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3월 4일. 희뿌연 스모그가 하늘을 겹겹이 채우다 못해 무너져내릴 것 같았던 그 날 아침, 한 신생아가 태어난 지 7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에 전 국민, 아니 전 세계가 슬픔과 절망에 빠졌다. 이 아기는 7년 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신생아였기 때문이다. 지난 7년 동안 인류는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21세기 이후 완만하게 감소하던 출생률(인구 1,000명 당 신생아 수)은 인구가 100억을 넘긴 2,050년부터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서구 선진국은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성향이 심해진 탓이라 했다. 중남미는 지카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신생아 소두증에 대한 공포가 임신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중국과 인도는 산업 성장에 따른 심각한 환경오염의 영향이라고 발표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어려움에 청년층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모든 추론은 출생률 감소를 설명할 수는 있었지만, 출생률이 0이 되는 사태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0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성은 컸다. 언론은 인류 멸망을 이야기했다. 신의 심판이라는 주장과 함께 사이비 종교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지에서 중소 규모의 테러가 빈번히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부부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부부는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전 세계가 한뜻으로 새 생명의 탄생을 간절히 기원했다. 출산 예정일은 그야말로 전 세계의 축제일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날 인류가 목도한 것은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7시간 만에 사그라드는 광경이었다. 인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졌다.
2,0XX년 3월 25일. 그 날의 절망이 차츰 잊혀갈 무렵 한 남성이 서울의 모 대학을 방문했다. 남성은 검정 수트에 짧은 머리를 하고 회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의 왼팔 아래가 불룩한 것이 회사원은 아닌 듯하다. 남성은 '재실 중'이라는 푯말이 적힌 사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똑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 쾅쾅쾅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남성은 살짝 약이 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썩은 미소를 흘렸다. 별수 없이 복도 한켠에 우두커니 선 채 사무실의 주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남성이 기다림에 지쳐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을 때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머리가 살짝 희어졌지만, 아직 젊은 티가 나는 순박한 얼굴의 사내였다. 그는 코트를 팔에 걸친 채 사무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문 앞에서 푯말을 '부재중'으로 바꾸고는 "어디 있지?"를 되뇌며 연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를 지켜보던 바바리코트의 남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성식 교수님?"
"네?"
김 교수는 여전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사무실에 오셨으면 재실 중이라고 하셔야죠."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본 김 교수는 푯말을 고치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에 덤벙대는 성격이어서요."
그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몸이 숙어지면서 코트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그리고는 사무실 문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저거... 사무실 열쇠인데..."
바바리코트의 남성은 한숨을 내쉬더니 뒤춤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이를 바라보는 김 교수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교수님. 열쇠고리를 장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이프를 문틈에 밀어 넣더니 간단하게 사무실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문을 열었네요."
김 교수는 살짝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남성은 나이프를 허리춤에 꽂아넣고는 절도있는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UN에서 특별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인공 수정과 배아 복제의 권위자인 김성식 교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는 이를 안내해드리러 온 UN 소속 특수요원 윤시진 대위입니다."
윤 대위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김 교수는 잠시 어벙한 표정을 짓다가 질문을 던졌다.
"제가 국내에서 나름 권위가 있기는 합니다만, 세계적으로 저보다 나은 분들이 많이 계실 텐데요. 왜 저를 부른 거죠?"
"이번 조사위원회는 평양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직접 소통이 가능한 전문가가 필요한 듯합니다."
