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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11/02 13:43:57 |
Name |
happyend |
Subject |
역에 역에 역을 찌르고 |
1.
데뷔시즌부터 송병구선수의 트레이드마크는 '캐리어'였습니다.
그는 테란전에서는 가장 유연하게 최종병기 캐리어를 꺼내들줄 아는 선수였고, 저그전에서도 캐리어로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박카스배 결승,이영호선수와 만났을 때 '안티캐리어'빌드를 꺼내들겠다는 적장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이영호선수는 송병구의 캐리어에 번번히 그 꿈을 꺾였지만 곰티비 인비테이셔널 결승전에서 그 캐리어에게 종말을 알렸던 터라 바로 직후에 열린 박카스배 온게임넷 스타리그의 결승무대는 두 선수의 새로운 전략의 충돌로 커뮤니티를 달구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어린 이영호는 역에 역을 찌를 준비가 끝난 상태. 안티캐리어빌드에 대한 해법만을 고민하던 송병구는 캐리어 한대도 뽑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이영호선수는 '안티캐리어빌드'는 쓸 생각도 없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고,그제서야 전쟁의 패배와 왕국의 소멸을 목도한 송병구선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직후 벌어진 진영수선수와의 스킨스매치에서 송병구는 단 한대의 캐리어도 뽑지 않았고,캐리어빌드의 동반자인 리버도 뽑지 않은 채 템플러빌드만 고집합니다. 일회성 이벤트 대회이기도 했지만 망명한 왕자의 짙은 트라우마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왕국을 지키기 보다 어이없이 항복을 선택한 패기없는 백제 왕국의 마지막 황태자 부여 융.
송병구선수는 그 겁많은 태자 부여 융의 모습과 닮아있었습니다.
2.
흔히 그와 비교되었던 콩라인의 전설,홍진호 선수는 데뷔시즌을 화려하게 결승무대에서 보냈습니다.그의 상대는 스타판의 황제 임요환선수였고, 코카콜라배는 임요환을 위한 무대였습니다. 게임큐의 전설을 등에 업고 방송무대에 오른 임요환선수를 위해 온게임넷은 존재하는 듯하였습니다.
임요환의 결승상대는 꼬꼬마 홍진호선수.아이디 그대로 황색폭풍을 몰아치며 결승에 진출, 저그가 해볼 도리 없다는 맵에서 마지막까지 승부의 향방을 알 수 없게 하는 명승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후 반복된 그의 도전은 정상바로 앞에서 마지막 한발을 내딛기 위한 것이었을 뿐 송병구선수처럼 나락으로 떨어지길 거듭하며 부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홍진호선수가 한발만 내딛는데 더 어렵게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송병구선수처럼 새로시작할 기회를 가졌다면,홍진호선수의 운명은 달라졌을까요?
박카스배 결승무대에서 고배를 마시고,눈물을 흘릴 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이제 하늘은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저도 그랬습니다. 살다보면 사람에겐 정말 말도 안된다 싶은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한 번 놓치면 다시 오기 힘들고 두번,세번쯤 놓치면 다시는 더 높은 곳으로 갈 기회를 영영 잃게 됩니다.
인생을 반추해보건데, 송병구선수의 그 좌절은 그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써버린 것 같았습니다.이제 그에겐 빨간주머니도 파란주머니도 그리고 까만주머니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 후 그의 눈은 흥미를 잃어가는 사람의 모습,그대로였습니다. 게임은 평범해졌습니다. 한방싸움에서 한번밀리면 본진까지 쭈욱 밀려버리는 경기. 그리고 4드론 5드론의 덫에 걸려 예선탈락.
그에게 2006시즌의 악몽이 짙게 드리워져갔습니다.그리고 그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
저주와 저주가 꼬리를 문 기구한 운명들.역대 최강의 승률과 실력을 가지고도 최고의 선수들 틈에도 끼지 못하는 저주받은 강자의 비참한 커리어. 운을 다 써버렸을지도 모른다는 회한에 싸인 그의 모습은 겁먹은 왕자 부여 융의 귀국처럼 초라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여름이 다가오면서, 모든 것은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3.
그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송병구와 비슷한 좌절을 겪고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사라져갔거나 평범해져버렸습니다.
박경락,박지호,최인규,김정민,전태규,변은종,변형태,안기효,심소명....
그 명멸하는 이름가운데 비운의 강자,우승한번 못한 것만이 유일한 결점인 총사령관 송병구의 이름도 새겨질지도 모를 즈음.그는 기적과 같이 다시 일어섰습니다.WCG의 추억이 그를 불러일으켜세운 것일까요?그때 한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응원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해진 것일까요?송병구는 단숨에 전승을 달리며 국가대표에 올랐습니다.물론,준비 안 한 송병구는 허무하단 걸 보여주듯 이제동에게 참패를 했습니다만,그건 그다지 의미있는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그는 기적처럼 양대리그를 승승장구,유일한 양대리그 시드자가 되었습니다.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이 발걸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있었습니다. 깊은 침체에 빠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정치인에게 좌절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한자리에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송병구에게서 그들은 새로운 희망의 끈을 잡고 싶은것처럼...
