아오를 때면, 그래서 옛날 생각이 물씬 피어오를 때면, 때로는 피지알 게시판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괜히 구닥다리 감성에 젖은 글도 쓸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나처럼.
20년 전의 호기롭던 청년은 이제 중년을 넘어 중늙은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몸은 늙었을지언정 마음만은 20년 전의 그때와 같다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 가면서, 나는 오늘밤에도 컴퓨터를 켜고 피지알에 접속할 것이다. 자게와 겜게를 넘나들고, 유게와 스게를 섭렵하고, 질게와 추게를 왕복하면서, 그렇게 나는 오늘도 피지알러들과 하루하루 더 늙어갈 예정이다. 그렇게 20년을 살아 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예정이다.
산다는 게 뭐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