"북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북한에서 지난주에 13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2,0XX년 3월 28일. UN 특별조사위원회가 상하이에 소집되었다. 평양과 연결된 항공선은 베이징과 상하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이 100세를 넘기며 장수한 덕분에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계속되었고 남한과 미국에 대한 도발도 꾸준했다. UN은 그런 북한에 통상 금지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 제재를 가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과 주의해야 할 사항, 국제회의에서 필요한 예법에 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지난 이틀간 국정원에서 지긋지긋한 안보교육을 받았던 김 교수는 비슷한 교육을 또 받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군복만 입고 있었다면 영락없는 예비군 훈련이었다. 오늘은 왠지 불량해지고 싶은 김 교수였지만, 정말 그럴 만큼 몰상식하거나 깡다구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교육을 마친 뒤 각 조사 위원에 대한 소개와 통성명의 시간을 가졌다. 특조위는 미국, 중국, 러시아의 의료 및 생물학 전문가와 UN 사무부총장 그리고 수행원까지 대략 2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빙된 석학들의 면모는 김 교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미국의 생물학자는 노벨상 수상자였고, 중국의 과학자는 최초로 인간 복제에 성공했던 사람이었으며, 러시아의 의사는 최근 사이언스지와 네이처지에 연거푸 논문을 게재하며 천재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이 정도 명성의 석학이라면 보통 조사위원회 같은 요청에 응하지 않는 편이다. 연구하기도 바쁜데 굳이 시간을 내어 폐쇄된 독재 국가를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기꺼이 모인 것이다. 소문으로는 이 자리에 참여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로비 공세가 있었다고 한다. 유럽 연방과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전문가가 발탁된 것과 관련하여 거친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다. 김 교수는 특조위가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원정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2,0XX년 3월 29일. 상하이에서 출발한 전용기가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북한 정권의 체제 과시를 위한 성대한 환영식 같은 것은 없었다. 특조위는 류경호텔로 이동하여 곧바로 회담에 착수했다. 회담장은 실무적인, 아니 사업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풍겼다.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김 교수를 포함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석학들은 UN 사무부총장과 북측 대표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인사치레를 몇 마디 나누고 나자 UN 측은 단도직입적으로 북측에 요구사항을 물었다. 북측은 처음에는 요구사항 같은 것은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원활한 연구 진행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경제 제재를 해제하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UN 측은 경제 제재는 해제할 수 있지만, 핵확산을 용납할 수는 없다고 받아쳤다. 대신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면 경제 제재 해제를 넘어 전폭적인 경제 원조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양측은 핵에 대한 의견이나 원조 규모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산이라던가 인류라던가 하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인류의 존망이 걸려있음에도 이권 다툼에 매진하는 모습은 가련할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신은 어찌하여 인간을 이리도 어리석게 만들었을까?
김 교수는 답답함을 느꼈다. 기껏 북한까지 왔건만 협상 테이블에서 입만 털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 졌다. 이럴 거면 자기를 뭐하러 불렀나 싶었다. 회담 내내 팔짱을 끼고 꽁한 표정을 지었다. 회담을 마치고 만찬을 할 때도 말 한마디 없이 음식만 입속에 구겨 넣었다. 지루했던 회담과 만찬을 마친 김 교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배정받은 호텔 방으로 향했다. 그가 카드키로 문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UN 사무부총장과 통역이 서 있었다.
"국제회의 예절은 어따 팔아먹었습니까? 기껏 교육했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죠. 뭐가 그리 불만입니까?"
부총장의 꾸지람에 김 교수는 눈을 깔았다.
"내일은 표정 관리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총장이 그리 말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김 교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여기 무엇하러 온 겁니까?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까?"
부총장은 그 말을 전해 듣더니 피식했다.
"우리가 교수님을 왜 불렀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북한이라는 곳이 그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위원회 석학들의 면모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들과 함께 북한 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는 광경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마치 마피아가 사업 얘기 하는 것 같더군요. 이럴 거면 우리를 뭐하러 부른 겁니까?"
부총장은 이 말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김 교수님. 여기에 세미나 하러 오셨습니까? 그들이 협조적일 것으로 생각하셨나요? 천만에요. 앞으로도 비협조적일 겁니다. 핵심 노하우를 끝까지 감추려 하겠지요. 어쩌면 출산 노하우 따위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거짓 정보를 흘리고 이득만 얻어갈 수도 있지요. 그걸 막기 위해 전문가를 모신 겁니다. 회담장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과학자가 아니라 협상가를 불렀겠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일종의 전쟁입니다.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그들이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입니다."
김 교수는 부총장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김 교수의 생각은 이상이었고, 부총장의 말이 현실이었다. 부총장은 "굿 나잇."이라는 말과 함께 김 교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김 교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으로 들어섰다. 평양의 첫날은 이렇게 허망하게 흘러갔다.
