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나온지도 어언 10년이다. 출시되었을 때부터 이 게임을 즐겼다. 나뿐만이 아니고 우리세대의 많은 이들이 ‘스타’를 즐겼다. 우리 세대를 규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문화가 비록 스타가 아니더라도 게임이 아닐까 싶다.
내 경우도 정말 많이 했고, 정말 많이 봤으며, 실제 현장에 가서 관람한 경우도 몇 차례된다. 심지어 수능 전날 밤에 집에서 나는 스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게임 자체에 약간의 싫증을 느꼈고, 스타도 지루하지는 않았지만-이게 스타의 매력이 아닐까-하기가 싫어졌다. 꼬박 챙겨보던 스타리그도 덜 보게되었고, 시간이 더 지나서는 작정하고 스타에서 손을 떼었다. 결심을 한 것이다. 이제는 그만 해야겠다고.
입대를 했다. 우리세대의 또래끼리 이야기를 나누면 스타이야기가 가끔 나오게 된다. 게다가 입대를 하는 병사들의 나이상 많은 이들이 스타를 즐기고, 방송을 본다. 가끔 같이 스타 방송을 보았고, 으레 요새는 누가 잘하나, 라는 식으로 묻고는 했다.
전역을 하고, 사정상 특별히 할 일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TV를 거의 안보지만 잠이 안 오거나 하면 새벽엔 TV를 켜게 된다. 그래도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기에 채널을 돌리다보면 어느새 게임방송을 보게 된다. 제대 후 좀 보다가, 이런저런 일로 또 한 두, 세달 안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0월 중순부터 다시 집에서 할 일 없이 지내게 되면서 새벽에 TV를, 게임채널을 보는 습관이 살아났다. 옛날처럼 정말 열성적으로 보는게 아닌, 누구를 특별히 편드는 것도 없이, 즐기면서 한 경기, 한 경기 보게 되었다. 몇 년 전 스스로도 플레이를 많이 하던 때라면 한번 흉내라도 내보려고 할, 지금으로는 도저히 따라 할 수도 없는 컨트롤, 경기내용들을 보면서 ‘아, 진짜 잘하네.’하며 속으로 감탄하게 된다.
나는 랜덤을 하다가 테란으로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이머들은 비테란 유저였으며, 내가 가장 좋아한 선수는 만년 2위 홍진호였다. 누군가를 팬으로서 좋아하게 되면, 당연히 그 누군가가 승리를 하면 기쁘고, 그 누군가가 패배하면 안타깝고 슬프다. 그런 점에서 정말 열정적으로 스타를 즐기고 보던 시절에는 안타까운 쓴 감정을 많이 맛봐야했다.
군대에서 물었던 요샌 누가 잘하나,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답은, 테란은 이영호, 저그는 이제동, 플토는 도재욱하고 송병구가 잘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 중 세 명의 이름은 생소했고 송병구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다. 스타에 대한 내 관심이 서서히 꺼져가던, 스스로 전원을 내리기 시작하던 때에 몇 번 본 게이머였다. 그래서인지 왠지 올드게이머라는 느낌으로 다가왔고,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있다는 사실에 아주 약간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들이 잘 한다면, 플레이 추세가 어떠냐, 라는 질문에는, 이제동의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만 생각이 난다. 하이브를 빨리 올리는데, 올리기까지 상대가 못 나오게 막는 플레이가 최고다, 소수 저글링으로 빈집털이 후에 뮤탈로 견제를 하는데, 그 뮤탈 컨트롤이 역대 최고라는 것이었다.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 인터넷을 통해 이제동의 경기를 찾아서 보며 정말 그 경악할 정도의 뮤탈의 움직임에, 심지어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짜증을 느끼기까지 했다. 요새는 이렇게까지 잘 하는구나.
그리고 아주 조금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 스타리그 결승에는 이영호와 송병구가 결승에 올라있었다. 이제동은 이미 양대리그를 동시에 석권한 선수가 되어있었다. 대충 여론을 살펴보니 송병구가 상대전적에서 상당히 앞서고 있었고, 우승이 점쳐지고 있었다. 결승을 앞두고 펼쳐진 다른 결승에서는 박빙으로 이영호가 승리를 했다.
