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네안데르탈님의 에스코바르의 죽음을 보다 보니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축구전쟁(Football War)이라 불리는 중미의 전쟁입니다. 1969년에 발발했고, 100시간 가량 싸웠죠. 사실 이건 축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기보다는 울고 싶던 차에 축구라는 요소가 뺨 때려 준 격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축구 졌다고 깽판친 게 아니란 말이죠. 이름은 정말로 축구전쟁(Football War, 또는 Soccer War)이라고 되어 있지만 배경은 꽤 복잡합니다.
두 전쟁은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라는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문제입니다. 둘은 서로 인접해 있는 나라죠. 온두라스는 그 크기가 북한만한 나라이고, 엘살바도르는 대략 전라남북도와 광주를 합한 크기 정도가 됩니다. 문제는, 인구 수는 오히려 엘살바도르가 40% 가량이나 온두라스보다 많았다는 점에 있었습니다(1969년 기준 엘살바도르 370만, 온두라스 260만). 우리 나라보다 인구가 훨 적으면서 뭔 문제냐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인구가 많으면 그놈의 일자리 대책이 답이 안 나옵니다. 특히나 산업기반이 부실한 나라일수록 더더욱 그렇고, 이들 나라 역시 땅 파서 근근히 살아가는 나라들이었다는 게 문제였죠.
인접한 두 나라의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무래도 엘살바도르에서 온두라스로 건너가서 농사든 뭐든 지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건너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69년에는 온두라스 농민의 무려 20%가 엘살바도르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http://www.yonhapnews.co.kr/medialabs/special/multicultural/foreign.html 요게 2013년 연합뉴스 기사인데 그 때 우리 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수가 150만을 넘어섰다는 기사가 나왔거든요. 근데 이 150만이면 우리 나라 인구의 3%입니다. 이럼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싹 쓸어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증오발언이 넘쳐나는 게 우리 나라의 어두운 현실인데, 20%가 외국인 노동자... 어디 상상이나 가십니까? 정확히 말하면 농민 중의 20%가 엘살바도르 인이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온두라스에 체류하는 엘살바도르 농민의 수는 30만이 넘는 숫자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족히 12% 가량은 됩니다. 우리 나라로 치면 6백만 농민이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이죠. 만일 정말로 우리 나라의 농민 6백만 명이 외국인 노동자라면...
이런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치키타 브랜드 인터내셔널로 바뀐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좀 뒤가 구린 측면이 있었죠. 아니 차라리 사악하다고 해야 하려나... 이 회사에서 소유하는 온두라스 땅이 온두라스 전 국토의 10% 가량 되었습니다. 우리로 치면 전라도를 통으로 접수한 것이나 진배없었죠. 기실 온두라스 자체가 대부분의 땅이 이런 식으로 대형 회사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이건 다른 중앙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지금도 그런 데가 종종 있죠). 이런 넓은 땅에서 싸게 플랜테이션을 돌려 작물을 내놓으니 농민들이 어디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미친 놈들이 돈독이 올랐는지 다른 대형 플랜테이션 회사와 연동, 아니 작당해서 FENAGH(Federación Nacional de Agricultores y Ganaderos de Honduras, 온두라스 국가 농민 협회쯤 됩니다)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군부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던 오스왈도 로페즈 아레야노 대통령에게 압력을 넣어서 부농들을 위한 법안을 입안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 하나가 엘살바도르 인이 경작하고 있던 땅을 빼앗아서 온두라스 인에게 나눠준다는 법안이었죠. 양국의 긴장을 높이는 배경에는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론 불법으로 엘살바도르에서 넘어가서 온두라스에서 농사짓고 살던 사람들에게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겠습니다마는 그 꼴이 되도록(=중남미 국가들의 경제가 기형적이 되도록) 횡포를 부린 회사가 누구며, 과점을 하고 돈을 더 빨아먹으려고 입에 거품을 물던 사람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아무튼 이 결과로 많은 엘살바도르계 사람들이 쫓겨나고, 양국의 긴장감이 높아집니다. 물론 엘살바도르-온두라스 부부도 수가 꽤 많다 보니 이들 문제도 어지간한 골칫덩이었죠. 아무튼 장기 체류자고 노동자고 뭐고 엘살바도르 인들이 온두라스에서 죄다 쫓겨나서 양국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된 가운데(엘살바도르 입장에서야 이 사람들이 다 자기 나라의 실업자가 될 판이니 달가울 리가 없을 수밖에요), 문제의 예선이 터집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위한 북중미 예선전에서 두 나라가 격돌했고, 각각 홈에서 온두라스가 1-0,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이겼습니다. 이 당시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중립국가인 멕시코에서 최종전을 치렀고, 격전 끝에 엘살바도르가 3-2로 승리해서 진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한 당일 엘살바도르는 이걸 빌미삼아 "엄청난 수의 엘살바도르 인이 죽고 다쳤는데도 온두라스 정부는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았고, 어떠한 보상과 배상도 지급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며 온두라스와 단교를 선언, 마침내 엘살바도르 공군의 공습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선빵을 엘살바도르 공군이 쳐서(공항을 날려버린 게 크죠. 독소전쟁 때도 그랬지만 일단 기습하는 측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죠) 온두라스는 초기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고, 때맞춰 육군이 세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온두라스는 8km 가량 줄줄 밀려납니다. 여기에 하필이면 수도인 테구시갈파가 엘살바도르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국경까지 직선거리 65km, 서울 - 평택간 거리보다 좀 못 미치는 정도입니다. 부산으로 치면 부산항 - 밀양 정도의 거리) 테구시갈파가 엘살바도르군의 사정권 안에 드는 비상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니카라과의 도움을 온두라스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온두라스는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아메리카 국가 연맹, 흔히들 미주 기구라 그러더군요)에 헬프를 칩니다. 그리고 OAS는 엘살바도르에 철수를 요구하죠. 엘살바도르는 자국민들이 받은 피해와 쫓겨난 자국민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 및 온두라스에서의 자국민의 안전한 체류를 요구하면서 버텼습니다만, 돈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미주 전체 단위의 경제 제재를 경고하고 나서자 엘살바도르도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양국 모두에게 재앙이었는데, 일단 전쟁이라는 게 돈이 어마어마하게 듭니다. 쉽게 말해서 양국의 재정은 그야말로 박살이 난 게죠. 전쟁터 자체는 온두라스였기 때문에 수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 사상자 중 온두라스 측의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엘살바도르는 수많은 쫓겨난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고, 온두라스 정부에서 못 준 돈을 이들이라고 줄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수직 상승한 실업률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게 되고, 이게 훗날 무려 12년간 벌어졌던 엘살바도르 내전의 한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중앙 아메리카 경제 협력 기구(CACM, Central American Common Market)의 회원국이던 두 나라의 전쟁으로 인해서 CACM 자체가 상당 시일 동안 문자 그대로 얼어버렸습니다.
양국은 1980년 평화 협정에 조인하고 그런대로 관계를 많이 개선한 상태입니다만 여전히 영토 분쟁에 대한 불씨는 남아 있는 상태라는군요.
출처는 영문 위키피디아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Football_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