2,0XX년 3월 30일. UN 측은 우선 신생아부터 확인하자는 뜻을 전했다. 북측은 의외로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특조위는 북한이 마련한 차를 타고 호텔에서 의료시설로 이동하였다. 차창으로 바라본 평양은 확실히 낙후되어 있었다. 도로나 건물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마치 20세기에 지어진 듯한 낡은 스타일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10분 남짓 걸려 도착한 의료시설은 전혀 딴판이었다. 외관부터 현대적인 디자인을 갖춘 데다 내부는 최첨단 설비로 채워져 있었다. 특조위는 북한의 설비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그들이 정말로 출산 문제를 해결했을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료시설에 도착한 후 신생아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김 교수는 인류의 미래와 조우한다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신생아실의 커다란 통유리 앞에서 북한 의료진의 브리핑이 있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블라인드가 걷히며 13명의 아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를 바라보는 김 교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유리 건너편에서 앙증맞은 손발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격에 겨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아기의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북한 의료진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아기의 상태를 설명했다.
"위대한 김정은 아버지의 업적으로 새 시대를 이끌어갈 역군들이 모두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병도 없고, 젖도 잘 먹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김정은의 업적이라는 말이 독재 국가 특유의 말투인지, 정말로 국가 차원의 특별 조치를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음은 출산 후 입원 중인 산모들을 만날 차례였다. 그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정은 장군님의 은총 덕분에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제 한 몸 바쳐 장군님의 의지를 이을 수 있다는 사실에 오늘도 감사, 또 감사하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장군님의 은총이라는 말에 '그럼 애 아빠가 김정은인가?'라는 생각이 떠오른 나머지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UN 사무부총장이 그런 김 교수를 째려보자 이내 정색하고 말았다. 특조위 전문가들은 산모들에게 다양한 질문을 건넸다. 몸 상태는 어떤지, 애 아빠는 누구인지, 섹스는 얼마나 자주 했는지 물어보았다. 하지만 출산의 비밀을 알아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통역을 거치면서도 날카로운 질문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김 교수는 동네 아저씨가 할 만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그는 "축하한다.", "고생했다."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산모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열두 번째 산모와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서향옥씨. 엄마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게 다 장군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사실인가 봐요. 정말 미인이시네요."
"망측하게 그런 말씀 마십쇼."
김 교수는 상대가 유부녀라는 사실도 잊은 듯 추파를 던졌고, 산모는 얼굴을 붉히며 너스레를 떨었다.
"참. 제가 결혼하신 분께 실례되는 말을 했네요. 사과드립니다. 별 뜻은 없었습니다. 제가 워낙 덤벙대는 성격이어서 말이 헛나왔네요."
"일 없습니다. 저도 집에서 덤벙댄다고 오마니께 맨날 야단맞습니다."
"너무 잡담만 해서 저 사람들이 뭐라 하겠네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스물다섯 살입니다."
"어? 소띠 시네요? 저도 소띠에요. 우리 띠동갑이네요."
"그렇습니까? 어쩐지 말이 잘 통한다 했습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지만, 아주 잘 맞는 듯 수다를 이어갔다. 김 교수가 평양에 와서 처음으로 얼굴이 환하게 피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뭐 하시는 분인가요?"
"아이 아바이는 군인입니다. 오늘도 당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인을 얻다니 남편분이 정말 부럽네요. 둘이 어떻게 만난 거예요?"
"일터로 가는 정류장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오호라. 언제 남편분에게 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순간 산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악보 없이 무대에 오른 연주자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김 교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산모가 북측 의료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의료진은 김 교수에게 지나친 개인정보를 묻는 것은 자제해 달라며 주의를 돌렸다. 그 사이 산모는 의료진과 함께 병실을 빠져나갔다. 슬리퍼도 신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녀의 발목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그 날 저녁, 특조위는 산모와 대화한 내용을 검토하기로 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산모가 가짜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차트에 적힌 상태와 눈으로 진단한 산모의 상태가 다르다고 했다. 북한의 쇼에 놀아났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이 아기가 복제 인간이 아니냐는 의견을 내비쳤다.
"가짜 산모를 내세우는 걸 보면 산모의 정체가 출산 성공의 핵심일 겁니다. 산모를 밝힐 수 없는 걸 보면 아마 산모가 없는 게 아닐까요? 아기가 복제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 복제는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 전부였습니다. 출생률이 0이 되고 나서는 태아가 전부 유산하고 있어서 이마저도 불가능하고요."
"자연스러운 출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3명이 거의 동시에 태어나다니 이상하잖아요. 혹시 북한이 대리모가 필요 없는 인간 복제에 성공한 것이 아닐까요?"
