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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6/11/02 16:48:27
Name 그러려니
Subject 어느 부부이야기4



1999년 6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
'체육학과. 키170cm. 이름 XXX. XXXX호텔3시'

눈을 떠 보니 그렇게 몇자 적힌 종이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성화에 분위기만 맞추느라 벌써 몇번 선을 본 상태라 적당히 싫증이 나 있던 데다가 스스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기까지는 되도록 결혼을 미뤄야지 맘 먹고 있었던 탓에 슬슬 꼬리를 보이는 나를 늘 걱정스런 눈으로 보시던 어머니는 겉으론 내색 않으셨어도 꽤 애가 타셨으리라.
오죽하면 다 큰 아들 선 보라고 돈까지 놓고 가셨을까-_-
얼굴 보며 얘기하면 퇴짜놓을게 뻔하니 약속 먼저 떡 하니 잡아 종이만 던져 놓고 새벽부터 나가버리신 거다.

170이라니 무슨 키가 이리 큰가.
어머니 165, 큰누나 171, 작은 누나 168에 나까지 같이 서 있으면 집안이 꽉 찬다. 갑갑하다.
난 아담한 여자가 좋은데.
누워서 안으면 내 품 안으로 폭 들어오는 그런 여자 말이다*-_-*

약속장소에 20분 일찍 도착해 커피를 혼자 시켜먹고 앉아 있으려니 10분 정도 지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는 한 여자가 보인다.
키가 안 크다.
원피스 아래로 보이는 다리를 보니 체육학과인듯 싶기도 한데-_-; 아무리 봐도 170은 안된다.
안 쳐다본다. 기다리는 사람 있다는 거 내색하며 나 찾는 사람 아닌가 눈치 살피는거 바보같다.
그러고 있으려니 커피숍 아가씨가 알림판에 이름을 적어 딸그랑 거리며 사람을 찾고 있다.
내 이름인데.. 성이 좀 틀렸다.
대충 손을 들었다.
아까 원피스 그 여자다.
170이라더니 어떻게 된거지.
어쨌든 마주 앉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내 얼굴에 충격(?)을 좀 먹은 듯 하다.
정확히 내 눈 크기에.
그냥 그런 몇마디를 나누고 있으려니 슬슬 지루한 눈치다.

"나가죠"
"어디로요?"
"뭐 그냥 가 보죠"

주차장에 들어서자 BXX가 보인다.
그 쪽으로 걸어가자 여자도 같이 따라온다.
"내 차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며 발걸음을 훽 돌리자 깔깔대며 같이 몸을 훽 돌린다.
내 차를 보더니
"와 짚차다, 나 짚차 첨 타 보는데 으쌰"
하이힐을 신고 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무지하게 불안해 보인다.

토요일인데도 웬일인지 차가 하나도 안 막힌다.
내친 김에 교외로 달린다.
계속 안 막힌다.
날씨도 기차게 좋다.
흘러나오는 팝송도 따라 부른다. 앗싸 좋구나다.
드라이브 하면서 얘기를 나누니 그럭저럭 재미있다.
정처없이 달리니 옆에서 좀 들썩인다.
"저.. 어디 가시는 거에요?"
"모르겠는데요"
"...;;;"
모르겠다는 말에 기가 찬가 보다.
"어디든 다음에 보이는 카페 들어가죠"
"네.."

얼마 지나지 않으니 '어린왕자'라는 까페가 눈에 들어온다.
2층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는 하이힐을 신은 모습이 더욱 불안해 보인다.
'체육학과는 확실한가 보다. 근육이 좋아'

"저녁 이르게 먹죠"
"네.."

'왕자정식'

메뉴판을 보고 떠나가도록 웃는 내 모습을 별로 웃긴지 모르겠는데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왕자정식'이 안 웃기단 말이냐.

"체육학과라면서요?"
"네?? 심리학과인데요?"
키도 틀리고 전공도 틀리고 뭐냐 이거. 제대로 만나고 있긴 한거냐.

