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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8/12/24 12:57:59 |
Name |
skzl |
Subject |
이제동의 로망 |
2003년 쯤 되었던 것 같다. MSL에서 호들갑스럽게 예선 명경기라는 걸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토스와 저그전의 역사상 가장 멋진 승부가 나왔다고 해설자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 물 갔다고 평가받던 기욤패트리가 승부의 주인공이었다. 이창훈과 기욤패트리의 경기. 그 경기에서 기욤은 다크아칸의 마엘스톰을 써서 대규모의 저글링/울트라 조합을 녹이고 있었다. 캐논 밭에서 수비 중심으로 경기를 펼쳤던 기욤은 한 시간동안 펼쳐진 대 접전 끝에 이창훈을 제압하고 승리했다. 메이저, 아니 하다못해 마이너 방송 경기에서 조차 치러지지 않은 게임이어서, 명승부 역사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그 경기를 본 사람들이 받은 임팩트는 어마어마했다. 그 임팩트의 정체는 당대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다크 아칸’이라는 새로운 유닛의 발견 때문이다. 그날 이후 토스가 저그전에서 장기전으로 흐를 때 다크 아칸을 사용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다른 경기가 준 임팩트는 기욤이 보여준 그 경기의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스타크래프트 초기의 역사는 ‘유닛’ 발견의 역사였다. 9드론 저글링이 토스의 본진을 유린하는 것. 마린 한 마리가 러커를 잡아내는 것. 드랍십이 전장을 누비는 것. 메딕이 러커의 사정거리를 봉쇄하여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광속으로 로템 전장을 누비며 뮤탈리스트의 느린 기동력을 농락하는 벌처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순식간에 대여섯개의 락다운이 터지며 캐리어를 봉쇄하는 경기를 보면서 느낀 감동은 어떠한가. 새로운 유닛으로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낼 때마다 팬들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이 시대를 ‘로망’이라고 부른다. 이 로망의 시대에 주인공은 임요환이다. 테란의 모든 유닛에 대한 연구는 임요환에 의해 거의 끝이 났다고 할 수 있다.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으로 이어지는 본좌라인은. 임요환이 이루어낸 테란 유닛들에 대한 거의 완벽한 이해에 더불어 운영이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다른 종족에서 본좌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는 임요환과 같이 각 유닛의 특징을 다양하게 다양한 변화 추구한 게이머가 없었기 때문이다. 테란이 축복받은 이유는 임요환이란 천재 게이머가 초기 스타크래프트에서 ‘테란’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마재윤이 본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뮤탈뭉치기의 발견과 더불어 디파일러라는 유닛의 활용도가 극대화되었던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임요환이 저그유저였다면 오래전에 저그는 뮤탈뭉치기를 발견했을 것이란 생각을 가끔 한다. 임요환은 그런 사소한 버그 플레이도 놓쳐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토스는 강민이 발견한 수비형 프로토스 이후 오랜시간이 지나서야 김택용의 비수류등 더블넥의 정석이 자리 잡게 됨으로써, 본좌를 시도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임요환 이후에 이런 감동을 가장 많이 주었던 이는 강민이다. 조용호와의 경기에서 강민은 리버를 시즈탱크처럼 사용하며 조으기 전진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리버의 재발견. 발상의 전환. 이런 경기가 나올 때면 우리는 감동을 느낀다. 하지만 강민의 그 경기는 이미 자원상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던 경기였기 때문에, 정석으로 자리잡을수 있는 경기 패턴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유닛을 통한 전략의 연구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고도로 상향평준화된 지금의 프로게이머들은 조금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변화는 어렵다. 그래서 양산형 게임들이 출몰하게 된다. 스타일을 고집하다가, 변화를 시도하다가 경기에서 지는 것 보다. 조금 욕을 먹어가면서도 안정적으로 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욱 프로다운 면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정교해지지만, 그것은 같은 패턴의 가위바위보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반복되는 비슷한 패턴의 경기에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는 이유다.
어제 이제동이 퀸을 사용한 경기는. 더 이상 변화할 것 같지 않은 스타크래프트 판에서. 빌드와 운영 싸움이 승패를 가르는 오늘날의 스타크래프트 판에서. 초기 스타크래프트 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로망’을 발견했기 때문에 감동적인 경기였다. ‘입스타’라고 불리는 다양한 상상들이. 이제동이라는. 현존하는 최고의 저그 플레이어의 손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임요환이 마린 한 마리로 러커를 잡아내던 경기처럼. 퀸과 디파일러가 조합된 경기는 시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동의 경기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짜여진 빌드오더, 운영싸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장의 상황 속에서. 퀸이라는 유닛이 적절하게 활용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그것은 지난 10년 간 저그가 걸어온 경기의 패턴을 뒤집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임팩트로 다가오는 것이다. 모처럼 짜릿한 경기를 봤다.
퀸이 하나의 정석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직 많은 실험이 필요할 것이고,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임요환과 강민이 그랬듯, 이제동이 그 트렌드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뮤탈뭉치기를 서경종이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뮤탈뭉치기의 트렌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제동이 좋다. 비록 그가 지금은 본좌라인에서 조금 멀어진 듯 하지만, 매 경기 그가 만들어내는 이 ‘서늘한 감촉’이 나를 아주 즐겁게 한다. 나는 그가 계속해서 이겼으면 한다. 송병구와 김택용과 이영호에겐 미안하지만. 다음 본좌는. 이제동이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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