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른 사내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다 큰 사내가, 그것도 사방이 막힌 절진 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기괴했다.
현일과 현초는 이색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있다가 사내가 계속해서 다가오자 그제 서야 긴장하며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사내는 일 장 쯤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서더니 강퍅한 목소리로 외쳤다.
“소림에서 사람이 나온 것은 알고 있었으나 너무들 하는 것 아니오? 망가진 추혼절삭진(追魂切削陣)을 복구하려면 한 달은 걸린단 말이오.”
사내는 담벼락에 박힌 장창들로 다가가 박힌 자리를 살피더니 한층 더 우거지상이 되었다.
“보통이라면 창날이 떨어져 내리는 걸 피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라 기관을 설치할 때 일부러 바닥을 흙바닥으로 한거요. 장창들이 바닥에 박히면 창날만 교체하여 다시 재활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당신들은 창을 발사하는 장치가 숨겨져 있는 양 옆의 담벼락까지 망가뜨렸으니 복구할 생각이 막막하구려.”
말을 마친 사내는 우습게도 담벼락이 무너지랴 꺼이꺼이 통곡했다.
사내가 우는 모양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묵적이 조심스레 포권했다.
“손속을 과하게 써 귀하가 자랑하는 절진을 망가뜨린 것에 사과드립니다.”
지켜보던 현일과 현초는 묵적의 사과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자신들은 절진이 펼쳐져 있는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들어왔으나 소로에는 어떠한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었으므로 무림인이 아닌 일반인이 들어왔더라면 참사가 일어날 뻔했던 것이다.
아니, 무림인이라도 어지간한 절정고수가 아니고서는 영문도 모른 채 창영에 휩쓸려 크게 다치거나 죽고 말았을 것이다. 바로 방금 현초가 그런 상황에 놓였지 않았는가?
그러나 깡마른 사내는 묵적의 사과를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떨어진 파편을 줍고 담벼락이 부서진 자리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묵적이 재차 말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귀하의 웃는 모습이나 화난 모습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묵적의 말을 들은 사내의 손길이 멈췄다.
그러더니 사내의 시선이 묵적에게 강하게 박혔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소?”
묵적이 담담하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강호에 이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절진을 펴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다정한 절진이라... 재미있는 중이로군. 하지만 핵심을 짚었소. 확실히 내 기관은 침입자에게 자비로운 편이지.”
조금 전에 창에 꿰뚫려 죽을 뻔한 것도 모자라 절진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자신의 사숙을 아랫사람 보듯이 대하자 현초는 화가 치밀었다.
“이보시오! 우리는 석가장에 손님으로 온 것인데 악독한 장치로 목숨을 위협한 것도 모자라 우리의 상태 대신 장치의 안위를 더 신경 쓰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오?”
평소 같으면 현초를 제지했을 현일이었지만 이번 일에는 그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아직도 담벼락에 박혀있는 장창들을 보면 환상처럼 쏟아지던 창영들이 생각나 간담이 서늘했던 것이다.
사내는 현초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묵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 모습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현초는 다시 외쳤다.
“에라이! 당신 사람 그렇게 대하는 거 아니오.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소? 공경을 받을 만큼 나이가 들어보이지도 않는데 참 너무 하는 구려.”
실제로 사내의 나이는 기껏해야 삼십대 후반으로 보였다. 무림의 북두인 소림의 제자들과는 강호의 배분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을 만했다.
사내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대신 묵적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는 품새였다.
그 광경을 보고 화가 더 뻗친 현초가 한 번 더 외치려는 찰나, 사내의 입이 열리며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강호는 넓고 인물은 많아, 크크크!”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눈물범벅이던 사내의 얼굴은 어느새 활짝 피어있어 한없이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울던 사내는 이번에는 인세의 행복을 다 누리는 것처럼 만면에 열정이 가득했다.
그제 서야 현일은 퍼뜩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매순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네 가지 감정을 오가며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게 홍복을 선사하지만 재앙을 가져다주기도 한다는 괴인!
강호에 손꼽히는 기관진식의 달인인 감정택괴(感情擇怪) 곽진악(郭盡樂)이 바로 그였다.
세간에는 곽진악이 마치 조울증에 걸린 미친 사람처럼 알려져 있으나 실상 곽진악의 감정은 그 나름대로의 인과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의 감정은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며 그의 인생업(人生業)이라고 할 수 있는 기관진식과 관련하여 변화했다.
그가 기뻐 웃는 것은 기관에 걸린 사람들이 장치에 당하는 광경을 몰래 숨어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허나 그는 살인을 일삼는 자는 아니었으므로 꼭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관을 늦추어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을 살려주곤 했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기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곽진악이 살인 장치를 발동시켰다는 의미였다. 들어온 이를 살해하기 위해 진정으로 움직이는 곽진악의 기관은 강호에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이유는 물론 화가 난 곽진악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슬퍼하는 것은 기관이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연유로 묵적 일행이 곽진악과 조우했을 때 그는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그런 망가진 기관을 다시 복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절진을 구축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곽진악이었으므로 기관은 그의 천업(天業)과도 같은 일이었다.
곽진악은 행적이 분명치 않아 실제 만난 사람은 별로 없고 그가 남긴 기관들만이 악명이 자자할 따름이었는데 오늘 석가장의 좁은 돌담길에 나타난 것은 뜻밖이었다.