이런 저런 얘기가 끊일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언뜻 내 눈을 마주치더니 뭔가 의미심장한 느낌을 비친다.
번지점프 얘기를 꺼낸다.
자긴 그런 거 좋아한댄다.
아 그래요?
내친 김에 에버랜드에 가자고 했다.
그러잔다.
밥 먹고 30분이나 지났을까, 또 지루한 표정이다.

"가고 싶죠"
"네"
망설임도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여자들은 대충 '아니예요..' 하는데.
매력있다 이 여자.

돌아간다.
날씨 정말 좋다.
약간 파인 듯한 원피스가 신경 쓰이는지 자꾸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별로 보일 것도 없는 것 같은데-_-;

"날씨 정말 좋네요~"
"그러게요"

여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처음 오는 동네라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른다 했다.
되지도 않는(?) 손 동작으로 휘휘 길을 가르쳐 준다.

"뭐 어떻게든 가 지겠죠"

어떻게든 가다보니 나도 집에 도착했다.
침대에 휙 몸을 던진다.
그녀의 이름 세자를 천천히 읊어본다.
한번 더 읊는다.

.
.
.


여기까지가 부부라는 연을 맺어 7년째 같이 생활하고 있는, 결혼이란건 적어도 4~5년은 지나야 한다는 그 당시의 내 나름대로의 계획과 결심을 한 순간에 바꿔버린 사람과의 첫 만남이다.
본격적인 연애를 해 본 사람이라면,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때 첫만남에 대해 첫인상에 대해 지겹도록(아니 사실 하나도 지겹지 않지. 그것만큼 신비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이야기거리가 또 있을까) 얘기 나눠 봤으리라.

"오빠. 처음 그 호텔에 갔는데, 왜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으면 당연히 누가 들어올때 쳐다보게 되잖아. 근데 오빠는 커피잔만 보고 있더라고. 아닌가보다 하고 거기 한바퀴를 다 돌아도 아무도 없는거야. 근데 거기 아가씨가 이름 써 들고 도니까 오빠가 손을 들더라. 아 진짜 뭐냐고요"
그럼 나 선 보러 왔어요 팍팍 티 내리? 나 그렇게 안 급했다. 그날 억지로 나간 거라고.

"오빠 처음 봤을때 정말 아찔했지. 머리는 또 왜 그래. 양복을 입으려면 제대로 입던가 넥타이도 안 매고, 와이셔츠 단추는 풀어 헤치고, 그 안으로 보이는 날날이 같은 목걸이는 또 뭔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했다니까."
첫인상 안 좋았다는 말을 참 구구절절이도 한다.
머리는 말이다, 내가 전날 술을 좀 먹으면 잘 안 세워진단 말이다.
넥타이랑 와이셔츠는 더워서 좀 풀었다.
목걸이는 임마 나 혼자 멀리에서 공부한다고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 해 주신건데.
날날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호텔에서 나와서 차 타고 가는데 오빠 팝송 따라 불렀지? 아 진짜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뭐냐고요 유학한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고"
-_-;;; 그런게 아니란 말이다. 기분이 좋아서 불렀는데. 가지고 있는게 팝송밖에 없었다고.

"어딘지도 모르게 자꾸만 가는데 슬슬 불안한 거야. 아무리 소개로 만난 사람이라도 어디 끌고가서 미친짓 안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거야"
얘 뭐래니-_-

"왕자정식이 뭐가 웃기다고 그렇게 크게 웃었어?"
야 임마 네가 감각이 없는 거야 그런게 웃긴 거다-_-

"그래도 있잖아, 슬슬 할 얘기도 없고 재미도 없는데 금방금방 분위기 파악하고 자리 일어난 건 좋았어. 가고 싶냐고 물어 보는데 좀 당황스럽고 미안하긴 해도 정말 가고 싶었거든"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다는 말에 내가 매력을 느꼈구나-_-

"말 하는 것도 재밌고 센스도 있더라고. 시원시원하고 괜찮다.. 하는 순간에 오빠 눈이 또 떡 하고 보이는 거야. 저런 눈을 닮은 아이는 절대 낳을 수 없어 딱 그런 생각 들더라 푸하핫"
-_-;;;;;;;; 내 눈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볼거 다 본단 말이다.