"아니요. 아기들은 전부 배꼽이 있었어요. 만약 인공 자궁을 이용했다면 탯줄이 없으니 배꼽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이 그런 기술을 갖고 있을 리도 만무해요. 인공 자궁은 지금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간 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출산이 멈춘 이 사태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어요. 사실 임신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간간이 임신하는 여성이 나오는데 전부 유산했습니다. 그래서 대리모 연구도 중단되었고요."
"임신 자체도 거의 없어요. 덕분에 콘돔 회사가 다 망해버렸죠."
"정말 신의 저주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나마 제일 그럴듯한 추론은 인구 과포화 이론입니다. 생물이 닫힌계에서 급격한 번식으로 생존 공간이 부족해지면 집단으로 폐사하거나 불임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미생물에서부터 포유류까지 많은 종에서 관찰되는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구는 너무 넓어요. 그리고 이 현상이 인구 밀집 지역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고요."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출산이 안 되고 있어요."
"그런데 북한 같은 낙후된 독재국가에서 출산에 성공했단 말이죠."
"진짜 궁금합니다. 과학자로서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네요."
"협상하는 걸 보면 그리 쉽게 알려줄 것 같진 않습니다."
세계적 권위자들이 머리를 맞대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북한이 해답을 알려줄 때까지 손가락 빨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 교수는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며 숙소로 들어갔다.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당황하다 못해 공포에 질렸던 가짜 산모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김 교수는 자책감이 들었다.
2,0XX년 3월 31일. 이날 회담은 의료시설에서 이뤄졌다. UN 측은 산모가 가짜라며 북측을 비난했다. 어이없게도 북측은 산모가 가짜라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인정했다. 그리고는 그래서 어쩌라는 태도로 나왔다. UN 측이 출산한 적도 없는 것 아니냐고 언성을 높였다. 북측은 아기를 보지 않았냐며 여유를 부렸다. 한 조사 위원이 아기는 우연의 산물이고 실은 아무런 기술도 없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한 북한 의료진이 회담장 밖으로 나가더니 복도 끝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저곳이 연구실입니다. 우리는 오랜 연구 끝에 출산에 성공했습니다. 저곳에 그 비법이 있습니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우리의 요구를 먼저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이날도 회담은 아무런 진전 없이 마무리되었다.
2,0XX년 4월 1일.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회담이 이어졌다. 다만 회담의 내용은 어제와 전혀 달랐다. 북한이 전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줄 것은 물론 기존에 약속한 원조도 2배로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북측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새벽에 있었던 중동의 폭동 때문이었다. 지난 새벽 중동의 한 원리주의 종교지도자가 TV에 나와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비난했다. 여성이 신이 부과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신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 했다. 이 방송이 나간 후 중동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여성들을 무참히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슬람 여성이 차도르와 부르카로부터 해방된 지 10년 만에, 한 광인의 말 한마디로 그들의 인권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UN 측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구 공유는 나중으로 미루고 최소한 아기의 존재만이라도 세계에 방송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북측은 완강히 거부했다. 김 교수는 다시 답답함을 느꼈다. 지구 반대편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저들은 이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솟구치는 역겨움을 참지 못한 김 교수는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김 교수가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을 때 북측 대표와 UN 사무부총장이 악수를 하고 있었다. UN이 북한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어두웠던 김 교수의 얼굴이 이 소식을 듣더니 환하게 피었다. 그는 부총장에게 '훌륭한 결단'이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북한은 지금 당장 연구 내용을 공개해주겠다고 했다. 김 교수는 희망과 호기심이 뒤섞인 흥분에 사로잡혔다. 북측은 특조위를 연구실로 안내했다. 보안 카드, 홍채 검사, 지문 검사 등 몇 겹의 보안장치를 통과하고 나서야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연구실 내부를 바라보는 김 교수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연구실은 의료시설의 한 동을 전부 차지할 만큼 규모가 컸다. 체육관이나 비행기 격납고 만했다. 연구실 양쪽에는 수백 개의 유리관이 늘어서 있었다. 그 규모와 설비는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자 압도는 분노로 바뀌었다. 수백 개의 유리관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 액체 속에 임산부가 담겨있었다. 마치 포르말린에 담긴 실험체 같았다. 김 교수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인체 실험을 하는 겁니까?"
김 교수가 목소리를 짜내듯 소리쳤다.