묵적이 다시 입을 뗐다.
“강호에 명성이 대단한 감정택괴가 석가장에 몸을 의탁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소만, 현재로서는 그렇지. 지금으로서는 석대본이 주는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소이다. 흐흐흐.”
현초의 말에는 들은 척도 안하던 곽진악이 묵적의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곽진악에게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나 묵적은 그가 천성이 나쁜 악인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다.
기실 곽진악은 허례허식을 하찮게 여기고 인의도덕을 우습게 아는 인물이었으나 그에게도 나름의 정의관(正意觀)과 신념이 있었다. 그 자신이 정한 선만큼은 넘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묵적은 그런 곽진악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꾸밈이 없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편으론 석가장 내에 거주하는 인물들 중 석가장의 영향력 바깥에 있는 유일한 인물을 목도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곽진악의 시선이 묵적에게서 다시 담장에 박힌 장창에게로 향했다.
“아주 철저하게 박살을 내놓았군. 내가 설마 소림사에서 온 중들에게까지 손을 쓸까봐 그랬소?”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사정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일과 현초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실 곽진악이 설계한 추혼절삭진의 무서운 점은 어디로 피하던 간에 날아오는 창 무더기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곽진악이 진법 안의 사람들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현초가 담장에 뛰어올랐을 때 일차로 날아오는 창우(槍雨)들을 피하더라도 이차로 양 담장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칼날들이 들이칠 터였다.
그런데 묵적은 한 번의 출수로 천장의 창우들을 모두 제거하는 동시에 양 담장으로 창 더미를 날려 정확하게 칼날을 발사하는 장치를 망가뜨린 것이었다.
곽진악이 혀를 내두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자꾸 사과할 필요 없소. 오히려 장치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점도 있으니까 말이오. 생각건대 장창을 떨어뜨리는 대신 커다란 철판을 통째로 떨어뜨리는 방법이 좋을 것 같소. 아예 피할 수도 없게, 쳐낼 수도 없게 말이오.”
몸을 피할 공간이 없는 좁은 소로의 천장에서 거대한 철판이 떨어진다면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절대적인 절진이 완성될 터였다.
곽진악의 말을 듣고 있는 현일과 현초의 안색이 변했다. 듣기 만해도 모골이 송연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묵적은 오히려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거기에 철판이 바닥에 달라붙기 바로 직전에 멈출 수 있는 장치까지 설계하신다면 감정택괴다운 다정한 절진이 완성되겠군요.”
한창 새로 만들 장치를 구상하고 있던 곽진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좋아, 좋아. 바로 착수해야겠군. 여기서 일다경 가량 더 걸어가면 오른편 돌담 하단에 비취빛 돌이 박혀 있소. 그 돌을 상하로 가볍게 움직이면 나갈 수 있는 통로가 나타날 터이니, 당신들은 이만 가보시오.”
그러나 묵적은 꿈쩍도 않은 채 드디어 소로에 들어온 본론을 꺼냈다.
“사실 저희는 한 가지 특수한 목적을 띄고 석가장에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에 미엽각(美獵閣)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곽진악은 코를 씰룩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미엽각은 석가장 내에서도 특히 귀빈을 위해 설계된 숙소로서 황궁을 제외하면 당금 무림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봐도 될 공간입니다. 아마도 직접 절진을 설계하신 분이시니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곽진악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으나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현일은 곽진악의 즐거워하는 표정이 또 다시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가 궁금한 점은 흉수가 어떻게 미엽각의 내실에 잠입할 수 있었는가 입니다. 흉수가 절진을 통과하려 시도했다면 분명 택괴께서는 흉수를 막았을 것입니다. 아예 사살했을 수도 있지요. 선사께서 변을 당하시던 그 날, 절진을 지나간 사람이 있습니까?”
말을 마치고 곽진악을 바라본 묵적은 그의 얼굴이 금시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했다.
곽진악은 쒸익쒸익 소리까지 내며 분기탱천한 모습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화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고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능대사가 돌아가시던 날 저녁, 내 절진에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렇다면 흉수는 절진을 통과하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미엽각에 침입했나 보군요. 석가장 내부의 인물이라면 절진을 지나갈 필요 없이 대로(大路)로 미엽각에 접근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곽진악의 콧김소리가 더욱 커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날 저녁, 내 절진에 갇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다만 신시가 지날 무렵 바람이 강하게 불어 기관이 심하게 흔들리길래 점검하러 나갔었지. 그런데 바로 얼마 후 미엽각에서 사람이 죽었다더군.
잠시 말을 멈춘 곽진악은 결코 원하지 않는 말을 하듯이 한 음절, 한 음절 씹어 먹듯이 내뱉었다.
“다시 말해 그날 저녁, 절진을 지나간 사람이 없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하오.”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누구보다 자신의 기관진식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바로 곽진악,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 곽진악이 자신의 절진이 무참하게 뚫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흉수가 절진을 지나갔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석가장에서 경비로 밥을 벌어먹는 책임자로서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곽진악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묵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공이 절정에 오른 자라면 곽진악의 절진을 돌파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곽진악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은밀하게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묵적은 문득 자신의 손에 땀이 차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스로를 믿고 이치에 맞게 상황을 따지면 세상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믿어온 그였지만 묵적은 자신의 신념에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죽음의 신의 짓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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