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의 경지라는 말이 있다. 여기저기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말이고 그 사용만큼이나 많은 해석이 가능하지만 무도(武道)에서 사용되는 의미는 일종의 극한을 나타낸다. 원래 무도는 사람과 사람의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실질적인 활용이나 목적은 그런 용도로 사용되곤 하지만 어쨌든 진정한 목표는 사람의 육체를 뛰어넘어 자연과 일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때 시간과 공간이 모두 한 사람에게 동화가 되어 순간이 무한처럼 느껴지고 무한이 순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그런 경지에서 인간의 공격이 통할 리 만무. 아무리 강하고 날카로운 공격이라고 해도 이런 상태에 오른 사람에게는 그저 느긋한 정지 화면으로 보일 뿐이다. 실로 반신반인의 경지라 할 만한 순간. 그런 상황에서 무도인은 일종의 해탈감마저 느낀다고 한다.
......이렇게 말해봤자 조우렌은 무도는커녕 건강용 길거리 태극권 하나 해본 적이 없었기에 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지식들도 대부분 무협지와 같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매체들을 통해서 얻었던 것이기도 하니. 하지만 그는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부정할 수 없었다. 무도인으로 느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순간이었다. 어떻게 찾아왔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간 기억. 하지만 그럼에도 잊어버리기에는 그 순간이 너무 깊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무도에서 말하는 무의 경지보다 더 수준이 높았을 수도 있다. 한없이 느려진 것은 상대의 주먹 정도가 아니라 수십 기의 유닛들이었으니까. 상대의 운영에 완전히 말려버렸던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돌을 던진다는 의미로 붙었던 최후의 교전. 하지만 병력과 병력이 맞부딪치는 그 때 그 순간은 찾아왔다. 자신의 유닛은 물론 상대의 유닛들의 동작까지 하나하나 극도로 속도를 낮춘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심지어는 영웅들이 스킬을 사용하는 세세한 움직임마저 그의 눈동자에 선명히 비쳐졌다. 마치 온 세상이 정지한 상황에서 오직 자신의 손만이 움직이는 것 같은 광경. 그건 일종의 황홀경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는 그 느낌을 살리려는 듯이 무의식중에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을까.’
원인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극도의 집중력, 정말 뇌의 성능을 모두 쥐어 짜내는 듯한 그런 집중력이 그런 마법을 부렸던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리플레이를 반복해서 보더라도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같은 사람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시도해보는 방법이 좋겠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어서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1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세상에는 고수도 많고 아직 자신은 리허를 제외하면 그들 중 대부분을 만나지 못하지 않았는가. 상대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들을 상대하는 자신 역시 더욱 더 게임에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실력이 늘어나면 다시 그 느낌을 손에 얻을 수 있는 확률은 더욱 늘어나겠지. 어쩌면 그 상대를 직접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그는 허공에 움직이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보기에는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이곳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고요. 그리고 1년 동안 저는 그걸 쌓아왔고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쉽게 버릴 수는 없다고요.]
[알았다.]
[네?]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지만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던 식사시간이 끝난 후에, 질질 끌 것 없이 뭔가 결론을 짓겠다는 각오로 아버지와 1:1 대면을 했던 조우렌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간결한 대답에 놀라움을 넘어 황당함까지 느꼈다.
[알았다고 했다.]
[네.....네?]
그의 아버지, 조우윤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그래. 1년의 기간을 주마. 그 안에 내가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 다오. 그러면 그 후에도 너의 의지를 인정해주마.]
아아, 그래.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어. 조우렌은 반복해서 보던 리플레이를 잠시 멈춰두고 힘껏 기지개를 폈다. 차라리 마음이 홀가분했다. 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그동안 거의 연을 끊었다 시피 했던 사이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은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자자! 짜요짜요!’
그는 마음속으로 힘차게 외쳤다.
“아자!”
각양각색의 음향들이 휘몰아치며 귀를 자극하는 가운데서도 민혜의 짧은 기합소리는 진희에게 똑똑히 들렸다. 팀플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배틀넷을 시작하자마자 내리 3연승을 거둔 것이었으니 기쁠 만도 할 것이다. 간혹 가다 고수급의 선수들 중에는 자신의 플레이, 혹은 그에 대응하는 상대의 플레이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고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자들도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상대와 경쟁을 하는 형식의 게임에서 승리만큼 동기유발을 지속하는 촉진제는 없으니까.
‘그건 그래도 예상외인 걸.’
따스한 여름 태양에 취해서 멋대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민혜가 심히 내성적이고 수줍은 많이 타는 성격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몇 번 만나는 동안 그녀는 유별나게 낯을 가린다던가, 세상물정 모를 정도의 천연계 성격이 아니란 점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적당히 발랄하고 적당히 얌전한 소녀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장소가 장소였으니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소극적인 학생이었다면 리그에 출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직접 다가와 그렇게 부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의외로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일지도.’