"아니요. 실험은 하지 않습니다. 실험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뭐랄까... 이건 이미 완성된 겁니다. 그쪽 말로 하자면 상용화되었다고나 할까요?"
북측 대표가 그럴듯한 서울 말씨로 대답했다.
"그럼 이것들은 전부 뭡니까? 왜 여성들을 여기 가둬둔 거죠?"
"왜 인류는 갑자기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걸까요? 처음 이 현상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젊은 남녀를 모아 강제로 임신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임신은 되지 않았고 되더라도 유산되었죠. 산모에게는 병도 없었고, 감염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정자도 난자도 모두 건강했죠. 심지어 체외 수정을 하면 수정란도 정상적으로 생성됐어요. 뭐 여기까지는 모두 아시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착상만 하면 아기가 유산됩니다. 마지막 아기는 심지어 출산했는데도 금세 죽었지요? 그래서 산모의 몸을 살펴봤어요. 마치 아기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요. 산모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산모의 몸은 아기에게 양분을 끊거나 산소 공급을 줄이거나 나쁜 물질을 보냈어요."
"당신들이 차우셰스쿠입니까? 강제 임신이라니요. 게다가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해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과학력을 무시하지 마시죠. 뭐 해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 교수는 분노와 공포로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고가 일어났어요. 실험 중인 한 산모가 도망치려다 넘어졌는데 그만 머리를 다쳤죠. 깔끔한 코마 상태가 되었습니다. 의식은 없지만, 그녀는 그대로 임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죠. 그런데 아기가 잘 자라는 겁니다. 산모의 의식이 사라지자 임신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됐어요. 우리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인류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구 과포화 상태를 인식하기 때문이라고요. 그로 인해 집단 불임에 빠진 것이죠. 하지만 외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맙소사, 출산에 성공한 겁니다."
"그럼 이 사람들은 전부..."
"그렇습니다. 전부 코마 상태죠."
"미쳤습니까?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야!"
"하지만 인류를 구원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UN 사무부총장님도 아까 동의했습니다. 어떤 비인도적인 방법이라도 수용하기로요."
UN 사무부총장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김 교수는 그를 리얼리스트를 가장한 악마라고 생각했다.
"이건 무효야. 절대 안 돼! 이런 식으로 인류를 구원해선 안 된다고! 저 산모들의 삶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김 교수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커다란 연구실이 그의 고함으로 가득 찼다.
"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출산을 반복할 겁니다. 수정란을 받아서 착상에 성공하면 아이를 키울 겁니다. 우리는 이를 '숭고한 희생' 혹은 '구원을 위한 대가'라고 부르겠죠."
"이렇게까지 해서 구원해야 할 인류라면 차라리 멸망하는 게 나아!"
김 교수는 이 말을 외치며 눈앞의 유리관을 쾅쾅쾅 내리쳤다. 보안 요원들이 그런 김 교수를 붙들었다. 김 교수는 양팔이 붙들리자 유리관에 머리를 박았다. 요원의 손에 머리채까지 붙들리고 나서야 김 교수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처연한 표정으로 유리관 속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낯이 익었다. 유리관 아래 차트의 이름을 확인했다. 서향옥. 이틀 전 이야기를 나눴던 가짜 산모였다.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김 교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비명에 세상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2,0XX년 9월 15일. 언제나처럼 희뿌연 스모그가 하늘을 겹겹이 채운 그 날 아침, 한 사내가 초고층 빌딩 아래로 스모그를 뚫고 투신했다. 사내는 대한민국의 명문대 교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뉴스는커녕 해당 대학의 교내 신문에도 실리지 않았다. 발견자의 신고를 받고 경찰과 소방관이 출동했을 때, 현장은 이미 국정원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의 재킷 안쪽에는 '진실을 전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유서가 있었지만, 그 사실 또한 어느 언론에서도 발표되지 않았다. 대신 언론은 곧 한국에 도입된다는 인류 구원 프로젝트를 대서특필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에 이어 4번째로 선택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인류 구원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 세계는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폭동과 테러는 멎었고 세상은 평화와 희망을 노래했다. 하지만 그 날 목숨을 버린 어느 교수의 유서가 공개된다면 사람들은 깨달을 것이다. 인류가 멸망한 시점은 아이를 낳지 못했던 순간이 아니라 아이를 다시 낳기 시작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인류는 인류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Written by 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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