"에버랜드는 왜 가자 그러냐고요 오늘로 땡이다 그러고 있었는데. 놀이기구 타는거 좋아한다는 소리에 바로 에버랜드 가자고 하는데 싫어요 할 수도 없고 아 진짜 "
타는거 좋아한다는데 그럼 멀뚱하니 가만 있으리.

"근데 오는 길에 날씨 정말 좋더라."
그게 많이 도움이 됐지.

"토요일인데 어떻게 차가 하나도 안 막혔지?"
내 말이.

"그리고 있잖아, 운전 하는 모습이 꽤 멋있더라고.
옆으로 보니까 눈 작은 건 잘 안 보이고 코가 꽤 생겼더라고"
내가 코는 좀 괜찮지.

"그리고..... 다리도 슬쩍 봤는데 늘씬하니 멋지더라고"
자식 은근히 응큼하기는*-_-* 내 다리가 좀 그렇다-_-v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어땠냐고 물어 보더라. 아욱 너무 못 생겼어~~ 눈이 단추구멍이야~~~!!!! 그러고 말았지 뭐"
너는 다리가 체육학과잖아 췟

.
.
.


햇수로 거의 10년이 다 돼가고 있는 내 아내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그려보고 있자면,
그런 식의 생각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결정적인 사람의 만남에는 뭔가 인연이란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인연이 있다 해도 운이라는게 맞지 않으면 또 될 일도 안 되는.

그날 호텔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가는 길이 늘 그렇던 대로 꽤나 막혔었다면 어땠을까.
어린왕자라는 까페의 '왕자정식'이 없었다면.
키며 전공이며, 내가 알고 있던대로의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번지점프 얘길 꺼내지 않았었다면.
날씨가 조금은 우중충한 날이었다면.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알아 어설프더라도 열심이었던 그녀의 길 설명을 못 들었더라면.
지나고 난 뒤에 끼워 맞추면 무슨 얘긴들 못하겠냐만,
그 날의 이런 저런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던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준 시작점이었던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두 사람과 같은 성격의 사람들은 워낙에 그날의 그런 저런 상황에서 서로 호감을 갖게 될 성향의 사람들은 혹 아니었을까 싶다.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이 그리 낭만적인 성격도 못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가지려고도 또 즐기지도 않지만,
차를 타고 어딘가를 지나가는 어느 날의 날씨가 무척 좋을 때면 꼭 한마디씩을 한다.
"야~ 날씨 무지하게 좋구나~~  우리 그 날도 날씨 장난 아니었지"
"맞어 맞어, 날씨 진짜 좋았지, 차도 하나도 안 막히고"
그렇게 또 각자가 그 날의 이것 저것을 되짚으며 잠시나마 추억에 잠기고,
그러고는 이내 서로를 쳐다보며
"제기랄"
하며 우리가 결국 결혼하게 된 결정적인 날일지도 모르는 그날을 원망(?)하며 또 찍고 까부는게 우리 부부의 생활이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꾸준히 스치는 생각이 있다.
가깝게는 이곳 피지알에 들러 결혼에 관한, 남녀에 관한 글을 읽고 있자면,
세월이 거꾸로 흘러 내가 지나왔던 것과 똑같은 상황에 다시 처해졌을때
또 똑같은 결정을 할 수 있겠니
라고 자문을 하게 될때가 있다.
그렇게 몇번씩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단 한번도 명쾌한 답변을 내린 적이 없다.
yes든 no든 그 어느 쪽으로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의 날씨가 너무나도 좋을 때면,
길이 막히겠다 싶었는데도 기분좋게 잘 달려질때면,
또 다시 그 날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떠올리며
그 날의 날씨가 좋았음에,
시원스럽게 잘 달려졌던 길에 어김없이 내심 고맙게 생각하게 되고,
또 앞으로도 의심없이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하긴 또 똑같은 결정을 할래 라는 전자의 경우는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에서 출발하는 생각이고,
날씨도 좋고 길도 뻥뻥 잘 뚫리는데 당연히 그로 인해 뻗치는 생각들에도 긍정적인 것들로만 가득차 지겠지.