그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연을 열외로 놓는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쳐지나가는 인연 이상의 여성을 알고 지낸 적이 없어 그다지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어찌되었든 그의 판단으로 민혜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진희는 의문을 느꼈다. 그에게는 워3란 게임이 무척이나 재밌고 미친 듯이 몰입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평범한 여고생이 호기심 하나로 배울 정도로 대중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라면 어느 정도 안정화에 들어갔게다 텔레비전과 신문,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기에 역시 흔하지는 않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선배?”
“응?”
그제야 멍하게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자신이 민혜의 얼굴을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는, 엉터리 만화주인공이나 할 만한 멍청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와, 볼 뜨거워라. 가연에게도 이렇게 쭉 쳐다본 적은 없었는데.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그게, 3게임이나 했는데 안 피곤해?”
어설프게 꺼내든 말 돌리기. 통한 것인지, 아니면 통한 척 해준 것인지는 구별가지 않았지만 민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응수를 해주었다.
“아니요, 계속 이겨서인지 몰라도 재밌기만 한데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뭐, 선배가 다 만들어주고 전 한 것도 없지만요.”
“아니야, 난 상대에 맞춰서 적당히 했을 뿐이라고. 아마 다른 사람에게 처음 하는 거라고 말하면 믿지 않을 거야.”
민혜는 살짝 웃었고, 진희는 그 웃음 속에 ‘기분 좋으라고 하는 빈말인 것은 뻔히 알지만 그래도 기대에는 부응할 수는 있을 것 같다’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억울함을 느꼈다. 방금 그가 한 말은 기분 좋으라고 한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의 감각은 뛰어난 편이었다. 흔히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게임에 대한 센스 자체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그가 만난 두 명의 여성은 그런 선입견에서 꽤나 벗어난 듯 보였다.
“아니, 정말이야. 우리 길드 신입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인걸. 봐라, 이제 갓 게임 시작한 사람도 이 정도로 한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잡히고 말거다.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지.”
웃음은 조금 더 커져서 단순한 미소에서 청량한 웃음소리로 번져갔다.
“어쨌든 고마워요.”
어쨌든, 이 아니라니까. 진희는 다시 한 번 언급을 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만을 낼 것 같아 말을 멈추었다. 사실 초보가 갑자기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가벼운 농담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면 원래 목적은 달성한 것이니. 어쨌든 그녀가 본격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프로게이머의 길을 가게 만들 생각은 없었으니까. 한 청년이 소질이 있는 평범한 여고생을 이끌어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는다는 스토리는 상상력 빈곤한 소설가나 써먹을 법한 이야기이고, 현실에서 공부 잘하고 있는 한 소녀에게 대입하기에는 오히려 미안할 정도로 뻔뻔한 내용일 것이다.
‘게임은 즐기는 것, 이것이 대명제겠지.’
진희는 쾌할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럼 한 판 더 할까?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하고.”
“선배는 안 피곤해요?”
“내가 피곤하면 큰일이지. 매일 몇 판을 하는데. 오히려 가벼운 마음에 즐길 수 있어서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아......왜 그래?”
“......정말로 피곤하거나 하지 않는다면......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부탁?”
“네. 선배의 플레이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요. 1:1을 하는 모습을요.”
“뭐야, 겨우 그 정도가지고 머뭇거린 거야? 그런 부탁을 할 때는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난 워3를 하는 게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니까. 뭐, 아직 프로라고 부르기에는 못 미치는 부분이 많지만.”
진희는 살짝 웃었다. 무엇보다 이미 길드에서 철없는 소년들에게 비슷한 부탁을 몇 번 받은 사람에게 여고생의 그런 부탁에 고려 같은 것은 사치일 것이다.
“고마워요.”
“됐어, 됐어. 그나저나 갑자기 왜 구경을 하고 싶다는 거야.”
“고수들의 플레이를 직접 보는 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품는 생각이잖아요. 코엑스까지 갈 시간도 변변치 않고 요즘에는 워3리그도 열리지 않으니 이런 기회가 자주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흐음, 실망해도 책임 안 진다.”
곧바로 현재 연락이 될 만한 길드원들에게 부탁을 하려 했던 진희는 잠시 생각 끝에 핸드폰을 놓았다. 길드에는 어렵지 않게 한 판을 부탁할 연령과 실력의 길드원들은 몇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승패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연습을 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다. 그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레더 서치 버튼을 눌렀고 그 시스템이 어떤 적당한 레벨의 상대를 찾아 골랐을 때까지 민혜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냥 아무나 연락할 것 그랬다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거 장난이 아닌걸.’