보지는 못했지만 (박카스배)결승에서 이영호는 3대0으로 송병구를 가볍게 이겼다.
버릇이 도진 최근, 새벽에 개인 및 프로리그의 재방송들을 보면서 유독 송병구에게 관심이 갔다. 어쩌면 홍진호의 뒤를 잇는 만년 2등이라는 라벨 때문에, 예전에 남모르게 부글대고 아쉬웠던 감정에 때문에 이상스런 향수에 젖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멀지는 않은 과거, 기억도 잘 나지않는 몇몇 경기들의 주인공일 송병구. 이상할 정도로 플토종족전이 계속 되었는데(최근 프로토스가 잘 나가고 있어서일 것이다) 신기하리만치 잘 이겼다. 이길 것을 이기고, 질 것 같던 것도 역전하고, 다선승제 경기에선 결국 이기고.
8강을 보았는데 김택용을 아슬아슬한 명승부끝에 이겼다.
4강에서 플토-플토전 연승행진중이던 도재욱도 이겼다.
결승전에서 정명훈이라는, 내게는 또 다른 낯선 이름의 선수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 2일 전, MSL의 8강에서 김구현과 또 플토전을 했다. 이때는 이미 내 중립적 입장, 즐기는 관전 태도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난 속으로 송병구를 응원했다. 밀고 당기며 5세트까지 간 끝에 졌다. 낙담했지만, 액땜이라고 좋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결승전을 직접 보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승전을 현장에서 관람한 건 박정석이 임요환을 이기던 때였다. 온게임넷에서 보내주는 결승 홍보 광고에선 번번히 우승문턱에서 좌절을 했던 송병구의 우는 모습이 나왔다. 애달프면서도 무언가 애틋했다.
‘또 울어라. 다만 이번은 다르게 울어라.’ 라고 생각했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코엑스 컨벤션홀을 찾았다. 이미 관중석은 다 차있었다. 홀의 양 옆 벽 높이, 임요환, 이윤열, 박정석, 오영종, 서지훈, 최연성, 박성준, 마재윤의 모습이 교차되는 영상이 투사되고 있었다. 뒤 쪽에서 벽에 기대서서 정면의 커다란 스크린을 보았다.
1경기가 시작되었고, 다소 싱겁게 경기가 끝났다.
2경기에서 다크템플러 카드로 다소 무난히 이겼다.
2대0.
3대0으로 끝나길 기원했다.
3차전은 그의 특기라는 리버가 쉬이 막혀버렸고, 답답하리만치 꼼꼼한 전진 조이기에 경기를 내어주었다. 왕의 귀환이라는 맵의 이름을 이용해서 해설가, 캐스터 분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맞아 떨어졌다. 심히 불안했다.
4차전은 빌드가 극단으로 갈렸고, 상성상 최악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주었다. 단지 지켜보는 사람일 뿐인데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온갖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여기를 안 왔어야 되나, 내가 보고 있기에 결국 지게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자기중심적인 미신적 망상이 머리를 채웠다. 내가 저주를 퍼붓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식의.
그냥 마음을 비웠다. 완전히 비우지는 못 했겠지만. 이길거라고 이상야릇한 확신을 스스로 심었고, 심장박동이 느려지면서 경기를 어느정도 누그러진 평온한 상태에서 볼 수 있었다.
출발이 좋았고, 꺼내든 전략카드가 먹히는 것 같았다. 이에 상대는 빠르게 앞마당을 가져갔다. 내 머릿속에는 최근 경기들의 구도상, 다크나 리버 카드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이 두 장 다 거의 필패의 카드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트리플넥이라는, 그럴 이유가 하등 없는데, 고전적이다라고 느낀 필승의 카드를 꺼냈다. 이를 꺾으려면 오히려 상대가 필살의 카드가 한 장 더 필요해지는.
결국 풀세트 접전 끝에, 삼수생 송병구가 이겼다.
카메라가 그를 클로즈업했고, 분명 그 승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었다.
곧이어 팀원들이 터뜨려 준 샴페인에 젖어서 쏟아진 눈물이 가려졌지만, 굳이 가리고 싶어 가렸겠는가, 그 맑디 맑은 수정을...
명승부를 만들어준 두 승부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송병구 선수의 첫 개인리그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