뭐면 어떠랴.
기분 좋은 날에 그와 연결되는 기분 좋은 추억이 있음이 가슴 뿌듯하고,
그 기분 좋은 추억이 시작이 되어 이루어진 내 주위의 적지 않은 것들에 감사하고,
그 추억이 앞으로도 더 많은 것들을 잘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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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xian
06/11/02 16:51
수정 아이콘
추게로.
하늘바다
06/11/02 16:59
수정 아이콘
이런글 너무 좋아요 *^^*
구경플토
06/11/02 16:59
수정 아이콘
추게보다는...수필집 출판.
06/11/02 17:00
수정 아이콘
와아..정말 소설한편 읽는듯한 느낌..
추게로(2)
엘케인
06/11/02 17:19
수정 아이콘
너무 좋네요~
부들부들
06/11/02 17:22
수정 아이콘
아..부러워요ㅜㅜ
남자의로망은
06/11/02 17:22
수정 아이콘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다는 말에 내가 매력을 느꼈구나-_- 이부분에서 폭소를 ^^;
역시 여자들은 멋있게 운전하는 옆모습을 좋아하는군요;;
felblade
06/11/02 18:01
수정 아이콘
본인 이야기인가요? 4라고 써있는거 보니 아닌 것 같기두 하고..
그러려니
06/11/02 18:30
수정 아이콘
felblade님//
쿨럭.. 제 이야기 맞습니다. 어찌 어찌 하다보니 4번째 이야기가 됐네요. 1,2,3은 적당히(?) 이곳 저곳 게시판에 흩어져(?) 있습니다-_-;
뒷산신령
06/11/02 21:05
수정 아이콘
추게로...!!! 항상 감명 받으면서 읽고 있습니다...
필력이 정말.....많은 분들이 보시게 추게로 갔으면 해요..
06/11/03 02:26
수정 아이콘
추게로요.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런글이 조회수가 400이란게 아쉽네요. 더군다나 저도 처음 클릭했을땐 그 길이로 인해 그냥 스크롤내리고 다음글로 넘어갔었네요. -_-
그러려니
06/11/04 11:05
수정 아이콘
좋은 말씀 써 주신 분들 감사 드립니다.
아닌게 아니라 저 역시 길게 쓰는 것 안 좋아하고 긴 글 읽는 것도 안 좋아하는데 때가 때이니만큼 많이 주절거리게 됐네요..
의식하고 쓴 글은 아닌데 오늘이 우리 두 사람이 7년 전 결혼한 날입니다*-_-*
늘 그렇듯 계획하는게 아니라 정말 쓰고 싶은 생각이 들때 이야기를 읊어내는데 묘하게 시기가 그렇게 됐네요..
모르긴 몰라도 시기가 그래서 많이 주절거렸나 봅니다-_-;

뭐하러 이런 사적인 얘기를 올려 놓나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남녀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이곳 피지알이라 이런 내용의 글도 읽을만하다 하는 분들이 없지 않겠다 싶어 때때로 이야기를 풀어내곤 합니다.
게임게시판에서는 게임 얘기만 했으면 좋겠다는 분들도 있고, 일리가 있지만, 두세달에 한번 쓰는 꼴이라면 많은 분들에게 크게 실례가 아니겠다 생각되고, 또 게임 얘기를 하다보면 머리도 복잡하고 본의 아니게 기분이 상하게 되는 일도 있으니, 나 같은 사람 하나는 게임과 전혀 관련 없는 얘기를 해도 괜찮지 않나 싶어 끄적거립니다..
다른 에피소드라도 늘 제목이 같고 소제도 굳이 붙이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딱 읽고 싶어하는 분들만 읽었으면 하는게 제 입장에서는 송구스럽지 않으니까요. 조회수 낮은게 오히려 반갑습니다-_-;

작은 것으로부터 소박한 행복을 찾아 나가는 글, 그러면서도 억지스럽거나 미화되지 않은 느낌의 글로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그게 저란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알아 나가고 있는 결혼생활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_-;;


다들 좋은 하루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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