진희는 여유로운 표정이 싹 가신 상태로 입술을 살며시 물었다. 고수와 중수, 그리고 초고수를 가르는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아니다. 제3자가 봤을 때 저게 그렇게 중요할까 싶은 움직임들이 모여서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영웅과 영웅이 교차하는 첫 만남에서 파시어와 스피릿 울프의 움직임을 본 그는 그 사소한 ‘차이’를 상대가 지니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비록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게임을 플레이하고 분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렙이 렙인 만큼 양민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옵션 창을 열어 아이디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일단 상대를 파악하면 좀 더 대응하기는 쉬워지니까. 하지만 그는 그런 간절한 욕구에도 쉽게 마우스를 옮기지 못했다. 그럴 겨를이 없을 정도로 초반 견제가 심하고 격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잠깐의 행동으로 집중력이 흩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상황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스스로 놀랄 정도의 대응을 착착 해나가고 있었다. 그도 남자인 만큼 어느 정도 허영심이 있고 여자가 보는 앞에서 잘난 척 좀 하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연이와 함께 했던 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 익숙해 진 것일지도, 아니면 단지 생각보다 자신이 시합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편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최근에 느끼지 못했던 그런 집중력을 우연히 하게 된 이 배틀넷에서의 한 판에서 느낀다는 점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화면에 몰두했다. 승부를 길게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따라가고 있다고는 해도 그 차이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벌어질 것이 보였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게임과 분선으로 모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재빨리 손익계산서의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리고 서서히 타이밍을 잡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지만 간신히 흑자가 예상되는 그 짧은 순간을.
천천히, 하지만 빠르게 그 시간이 다가왔다.
[조우렌! 간식거리나 사러 가자.]
오후 연습이 끝나고 찾아온 휴식시간. 매니저와 대부분의 선수들은 에어컨 바람이 잘 들어오는 목을 찾아 TV를 본다던가, 책을 본다던가, 인터넷을 하는 등 각각의 취미를 엿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그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는 평을 내리기에는 연습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인터넷회선과 남은 미련마저 증발시키는 더위의 콤비네이션을 먼저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조우렌만은 홀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연습실에서 연습을 계속할 경우에는 자신도 좀 눈치 보이고 다른 선수들도 눈치 보인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오늘 하루뿐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매니저는 드디어 제대로 정신 차렸다고 흐뭇해했고 그건 그도 찬성이었지만 리허는 살짝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고 그에 따라 실력이 붙어주는 것도 좋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 너무 무리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컸다.
‘설마 코피 흘리며 뻗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 역효과에는 체력 저하라는 효과도 포함되었기에 답변이 없는 상황에서 리허의 상상을 어처구니없는 수준이라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추측의 범주일뿐 희망사항은 아니었기에 방에서 조우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을 때 그는 실망하지는 않았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고 리플레이 역시 정지 버튼으로 멈춰져 있는 상황, 더욱이 의자 옆에 있는 선풍기도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추가적인 정보로 인해 리허는 좀 더 확률이 높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갔나보군. 더워서 머리에 물이라도 끼얹던가.’
직업이 워3게이머인지라 머릿속으로 조우렌의 행방에 대한 간결한 결론을 내린 그는 곧바로 관심을 모니터 상의 화면으로 옮겼다. 리플레이는 언데드와 오크의 전투가 일어나려는 부분에서 멈춰졌다. 아무래도 하이라이트 부분을 앞두고 신경쓸만한 일들을 모두 처리하려는 생각인 듯. 그는 잠시 가상의 조우렌에게 사과를 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리플레이 표시가 막바지에 몰려있는 만큼 전세는 누가 봐도 이미 기운 상태였다. 병력 역시 언데드가 쉽게 승리를 따낼만한 규모였고. 무난한 승리. 언데드 유저인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교전이 시작되자 그는 자신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나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나오는 결론은 똑같았다. 그리고 화면은 계속 그 결론을 배반해 나갔다.
언데드가 딱히 실수한 부분은 없었다. 오히려 진형 설정이나 타겟 설정은 상당히 깔끔한 수준으로 실력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오크의 컨트롤은 그것을 능가했다. 불리한 병력임에도 자신의 어떤 유닛이 공격을 받는지, 혹은 상대가 어떤 유닛을 움직이려하는지를 미리 한 단계 빨리 예측이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평상시 속도라면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반응들. 그는 리플레이가 이미 최고 저속으로 맞춰놨다는 것에 가상의 조우렌을 상대로 감사 표시를 했다.
잠시 후, 리플레이는 끝났다. 그 엄청난 전투가 기울어진 승패의 추를 뒤집어 놓지는 못했다. 전투 자체는 열세를 뒤집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미 판 자체가 너무 쏠려있었다. 자원의 차이는 그대로 유닛의 질적-양적 차이로 다시금 바뀌었고 상대만큼의 추가병력을 생산하지 못했던 오크는 결국 곧바로 패배를 인정하였다. 그는 화면에 뜬 점수창을 잠시 바라보면서 방금 전의 교전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했다. 오크의 움직임을 되돌리며 자신이라면 어떻게 대응을 했을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지를.
