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픽션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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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바닥에 쓰러져 있다.
운 나쁘게도,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운이 좋을지도 모르게,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 그 때문에 바닥은 흙탕물 일색.
또 졌다.
또 패배했다.
또 다시, 이렇게 쓰러져 있다.
내가 질 리가 없는데, 난 항상 이겨왔는데, 난, 특별한 사람인데.
어째서, 왜, 이번에도, 저번에도, 또 그 저번에도───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난 처음부터 패배에 대한 큰 아픔없이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정확히는 나의 '시작'부터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큰 패배가 없었다고 해야겠지만.
그렇지. 내 '시작'은,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였으니까───그 사람에게 몇번이고 졌던 건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패배가 아니겠지.
그리고는 내가 처음으로 느낀 큰 패배의 아픔을 떠올렸다. 그 날도 지금과 같이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
패배.
그는 그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와 수도 없이 싸웠다. 그리고 싸운만큼 졌다.
그의 공격은 빨랐다. 무엇보다 빨랐고, 무엇보다 정확했으며 매서웠고, 단지 강했다. 내가 하는 공격은 번번히 막히기 일쑤 였지만 그가 하는 공격은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지극히 급소만을 노리는 느낌이었다. 제 3자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나는 화려한 어떤 것에 질질 끌려다니는 떨거지로 보일 수 있을 만큼, 예상 밖의 공격을 그는 계속 했다.
내가 몇번 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어 보지도 않았고 세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도 셀 정신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연성이라는 인간이 몇번이나 연달아서 지고, 또 그것이 한 사람에게만 졌다는 것을 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순전히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일까.
둘 중 어떤 것이든 확실한 건, 그와의 싸움은 지극히 일방적이었고 내게 있어 충격적이었다.
똑같은 상대에게 얼마나 많이 졌을 때일까. 벌써 몇번이나 쓰러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그가 누군인가에 의문이 생겼다. 나를 이긴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에 대해.
하지만 내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보다, 그쪽에서 나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빨랐다.
「너, 따라와라.」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취한 적의 없는 제스처. 그리고 처음으로 한 말. 그리고 처음으로 보였던 뒷모습.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마치 그의 등에 이끌리는 것처럼 내 몸이 스스로 그의 등을 따라 걸어갔다.
그 때의 내 마음 속은 처음으로 나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 사나이에 대한 생각에 혼란해 있었다.
존경, 증오, 기대, 나에 대한 회한이나 책망, 미움. 그리고 어쩌면, 살의, 가 있었을지도.
그가 나를 왜 따라오라고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나를 완전히 죽일지도 모르고, 어딘가에 가둬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혼란 안에서 '존경' 이라는 감정이 그를 따르게 한 게 아닐까. 아니, 존경심을 제외한 다른 감정들은 내 자존심이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몰랐다. 날 이기는 상대는 있을 리 없어. 저 자를 인정할 수 없다, 라고.
그 동안, 이윽고 어떤 건물 앞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안에 들어가면, 내 말에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 그것만 지킨다면 내가 너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해주지.」
그는 나에게서 대답을 받아내려는 듯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왜인지, 입으로 말을 하는 게 수치스럽다고 느껴져서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걸로 만족한 듯 그는 다시 건물 쪽을 바라보고 선다. 보이는 건 두번째로 보는 뒷모습과 중간 크기의 1층 주택의 현관문이었다. 그가 벨을 누르고 무언가를 작게 말하자 문이 열렸다. 이번엔 따라오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문이 금방 닫히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급하게 뛰다시피 들어갔다.
거의 평범한 집이었다. 내 생각으로, 이런 사람이 겨우 여기서 산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짧은 머리에, 넓은 이마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한 남자의 방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지금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을 흥미로운 듯이 양손으로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문을 닫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에게 승리한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 드린대로 한 명, 데려왔습니다.」
그의 말에 선글라스의 남자는 표정 변화없이 대답한다.
「좀 늦었어.」
「죄송합니다.」
그 후, 얼마 간의 침묵. 그 정적을 가벼운 한숨 소리로 먼저 깬 건 선글라스의 남자였다.
「좋아. 좀 늦긴 했지만 그런 만큼 거물이겠지. 게다가 네가 데려 왔으니, 아무 말 없이 믿어주겠어.」
「가르치는 건 제가 맡겠습니다. 괜찮습니까?」
「그거야 상관없지만......어, 뭐라고?!」
방금했던 질문에, 선글라스의 남자는 조금 더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흐음...확실히, 네가 직접 가르치겠다니 꽤 대단한가 보군.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싸우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설명해 드리기 곤란합니다.」
순간, 선글라스의 남자가 조금 충격 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괴고 있던 턱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 자는, 세가지를 모두 사용하니까요.」
「......모두, 라...」
그 말에 선글라스의 남자는 조금 더 놀란 것 같았지만, 아까와 같은 부정적인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로 몸을 편하게 뉘였다.
「그래서, 넌 저 자가 뭘로 싸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알다니? 그리고 모두가 안다는 건?」
선글라스의 남자가 되묻자, 보이지는 않지만 나에게 승리한 그가 분명하고 단호한 눈과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테란이, 크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
그 후로는 그저 연습의 계속이었다. 그와 하루에도 몇번, 몇십번씩 싸웠고, 매번 졌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그에게 승리한 날이 오리라고 믿으며.
