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상문, 버티컬 리미트를 넘어
정설적으로 말하면 테란제국 황금기의 유일한 대항마였고 시대를 풍미하며 저그의 원수로 자리매김했던 폭풍 홍진호의 명성은 저그 부족 뿐만아니라 만민천하에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용감하고 담대했던 일대기를 한 무명의 작가가 총 22권으로 추려 집필한 『황신전』의 마지막 권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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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황신의 거처에 평소에 우애좋은 의형제인 플토국의 송씨가 문안차 찾아왔다. 황신께서는 송씨를 그 어느 프로토스보다 예뻐하셨기에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중략...)
"이보게 병구, 자네의 안색이 그닥 좋지 않아보이는구려. 3연벙이라도 당한게요?" 황신이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송씨에게 물었다.
"허허, 아니옵니다. 다만 얼마전 제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테란진영의 풋내기들을 손봐주기 위하여 북상(北上)한적이 있었는데, 갓 입관한 젖비린내 나는 녀석에게 방심하다가 그만 일격을 맞았사옵니다."
"저런 저런," 황신은 혀를 차며 송씨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어떻게 사령관인 자네가 그렇게 당하여 되겠는가!" 장군은 호탕한 웃음을 치며 송씨를 꾸짖었다.
"하지만 장군, 그 어린녀석의 솜씨는 무시할 바가 아니되오는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원팩 원스타 전술을 시전했습니다."
"원팩 원스타... 드랍쉽에 양부테란 말인가?" 송씨가 끄덕이자, 황신의 안색이 붉어졌다.
"그런 녀석이라면 내 친히 상대해보고 싶군."
"그러나 장군, 장군께서는 전장터에 나가보신지 꽤 오래되지 않으셨습니까." 송씨가 황신에게 대꾸하자, 황신은 그 자리에서 뭔가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병구, 자네는 아직 많이 부족하구려. 긴말말고 2주만 이몸을 주시해보게, 내 당장 그 녀석을 혼쭐내고 올테니."
황신은 웃으면서 남아있는 술통을 비웠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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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홍진호는 그 어린 풋내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며 가디언 + 히드라 조합으로 자신의 실력을 뽐냈으나, 후에 측근에게 "어린데 범상치 않다" 라는 표현을 썼다고 전해져있습니다. 어린데 범상치 않던 소년, 1년후 그 소년은 자신이 소속한 팀, 그러니까 그 만년 중위권이였던 팀을 광안리로 보내는데 일조했고, 지금은 어느덧 최종병기 이영호, 국본 정명훈과 함께 테란의 부흥을 책임질 에이스 카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신상문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약 05년부터 개인리그와 팀리그, 두 큰 리그로 나뉜 뒤로부터 개인리그가 낳은 스타가 있고, 프로리그가 낳은 스타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오영종, 마재윤, 김택용을 언급할수 있겠고, 후자로는 염보성, 이재호, 윤용태 등이 있겠지요. 단연컨데 신상문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신상문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것은 아무래도 전력상 열세에있던 소속팀을 광안리 결승행으로 진출시키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던 2008 신한은행 프로리그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플레이오프서 STX와 T1의 간판선수들이였던 김구현-도재욱을 꺾으며 그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집니다. 신상문의 연승행진은 광안리에서의 삼성칸과의 결승에서도 이어지는데, 1차전에서 차명환을 꺾으며 미디어데이에서 "밥"이라고 선언했던 삼성전자에게 선제타를 날립니다. 부스안에서 뛰어나와 이명근감독에게 포옹하던 신상문은 2008 최고의 신데렐라 반열에 등극하는듯 했습니다.
이때쯔음 사실 짚고 넘어가고 싶은것이 있는게, 여태까지 스타판의 가장 큰 위기가 찾아온 적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개인적으로는 2008년 봄-여름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그 원인은 밖과 안에서 골고루 찾아볼수 있는는데, 바깥의 정세를 얘기하자면 광우병 촛불파동이 있었고, 롯데의 활약에 고무된 프로야구의 흥행이 있었고, 박태환-야구대표팀을 필두로 한 올림픽에서의 한국팀의 선전도 함께했습니다. e-sports보다 더 흥미로운 일들의 연속이였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곳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의리와 사랑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이 있었으나, 08년의 여름은 그들을 열광시킬 그렇다할 이야기거리 하나 없었습니다. 이영호의 박카스 스타리그 이후 "택뱅리쌍"으로 알려진 네 선수는 아레나 MSL - 에버08의 주인공이 되질 못했고, 그런 강자들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박지수는 '리그 브레이커'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박지수 뿐만이였겠습니까. 본좌도 없고 절대강자도 없는 고갈된 사막에 사투를 버리던 선수들은 관심밖으로 떨어졌습니다.
