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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6/02 13:21
마재윤 선수가 이성은 선수를 넘어서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앞으로 얼마든지 이성은 선수를 이길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마재윤 선수가 이성은 선수라는 트라우마를 넘어섰다 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상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혹은 상대의 약한 타이밍을 노려 상대를 이기는 것은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상대보다 절대적인 강함을 증명하는 것은 힘듭니다. 이긴자가, 살아남은자가 강하다는것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극복되리라 보이지는 않네요. 하지만 둘의 경기는 항상 기대가 됩니다.
09/06/02 15:19
3번글에 좋은 댓글이 많이 달렸더군요.
문학에 답이 있다면, 더없이 삭막할거라고 하신 율님의 댓글이 가장 와닿습니다. 우선적으로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소설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상처의 치유"입니다. 따옴표("")안의 말은 제말이라기 보단, 문학평론가의 진단인데, 하루키의 10년팬으로써 그의 문학을 좀더 간단히 말해야한다면, "무언가에 대한 상처와 그 치유"라고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의 밑바탕인 단편소설 빵가게재습격만을 두고 본다면, 첫습격때의 단순한 공복감(신체적)과, 재습격때의 복합적인 공복감(신체적, 플러스알파)의 미묘한 차이를, 마재윤 선수가 겪고있는 이성은-트라우마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습격때의 결과(기이한 체험)와, 재습격때의 결과(첫습격과는 다른 또다른 종류의 공복감, 일탈의 쾌감?)를 보더라도, 트라우마와 어울릴만한 그 무엇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빵가게를 처음 습격했을 때는 굶주림에 의한 육체적 공복감에 의한 것이지만, 얻은 것은 정신적 공복감이었습니다. (빵가게 사장의 행동, 주인공이 평생 듣게될 클래식 음악) 빵가게 재습에서의 동기와 결과는 좀 복합적입니다. 동기는 단순한 공복감(심야, 빈 냉장고)이었지만, 결과는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현실을 재확인하는 의미의 공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빵가게 습격의 기억, 같이 습격한 무리들, 클래식 음악이라면 어떤것이든 제목을 알만큼 익숙하지만, 그때의 클래식 음악은 없음.) 이런걸 트라우마라고 할수 있을까요?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과 연관짓자면, "1973년의 핀볼"의 주인공이 느끼는 상실감과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핀볼에 관한 즐거운 추억(친구와 개인 최고점수)때문에 다시 그 핀볼을 찾아 해매지만, 실물인 그 핀볼을 확인한 이후, 그의 상실감은 더욱 깊어지지요. 개인적으로 이 두 작품에 흐르는 상실감을 표현하자면, "시간이 주는 인간으로써 어찌할수 없는 상실감"이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루키 자신도 언급했다시피, "자신의 손을 떠난 작품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리되어, 또다른 "창조적 오독"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단순히 표피상에 드러난 "빵가게"와 "2번의 습격"이라는 사건만을 두고, 트라우마와 연관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키는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개똥벌레"라는 20쪽짜리 단편소설에서, "상실의 시대(혹은 노르웨이의 숲)"라는 대작이 나온 것은, 하루키 역시 자신의 글에 대한 "창조적 오독"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빵가게재습격으로도 "상실의 시대"에 버금가는 대작이 나오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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