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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06/26 23:32:47 |
Name |
몽땅패하는랜 |
Subject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故 기형도 '비가 2' 中
조치훈 걸작선 3권(고보리 케이지 저)의 첫대국 말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정상에서 물러서고 나서야 강함이 인정받는다. 조치훈은 집념과 초능력으로 이긴다고 말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무관이 되어서야 <그때의 조치훈은 강했다>라고 평가받는다. 사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승부세계에서는 으례 있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가, 슬퍼해야 하는가."
1. 이레디에트/플레이그/사이오닉 스톰 콤보
바둑은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실력에서 덤없이 백을 잡으면 상대편 흑번을 이기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자신의 착수는 상대에게 분석되고 상대의 대응수에 대한 대비책이 있어야 한다. 때문에 유단자의 바둑착수점은 대개 공수를 겸하거나 한수로 적어도 서너가지의 의미를 가진 착수를 하게 된다. 때문에 바둑은 국면에 관한 깊은 수읽기와 감각적 측면이 공존한다. 다만 최근 대부분의 국내기전이 속기(제한시간이 10분 정도인 빠른 대국)로 진행되면서 깊은 숙고 끝에 나오는 묘수, 호수를 보기 힘들어졌다. 순간적인 반응속도가 중요시된다.
반면 스타는 리얼타임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꾸미는 동안 동시에 상대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한다.
상대의 착수를 분석할 어느정도의 여유가 있는 바둑보다 스타는 분명 육체적인 반응속도를 중시하게 된다.
200대 200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자원은 필수적이다.
때문에 최근 많은 경기가 묻지마 더블을 기반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많은 자원을 획득하면서 마지막의 한방싸움을 준비한다.
그러는 와중에 상대편을 견제하면서 어떻게든 양적(물량), 질적(병력 공방업)의 우위를 가지려 애쓴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스타 경기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이윤열/최연성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오랫동안 정상권에서 밀려나 있는 듯 싶었던 프로토스 게이머들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임성춘-김동수-박정석-강민으로 이어지는 플토 영웅라인은 언제나 눈물터지는 고군분투였다)
저그를 도륙하는 김택용 선수, 테란전-플토전 사기유닛이었던 송병구 선수, 그리고 김구현, 허영무, 도재욱이라는 앞 두 선수의 장점만을 흡수한듯한 후계자들.
그들은 김동수 선수로 대표되는 전략형 플토보다는 물량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세한 동시 컨트롤(흔히 멀티 태스킹)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벌써 김택용-송병구로 대표되던 플토 강자 라인은 2007년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이런 문구를 쓴 적이 있다.
"프로게이머들의 세계에서는 1년이라는 기간이 마치 10년 세월처럼 느껴진다."라는 글이었다.
그 어떤 선수들도 그들의 최전성기는 일년여를 넘기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이윤열 선수의 해마다 스타리그 우승하기 기록(02-03의 파나소닉,04-05의 아이옵스,그리고 신한은행 2차)이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영호 선수에게 열광하고, 이제동 선수에게 환호하며, 도재욱 선수에게 기대를 보내는 팬들을 바라보는 올드선수팬들의 기분은 어떨까.
아쉬움일지, 서글픔일지는 함부로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
연패모드 발동중인 임요환 선수에게 환장하고, 입대를 앞두고 있는 홍진호 선수에게 속이 터질 것이다. 팀플에서 간간히 모습을 보이는 박정석 선수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야? 당신은 최강이었잖아.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모두들 두려워하던 당신의 모습. 그건 다 어디간 거야?"
얼마전 9회말에 속터지게 역전패당한 엘지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이레디에트 걸리고 플레이그와 사이오닉 스톰 콤보를 맞은 듯한 심정이었다.
응원하는 선수의 부진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2. 하지만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2008시즌이 시작하면서 가장 어색했던 것은 최연성/박용욱 코치의 정장차림이었다.
여전히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처럼 흥분하는 모습에서 떠난 사람의 쓸쓸한 그림자를 보는 것은 감정의 사치일까?
한때 정열을 쏟으며 응원하던 선수였지만 그들은 더이상 게임부스에 앉지 않는(못한)다.
추억은 희미해지고 기억은 사라져간다. 지난 날, 땀 뻘뻘 흘리며 메가웹과 세중게임월드에서 자신들의 영웅들을 응원하던 이들에게
지금의 스타리그/프로리그는, 그리고 최근 상한가를 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냥 일상의 한 조각으로 별 다른 생각없이 마우스로 스크롤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까.
아니면 잠깐 입술을 깨물거나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들의 영웅을 떠올릴까.
한때를, 한시대를 장식했던 영웅들의 팬이기에 행복했던 지난 날만큼 승리의 기쁨보다는 패배의 GG를 더많이 쳐야하는 지금의 모습들은 아픔을 넘어 서글픔으로, 서러움으로 번질지도 모르겠다.
EMP쇽웨이브에 응원마나가 날아가고, 다크스웜같은 패배에 눈앞이 아득해지고, 마엘스트롬 맞은 듯 발걸음이 멈추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떠랴.
달이 차면 기울듯, 흥망성쇠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냉혹한, 그리고 어김없는 순리인 것이다.
어설픈 임팬으로서 이젠 그의 잦은 패배는 아프지만 흉터로 남진 않는다.(역시 그는 팬마저도 강하게 만든다-_-;;;;;)
그저 살아 있으라, 누구든, 어떻게든 살아 있으라.
젊은 시절을 모두 반납해야 했던 그 세계, 갈수록 괴물같은 신예들이 득시글거리는 그 약육강식의 정글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있으라.
가장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실패를 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막장 소리를 듣고, OME 게임 대량 생산자라는 오명을 듣게 되더라도
팬들이 당신들을 버릴 수 없도록, 게임단에서 당신들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1. 뜬금없지만 에버스타리그에서 박성준 선수의 분전을 기대하며(어라?????)
2. 본의아니게 평어체로 글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읽는 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3. 밤이 깊어서 글이 너무 감상적으로 쓰여졌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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