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의 스토리를 분석하고 파고 드는 글이 아닙니다. 영화도 딱 한 번 봤을 뿐이고요. 그저 한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지인과 나눌 법한 감상글입니다. 그래서 스포는 없도록 적었지만 혹시나 스포가 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겠습니다.)
- 어느 완벽주의 감독이 초대한 '기묘한 악몽 체험'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 곳에서 곡성을 본 후 '왜?' 또는 '어째서?'와 관련된 글과 말이 많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체험을 마친 후 영화 내내 느껴진 긴장감보다, 인과 관계 및 인간 관계로 말미암은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논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나 감독의 전작 [황해] 만큼은 아니지만 직관적으로 쉬이 플롯을 이해할 작품은 분명 아닙니다. 그렇다고 별 것 아닌 단순한 메시지를 일부러 어렵게 보이려고 문장의 단어 배열을 뒤섞어놓은 것 같은 연출 또한 아닙니다. 그저 스토리 해석의 자유도가 다소 있는 것 뿐입니다. 종교적으로 받아드려도 되고 인간 본성의 탐구로 느껴도 됩니다. 이것들과 완전히 다른 분석도 가능하고 단순한 스릴러로 지정해도 이상 없습니다. 곡성은 이렇게 높은 자유도 속에 피어나는 우리 안의 '의구심'을 통해 결과적으로 '공포감 서린 스릴'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어떤 '무서움'을 분명 갖고 있지만 호러물보다는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귀신에 관한 영화라는 것은 극 초반부에 이미 언급이 되고 그것들이 소위 공포물의 클리셰처럼 '관객들을 놀라게 만드는' 용도로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있냐 없냐로 씨름하게 만들고 무형의 정체로 공포감을 주었던 [알포인트] 와는 다릅니다. 보이지 않아서 오는 공포가 아닙니다. 보이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다른 여러 관계 내에서 이것이 어떻게, 또 어떤 이유로 작용하는지 미지수이기에 혼돈이 옵니다. 이 미지의 상태 속에서 헤매이는 모습을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고 관객 역시 그 혼란을 공포감으로써 곧이 곧대로 체험하게 됩니다.
- 여전히 유효한 연출, 그 연출을 이끌어 가는 '촬영'
연출자의 첫 작품 [추격자]에서 주인공이 순수한 악과 일대일 정면 승부로 부닥치는 과정을 그렸고, [황해]에선 '순수 악'과도 다름 없는 자신의 운명에 주인공이 어떻게 휩쓸리고 저항하는지를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은유법 없이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반면 이번 [곡성]은 우화 같은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악함과 대립각을 이룬다는 면은 전작과 닮았지만 캐릭터 설정과 전개 방식에 있어서 '다른 무언가를 비유한 건가?'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그렇습니다. 스토리 구성에 있어서는 분명 전작들과 다른 작법입니다. 반면 연출에 있어서는 [추격자], [황해]와 마찬가지로 독설 화법에 가까운 직설적 연출을 여전히 보여줍니다. 세간의 평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듯이 영화 후반이 될수록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정리하자면 '악함과 인간을 다룬 영화'란 부분, 묵직하게 파고드는 나홍진 고유의 연출이란 점에선 세 작품이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플롯 및 캐릭터 구성에 있어서는 [곡성]이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연출과 스토리 부분 외에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분야는 '촬영'입니다. 케이트 블랑쳇의 [블루 재스민]이 연기의 영화이고 로버트 드니로의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음악의 영화라고 (아주 거칠게) 비유한다면 이 영화는 저에게 '촬영의 영화'입니다. 날씨에 따라서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방법은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곡성]은 보다 더 분위기 세팅을 잘하고 있습니다. 빛의 밝기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며 아름다움, 행복, 의심, 긴장, 절망 등등을 주조합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는 '촬영에서 오는 메타포'로 이끌려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빛의 처리'는 주요하게 작용합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서도 연출자 이름 바로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촬영'이었단 점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 배우의 눈빛이 지닌 가치, 쿠니무라 준
연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죠. 한 마디로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곽도원' 원톱 체재를 우려했지만 무난히 자기 몫을 소화합니다. 다만 [곡성]의 중심은 주인공들의 연기가 아닌 '연출과 스토리'입니다. 즉 나 감독의 전작처럼 '주인공의 심적 변화 보여주기'를 중점에 두지 않았기에 곽도원이 마구 아우라를 뿜어내는 건 애초에 차단된 상태입니다. 황정민은 그간 과하게 노출됐던 자신의 연기를 완전히 탈피하진 못했지만 배역이 가져다 주는 신비로운 매력 덕분에 식상함이 덜합니다. 천우희는 전작 [손님]에서의 역할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연기를 뽐낼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 적은 시간 속에 함몰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빛이 나는 배우는 곽도원 딸 '효진'이라는 캐릭터와 쿠니무라 준입니다. '효진'이란 배역은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의 역할이 생각나지만 연기에 있어서 그보다 더 뛰어나게 다가옵니다. 당시 박소담의 배역보다 '효진' 캐릭터가 더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줘야 했고 연출의 도움을 [검은 사제들]의 그것보다 덜 받은 채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덕분입니다. [소원]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어린 배우 '이레' 못지 않은 멋진 여자 아이 배우가 또 등장한 느낌입니다. 일본 배우 쿠니무라 준은 적은 대사를 가지고 영화를 압도하는 힘을 지니며 연기합니다. 특히 처음 등장하는 시퀀스 속에서 보여주는 눈빛 연기는 가히 영화의 베스트와 다름 없습니다.
- 미스테리 함에 절로 나오는 '곡' 소리
이 문제작을 감상하면서 떠오르는 영화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먼저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와 [멀홀랜드 드라이브]인데 악몽 같은 공포를 체험한다는 면이 유사하나 그것을 극대화 할 때 사용하는 음향 효과 처리 부분에서 린치의 두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느껴집니다. 시골 마을 내 어리석고 무기력한 공권력을 이야기 하는 것은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차우], [뜨거운 녀석들] 등등 많은 영화들이 있음은 물론이고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이나 [혈의 누], 작년 개봉한 [손님] 처럼 시골 속 공포감을 소재로 하는 점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 강하게 생각났습니다. [열대병] 후반부에서 보여준 촬영 기법이나 음향 기법 뿐만 아니라 캐릭터 구성에 있어서도 두 영화는 꽤나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유사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싶으나 어쩌면 그것이 스포가 될 수 있기에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께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정의 한다면 '실존적 악몽 체험'이라 평하고 싶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데이빗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가 오롯이 악몽 속 공포를 다룬다면 [곡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가 구성한 세계가 온전히 실재라고 할 수도, 허무맹랑하게 가공된 거짓이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오는 미스테리 함이 영화를 지배합니다. 그 세계가 우리의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보기 역시 충분합니다. 이런 연유로 '실존적 악몽'이라는 역설적인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초반에 말했듯이 호러 요소 보다는 스릴러 요소가 더 많기에 생각보다 호러스럽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스릴 자체가 2시간 반 동안 온몸을 휘감고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연출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또한 영화가 끝난 후 몸의 긴장이 다 식기 전에 머릿속에서 '미스테리의 재구성'을 하느라 정신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게 어떤 의미일까 기지개를 키며 분석하는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께서는 그저 나홍진이 만든 미지의 세계 속 한 인물이 되어 그 공간을 마음 껏 보고 느끼시면 그만입니다. 그럼 좋은 '곡' 타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