인지조차 못한 그런 상황에서 신상문의 활약 또한 묻혀졌습니다. 설상가상, 그 해 여름 광안리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건 기적을 만들어냈던 스파키즈가 아니라, 절대 강자였던 삼성칸이였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1등은 2등보다 기억되기에, 관중들은 이성은의 세레모니를 신상문의 포옹보다 빨리 기억해냈고, 각성했던 신상문은 주목한번 제대로 못하고 묻히는 듯 했습니다. 허나 게임에서 경험치가 쌓이고 쌓여 다음레벨로 올라가듯이, 누군가의 위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하지만 그 결실을 맺는것은 한 순간입니다. 준우승으로 상심했을 신상문 역시 그 렙업의 순간이 찾아왔는데, 08~09 프로리그에서 8연승 전승을 기록하는 와중에 염보성을 꺾고 바투 스타리그에 진출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프로리그에서 그저 승률만 좋아 보였던 신상문을 마침내 관찰의 대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신상문의 행보에 대한 얘기는 잠시후에 더 짚어보기로 하고, 잠시 화제를 돌릴까 합니다. 누군가가 임요환과 이윤열, 그러니까 최연성 출현 이전의 테란의 모습을 그리워 한다면, 신상문의 경기를 볼것을 강력추천합니다. 신상문은 올드테란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양산형테란"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안전한 선수는 변화무쌍한 신상문입니다. 가장 간단한 예로, 박찬수와의 5판 3선승제에서 신상문이 사용했던 빌드의 내역입니다. 어느 한 빌드에 치우치지 않고 수많은 전략을 준비해왔음을 보여줍니다.
1경기 2스타 레이스
2경기 (5드론이였으나) 원팩벌쳐이후 메카닉으로 추정
3경기 원배럭 아카데미 패스트(이후 아카패) 이후 더블
4경기 투배럭 압박
5경기 원배럭 더블
투배럭, 혹은 원배럭 아카패등 02~03년에는 흔히 쓰였던 전략들이 왜 많이 쓰이지 않는걸까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테란들이 승리를 취하는 마인드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임요환이, 혹은 이윤열이 무대에 서면 그들이 세웠던 경기의 설정은 "나 가난해질께, 하지만 너도 가난해져"이거나, "내가 견제해서 너 가난하게 하는동안 난 물량 모을께"입니다. (저 공식은 kimera님의 소고를 인용하였습니다) 황제였든 천재였든, 일단 화두는 '가난'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서서히 무너지더니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견제에 대한 타 종족의 면역력이 강해졌고, 처음에는 임요환만이 할수 있던 궁극의 마린메딕 컨트롤이 상대방역시 경험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유닛컨트롤을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나"라고 생각하던 때마침 최연성이 제시한 더블커맨드는 경기들의 스케일을 키워주었고, 정착하다 보니 소수유닛으로 소수를 제압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의 전환 이후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은 "누가 더 많이 뽑고 잘 싸우냐"에 집중하였지, 초반의 변수는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기껏해야 저그의 땡히나 저글링 러쉬, 테란의 벙커링, 그리고 토스의 몰래건물 시리즈겠죠.
"정말 고민하지 않아도 될까?" 신상문은 물었습니다.
후반에 병력이 많아지고 신경써줘야 할 부분이 많아지면 난전이 생기는건 당연지사나, 초반부터 난전을 유도한다면? 아무래도 난전을 유도해가는 쪽이 주도권을 먼저 잡는것이 사실입니다. 싸움으로 비유하면 속칭 선빵을 날리는 놈이 유리하듯이 말이죠. 거기에, 프로게이머들의 멀티태스킹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결국엔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입니다. 예상범위 밖에서 공격이 들어왔을때, 게임내에서의 피해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흐트려 놓습니다. 신상문의 경기를 보면 역전이나 원사이드한 경기가 꽤나 많이 나오는데, 바로 상대방의 병력을 잃게 하기 전에 정신줄을 먼저 잘라 버려 판단의 착오를 유도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기로는 바투 16강전 vs 서기수경기가 있습니다)
정명훈과 신상문은 그에 따라서 굉장히 상반됩니다. 전편에 서 얘기했던 정명훈은 수비에 최적화 된 테란이기에 "니가 뭘 하든 난 내가 하는것만 하면 이겨"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지만, 신상문은 "내가 이걸 할테니 넌 니꺼 하지말고 이거해!" 라고 얘기하면서 상대방의 플레이를 강제시킵니다.
첫번째는 정명훈선수가 박찬수선수의 뮤짤을 대처하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진영을 전장으로 삼는것을 개의치 않듯, 발키리 컨트롤과 심시티로 상대방의 뮤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모습입니다. 영상초반에 해설자들이 "스커지 컨트롤과 뮤탈컨트롤 잘하면 저그가 이겨요" 라는 의심을 불식시키는 모습이죠.
반면 두번째는 먼저 칼을 빼든 신상문 선수를 볼수 있습니다. 메카닉에 대처하기 위해 선히드라-후뮤탈 빌드를 생각했을 법한 박찬수 선수는 상대방에게 견제를 당하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드론까지 동원해서 상대방의 입구를 뚫을려다가 경기를 그르칩니다.