도재욱과의 4강전이 끝나고 울려퍼진 굵직한 목소리
'송병구!송병구!송병구!'
그것은 벌써 몇번째일지 모르는 결승행 티켓을 받고 마냥 좋아라 하기만 했던 송병구를 각성시켰습니다.자신의 플레이가 가지는의미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에게 승리는 개인의 것이 아니란 걸 아는것.그것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있던 승부사의 본능을 일깨웠습니다.그렇게 그는 눈뜬자로서 결승무대를 밟았습니다.
4.
티원팀으로서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고 있었습니다.우승자의 대가 끊긴지 오래된 명문가는 깊은 침묵속에서 결승전을 맞아야 했습니다. 도재욱선수의 준우승으로 한번의 좌절을 더 맛본 후 티원은 다시 뭉쳤습니다. 김택용,도재욱,정명훈...이 새로운 도전자들은 어느때보다 강했습니다.
그들이 하나하나 송병구선수의 칼날에 쓰러져갈 때마다 심장을 베이는 듯 아픈 사람은 아마 최연성코치였을지도 모릅니다.그에게 송병구선수는 치욕을 주었던 거의 유일한 선수.선수로서 최연성은 마재윤,서지훈에게 약했을지 모르나 모멸감을 받아본 적은 없었습니다.
다시한번 기회를 얻은 정명훈선수를 위해 티원의 코치들은 긴급하게 김성제선수를 불러들였습니다.
(물론 이글은 작위성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를 부른 이유는 단 하나.'리버콘트롤'의 봉쇄를 위해서였습니다.
결승을 위해 티원의 벤치는 송병구선수의 무기를 하나하나 제압할 전략을 세웠습니다.캐리어...그리고 드라곤....그리고,리버.송병구선수는 리버와 드라곤으로 결승티켓을 손에 넣었습니다.
송병구를 제압하는 것,그것은 셔틀을 제압하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티원벤치는 리버에 대한 완벽한 해법을 찾기 위해 김성제선수를 특훈에 투입하는 강수를 선택합니다.모든것이 다 나빠졌을지 모르지만 김성제선수의 리버셔틀콘트롤은 아직도 명품중의 명품이었습니다.
김가을 감독은 송병구선수에게 당부합니다.
상대는 안티캐리어,안티리버전술을 쓸 것이 분명하다는 것과 역에 역에 역을 찔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언제나 실력면에서는 우승자 그 이상이었던 송병구선수였지만 이번 인크루트배 결승무대는 남달랐습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그리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새로운 도전자라고 자신을 다잡으며 코엑스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것은 어마어마한 팬들이었습니다.
언젠가,송병구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 쓸쓸하게 인텨뷰를 한적이 있습니다.마재윤선수 주위에 몰려드는 엄청난 팬들을 보니 부럽다고...
그는 프로토스라는것,준수한 외모,선한 인상,강력한 플레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팬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데뷔이후 명품플레이만 선보여온 그의 경기를 '재미없다'고 폄하하는 팬들도 많았고,김택용 선수의 화려함에 비교하며 안정되지만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송병구선수가 본좌의 자리에서 신의 경지에 등극한지 7일지난 마재윤선수를 이겨버렸다면 평가는 달라졌을까요?
올해의 프로토스상을 송병구선수가 받았을 때 게시판을 달구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습니다.송병구선수에게 팬집단이 존재해야할 이유가 생긴것이라고나 할까요? 동정심에서 시작했다 자신과 감정이입을 시작한 2인자들의 결집이라고 해야 할까요? 강자만이 독식하는 1등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일까요? 그에게 조금씩 조금씩 관심과 팬들이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다 송병구때문이다'로 시작된 이 열풍의 드라마는 코엑스 7000관중으로 절정을 이뤘습니다.화려한 플레이,강렬한 세레모니,본좌급 말빨도 없었지만 그는 바람을 몰고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손모아 다함께 염원했습니다. 이불운한 무관의 제왕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가혹한 운명의 여신의 마지막 시련을 넘어설 힘을 주기를...
5.
데뷔후 9시즌만의 우승.
네번째 결승진출만의 우승.
다른 곳에서라면 이런 기록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 세계에서 이 기록은 '불멸의 기록'이라느데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금쥐는 이미 두명의 선수가 가지고 있고,본좌의 명예는 네명이 나눠가졌습니다.
하지만,이 기록만은 아무도 나눠가지기 힘든 기록일 것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은 한 위대한 인간이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승리이후 제 귓속에는 그룹 아바의 'The winner takes it all'의 곡조가 맴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손아귀에 쥔 승리자인 것입니다.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의 우승을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하나둘셋,송병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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