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기 전에
특정 테란 선수의 팬이 아닌, 테란이라는 종족의 팬 분이라면 본문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1. 짜증
즐겁고 신나자고 보는 게 스타입니다만, 스타가 항상 재밌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발 이기게 해달라고 밤에 잠들기 전에 기도까지 했던 경기에서 응원하는 선수가 졌을 때, 엄청나게 기대했던 경기가 허무하게 끝날 때, 그리고 내 10대를 바친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어쩔수 없는, 애들이 하는 게임일 뿐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때-
이제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저는 임성춘 형님이 조직하신 ‘안티벌쳐 클럽’의 열열한 지지자였습니다. 예- 이로서 다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프로토스 유저입니다. 저녁식사 맛있게 하셨을 이 시간에 여러분께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 기억의 시계 바늘을 뒤로 돌려 한빛 소프트배로 돌려놓아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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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죄송합니다. 못할 짓을 부탁드렸네요. 정말 끔찍하군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ㅠ_ㅠ)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끔찍한 기억입니다. 누가 했던 말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아마 강민 해설이 선수시절에 했던 이야기 같습니다만),
“토스의 좋은 선택은 어려운 승리를 불러오고, 토스의 평범한 선택은 쉬운 패배를 불러온다”
고 말했을 정도로 토스는 참 암울했었습니다. 하템 뽑아서 앞마당에 포토를 박아놓으면 뮤탈이 날아오고, 본진 미네랄 옆에 포토캐논 지어놓으면 언덕 아래 러커가 와서 박히고- 으음.. 오늘 밤에 악몽을 다시 한 번 꾸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두려운 기억입니다.
꼭 토스 얘기만이 아니라도, 저그도 테란한테 참 고생 많이 했죠.
전상욱 선수가 그랬듯이
“가까우면 벙커링 멀면 더블”
이라고 외쳐대면서 벙커링 해서 이기면 이기는 거고 아니면 힘싸움 해서 이기는 거고 이런 식으로 게임을 할 때는 정말..
스타가 게임으로 보였습니다. 연습한대로, 노력한대로 더 많이 피땀 흘리고 눈물 쏟으면 남보다 더 강해지는 나의 이상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우상들이 결코 그들의 영웅들보다 게으르지 않았을텐데, 경기가 끝나고 웃을 수 없었던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스타는 게임일 뿐이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었더랬죠.
2. 낙담
고통은 희망이 보일 때 느끼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가요. 무수한 도전 끝에 희망이 생겨납니다.
박성준의 뮤탈, 저글링, 러커에 천하의 최연성이 무릎을 꿇습니다. 벙커링을 드론링으로 응징합니다. 저그가 최초의 온게임넷 스타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습니다.
강민의 더블넥에 저그가 최초로 토스 앞에 무릎 꿇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3 셔틀 힘싸움에 테란의 타이밍 러쉬는 빛을 잃고, 포르테에서 박태민을 잡아내면서 ‘저그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라고 선언해버립니다. 초유의 에이스 결정전 연승행진은 ‘테란 아닌 에이스는 안정감이 없다!’는 불문율을 헛소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어서 이제까지는 느끼지도 못했던 고통들이 저를 엄습합니다.
박성준은 어느 순간에 테막이 되어버렸습니다. ‘멀면 더블 가까우면 벙커링’의 시대가 열리면서 테란과 저그는 사상 최악의 언벨런스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박성준은 테막이 되었지만, 토스를 때려잡습니다. 강민의 더블넥은 점점 파훼되어가다 박성준에게 아카디아에서 일격을 맞는 것으로 침몰되고 맙니다. 부숴지고 망가진 강민의 함대가 마재윤의 거역할 수 없는 진군 앞을 막아서 봅니다만, 최고의 선택으로 한 경기를 가져온 후, 평범한 선택으로 내리 세 경기를 내어줍니다.
3. 분노
솔직히 이 쯤 되니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 여기에서까지 배우고 느껴야 하는 건지, 선수들이 하는 고생과 노력이 이렇게 끝나는 게 옳은 일인지-
강민의 더블넥이 소울의 삼지창보다 가치가 없는 것인지,
박성준의 뮤탈, 저글링, 러커가 테란의 벙커링보다 나쁜 것인지,
토스는 저그의 밥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저그는 구제불능의 테란 사냥감일 수밖에 없는지-
4. 환희
마재윤은 이런 저를 비웃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좋은 선택이 어려운 승리를 불러온다고? 이기고 싶으면 항상 좋은 선택만 하면 되잖아!”
김택용의 3.3.은 제게 한마디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10년이나 된 게임, 이제는 볼 거 다 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스타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니까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장 높은 곳에서 벙커링에 무릎 꿇은 이제동이 제게 한마디 하네요.
“저그도 테란한테 당한만큼 갚아줄 수 있다”
스타가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수없이 많은 이들의 지난날들.
나의 날들, 당신의 날들, 우리의 날들.
오늘 이제동이 한 번 더 보여줬네요.
스타는 단순한 게임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10년 동안 저그가 다전제에서 단순히 빠른 저글링의 힘만으로 테란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 단 한번도 해본 적 없었습니다. 그럴 수 없게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오늘 새로이 스타라는 게임을 다시 만들어낸 이제동 선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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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는 포모스(
http://www.fomos.kr)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