그러나 정명훈이 바이오닉에 약점이 있듯, 신상문 역시 그 수비력에 문제점을 제시할수 있습니다. 박찬수와의 4강 카르타고에서의 4차전 및 신청풍명월에서의 5차전, 조일장과의 재경기에서 통한의 일격을 당했듯이 올인성러쉬에 꽤 허무하게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며 무너졌습니다. 수비력의 문제점은 사실 저그가 아니라 토스와의 경기에서 중요한데, 우리가 흔히 육룡이라고 불리우는 무림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견제로 득을 보는 선수들입니다. 최근의 신상문이 육룡급 토스에게 당했던 경기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견제가 막히거나, 혹은 상대의 견제를 막지 못해서 지는 두가지 패턴으로 나뉩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저 문장이 시사하는 바는 꽤나 큽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신상문이 스타리그 첫 진출의 제물로 삼았던 상대가 염보성이라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보성이 누굽니까. 프로리그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이자 두말할것 없는 MBC게임의 에이스 테란. 챌린지리그에서 강민을 꺾고 시드를 딸때부터, 테란진영이 적자로 찜해두었던 최초의 어린 괴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보성의 불운은 개인리그 8강진출을 불허했고, 결국 염보성의 개인리그에 대한 의지는 강제적으로 신상문에게 양도됩니다. 개인리그를 정복하는것이야 말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에, '프로리그가 낳은 스타' 신상문의 진짜 도전은 '프로리그가 낳은 장남'이였던 염보성을 꺾고 시작된 것이죠.
다행히도 신상문은 '염라인'의 의심을 떨쳐내고 로스트 사가 MSL에서 8강진출에 성공, 시드를 따냅니다. 그러나 8강이라는 산을 넘으니 신상문이 넘어야할것은 산도 아니고 세상에, 절벽, 그것도 얼음으로 된 절벽입니다. 그 어떤 테란이든 요리할수 있는 육룡의 존재는 테란에게는 악몽 그 자체입니다. 역상성의 입장에서 프로토스를 다전제에서 잡는다는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이제동이 있고, 이영호가 있습니다. 이 최정상급의 게이머들은 강제당하는 플레이에서도 최적화를 이루어 내고, 심리적으로도 흔들림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단단합니다. 신상문이 그 많은 프로게이머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농락해서 정상급 테란으로 자리잡았는데, 이제 최고가 되려 하니 또 다른 과제가 주워진 셈입니다. 만약 이 과제를 극복해내지 못한다면 신상문은 또 다른 신예에게 기회를 넘겨줘야 합니다. 마치 염보성이 겪고 있는 비극처럼 말이죠.
따라서 다음시즌을 준비하는 신상문을 바라보는 관전포인트는, 아무래도 "어떻게 리쌍-육룡을 넘을것인가"가 될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미 로스트사가 MSL에서 이영호를 다전제끝에 이겼기에 첫번째 시험대에서는 합격점을 줄수 있지만, 에이스 vs 에이스의 경기가 빈번했던 위너스리그에서 비교적 잠잠했던것을 봐도 아직 갈길은 분명히 놓여져 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을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안일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곧이 유지만 한다면 리쌍육룡은 커녕 의외의 복병에게 덜미를 잡힐수도 있습니다. 예측가능한 노출된 전략은 패배의 주범이니까요. 그러나 분명한것은, 프로리그 4라운드의 개막전 경기에서도 나왔듯이 신상문에게는 어느덧 강자의 여유도 생겨 왠만한 경기들은 굉장히 쉽게 이끌어내는 능력을 갖춘것 같습니다. 과연 자신의 '선공' 능력을 극대화 시켜서 강자들을 상대 할것인지, 약점을 보안하여 무결점의 테란으로 거듭날지는 시간이 얘기해줄 것입니다.
평범했던, 혹은 별 볼일 없었던 녀석이 어떠한 계기들로 인해 성장해나가고, 또 벽에 부딪치고, 아픔이 있었지만 그것을 견뎌내서 최후에는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감동의 스토리. 흔히들 "소년만화"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좌절해도 그것을 거울삼아 더 큰 그릇으로 일어납니다. 생긴것도 귀염상에 명랑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신상문에게 광안리의 준우승과 양대리그 탈락의 아픔은 마치 훗날의 영광을 위해 작가가 미리 그려놓은 복선과도 같아 보입니다. 절대 넘을수 없을것만 같은 수직한계점(Vertical Limit -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수직에서의 한계점을 이르는 등산용어)을 극복한다면, 그 절벽 넘어 보이는 경치는 다름아닌 신상문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해가 뜨는 장관일 것입니다.
To Be Continued...
p.s 신상문선수 관련글을 쓰는데 포모스 '양산형테란'님의 글들이 많은 도움이 됐음을 밝힙니다. 신상문선수의 스타일에 대해 궁금하신분은 한번 확인해보실 가치가 충분한 글입니다. (링크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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