그래서 조우렌의 말에 조금 느리게 반응했다.
[리허 씨?]
[아, 왔네.]
그의 예상처럼 조우렌은 더위를 잠시 식힐 생각으로 나갔던 듯 했다. 아직 머리에 물기가 다 없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들어온 것을 보면.
[기다리면서 리플레이 좀 봤다. 그나저나 실력이 이렇게 늘었는지 몰랐는데? 마지막 교전은 정말 놀랬어.]
그의 말에 조우렌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칭찬을 해준 것이지 기분이 좋을만하다, 정도로 단순하게 그 미소를 받아들이려던 리허는 뭔가 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느꼈다.
[별로 안 늘었어요.]
[응? 뭐, 결국 지긴 했으니 그렇게 반응할 만도 하지만.]
그 미소가 조금 더 강해졌다.
[그거, 옛날 거에요. 한 1년 반 정도 전?]
[어이, 그 정도 전이면 너 팀에 합류하기도 전이잖아.]
[그렇죠.]
리허는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점수창에 기록된 오크의 아이디는 조우렌이 아마추어 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절의 그것이었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네? 그럼 일종의 ‘비장의 기보’ 정도 역할을 하는 리플레이인가. 아니, 그 이상일지도. 과거 버전의 리플레이를 보기 위해 워3를 두 개, 많게는 세 개 이상 깔아두는 선수들은 많이 알고 있지만 이정도로 오래된 버전을 깔아두는 선수는 본 적이 없었다. 최근의 패치는 자잘한 버그 수정과 맵 변경 정도로 그치지만 예전의 패치들은 밸런스를 변경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 그때의 리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전술과 테크트리는 이제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우렌은 오직 감상만을 위해 워3를 다시 하나 깔은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봐도 될까? 언데드의 실력도 수준급이던데.]
[네, 잘하는 사람이죠.]
[그래, 역시 언데드는 한국인이 잘한다니까.]
아무런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기에 리허는 조우렌이 그를 끌어안을 듯이 달려들자 매우 놀랐다. 물론 어느 상황이고 그런 반응을 보였으면 놀랐을 테지만. 다행이 조우렌은 그를 격렬하게 껴안지는 않았다. 바로 코앞에서 멈춰서 흥분된 목소리로 물어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아, 아니.]
변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갑자기 바뀐 태도에 리허는 살짝 당황했다. 나이가 나이니 종종 기분이 금세 왔다 갔다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흥분한 모습은 그가 이 팀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었다. 빨리 대답을 하지 않을 경우 멱살이라도 휘어잡을 것처럼 보이는 모습. 실제로도 그럴 기미가 보였기에 그는 얼른 대답을 했다.
[아이디가 한국어니 당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저 아이디가 한국어였단 말이에요?]
[뭐야, 그것도 몰랐던 거야.]
[스펠링이야 읽을 줄 알았지만 외국어라 뭔 뜻인지는 몰랐죠. 주위에 물어봐도 아는 사람도 없었고......]
하긴 가끔 잊어버리지만 아직 사회적 시선으로 봤을 때 조우렌은 어린이와 청소년 사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더욱이 드라마나 영화도 잘 안보는 편이니 한국 쪽에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을 것이고, 간단한 한국어라도 익혀둘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아이디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또 순식간에 바뀌었군. 좀 전까지 흥분한 상태였던 조우렌은 이제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상대의 아이디를. 그 모습은 동경하던 연예인을 직접 보게 된 사춘기 소녀의 모습과 비슷하였기에 리허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우리말로 바꾸면......‘란띠안(蓝天, 파란 하늘)’이 되겠네.]
1부 : Romance
1. Boy meet Girl
2. Boy meet Guy?
3. 남매
4. 데이트
5. 발을 내밀다
6. 예선 7일전
7. 끝과 시작
8. Log Bridge
9. 그리고
2부 : Daydreamer
prologue
1. new challenger
2. 각자의 이유
3. 한국으로
4. meet again
5. 한여름날 어느 복도
6. 東과 西
7. The Benissant
8. 교점(交點)
......점점 느려지고 있는 Daydreamer, 죽지는 않고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최저조회수 기록을 세웠군요~ 이로서 PgR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데 성공했습니다(쿨럭;;) 느려진 것에 변명은 아니지만(사실 한가했어요...) 제대 이후에 상상력이라는게 급속도로 하락하는게 느껴지네요. 누구는 나이를 먹으면서 글이 성숙해지는데 왜이리 머리가 굳어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렸을 적에는 잘 썼냐고 한다면 웃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