저그, 테란, 프로토스를 모두 사용하는 나에게 그가 권한 건 자신의 테란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종족이니 편하게 가르칠 수 있어서 나에게 권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테란을 사용할 때면 잘 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 생각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습의 강도는 점점 더해져 그런 시시하고 사소한 생각(그의 말에 따른다면)은 할 여유 조차 없었다.
「1년 뒤에, 세상을 놀라게 할 테란이 나타날 겁니다.」
뭇 기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상태에서 그가 던졌던 말이었다.
그 말에 장내는 술렁이며 펜을 굴려댔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약간의 자긍심과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다.
난 세상을 놀라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나 또한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1년 후로 모두와 약속을 잡아 놓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나를 위해서, 내 명성 같은 것을 위해서 였으니까. 그리고 연습량은 계속 늘어갔다. 그와 함께, 미래에 대한 좋은 상상도.
◇
"멋지다...!!"
제이콥이 말하고 있는 중간에, 우브가 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듣지 못하고 제이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제이콥은 우브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나요?"
교실 오른쪽 뒤 끝에 앉아 있던 우브를 바라보고 제이콥이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쏠렸다. 갑자기 교실이 조용해지자 고개를 살짝 들었던 나다는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자고 있던 게 걸린 거라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일어나 제이콥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그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죠?"
"아...저...어제 별로 잠을..."
"자기가 진 사람을 강하다고 인정하는 게 멋지잖아요. 그리고 또 언젠가 재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우브가 말을하자 나다는 당황한 듯 우브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날라가 보기에, 그건 '너 미쳤냐' 라는 뜻을 가진 입모양이었다. 날라는 나다를 팔꿈치로 찌르며 오히려 네가 이상한 거라는 눈치를 주었다. 나다는 억울한 듯, 날라를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우브 학생은, 최연성이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군요."
제이콥이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왜인지, 그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날라는 이유없이 우브가 최연성을 좋아하는 것이 치사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민에 빠졌다. 나다는 여전히 이해가 안되는 표정으로 제이콥과 우브를 번갈아 보다가, 포기했는지 다시 엎드려 버렸다.
"뭐, 전설 속의 사람이니까 멋진 사람이겠죠. 사람에 따라서 당연히 좋아할 수도 있는 거에요."
날라는 제이콥이 분명히 '이번은 좀 다른 경우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얘기를 계속해 볼까요."
제이콥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는 듯 교실 전체를 쳐다보았다.
"최연성은 그 후로, 말한대로 1년 동안 계속 연습에 몰두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공식적으로 데뷔했죠. 그의 데뷔전은, 과거 그가 주로 사용했던 저그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날라는 아까 제이콥이 했던 말과 똑같은 크기로, 우브가 '이겼겠지' 라고 말하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들었다.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제이콥은 잠깐 말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우브는 조금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자극제가 된 것 같았어요. 그 경기 패배 이후로 그는 MSL에서 세번 정상에 올랐고, OSL에서 한번 정상에 올랐으니까요. 그리고 종합적인 랭킹으로 긴 기간 동안 1위를 유지했습니다. 지금은 뺏긴 상태지만, 바로 그 때의 경기 스타일과 포스 때문에 그가 '괴물' 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교실 안이 조금 웅성거렸다.
여기저기서 'MSL' 이니 'OSL' 이 뭐냐는 말이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들은 서로 무슨 싸움 대회라든가 하는 걸로 결론 짓고 있는 건 같았지만, 별로 신뢰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마지막엔 서로 '네가 선생님한테 물어봐' 하는 말싸움이 되어 버렸다.
"MSL, OSL이라는 건 말이죠,"
제이콥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소란스럽던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딱히 무슨 약자라거나,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매일 싸우는 리그' 나, '오래 싸우는 리그' 로 해석해 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쉽게 몇달 동안 강자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토너먼트, 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곳에서 정상에 오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최연성은 MSL에서 3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겁니다."
제이콥은 헛기침을 몇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죠. MSL에서 여러번 동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OSL에서도 마찬가지 였구요. 거기서, 그의 전성기는 끝났다느니 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단지 3연속으로 우승을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전성기는 끝났고, 이제 슬럼프였던 겁니다. 혹자들에게는."
"저, 그럼 왜 슬럼프가 아닌 거죠?"
교실 앞 쪽에 앉아 있는 한 남학생이 갑자기 물었다.
"3번이나 우승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무것도 못한다면 슬럼프가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죠. 고작 3위나 4위에머무르는 것은 슬럼프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모두들?
네, 그래요. 그가 전성기 시절처럼 완전한 괴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그는 엄청난 사람입니다. 꾸준히 높은 성적을 유지했고, 1위에 등극한 뒤로 5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 4위' 를 슬럼프라고 생각하는 그 혹자가 바로 최연성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
────그 날도,
내가 패배한 그날도,
내가 패배한 오늘 처럼 비가 내렸다.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그 비가 지금도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
바닥에 쓰러져 있기 때문에 더욱 크게 귓가에 울리는 빗소리. 그것은 마치 나를 야유하고 비웃는 웃음소리 같이 들려서, 귀를 막아버리고 싶어졌다.
쏴아──────하는 빗소리. 그리고,
뚜벅뚜벅, 하고 발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라.」
벌써 두번째 빗속에서 듣는 한 사나이의 명령조 목소리였다.
「......일어나라고 했다.」
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내 앞에 우산도 없이 서 있는, 어두운 명암의 그를 보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
그는 정말 화난 목소리로 나에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단순한 분노만이 아니라 왠지 동정심이 느껴져서, 기분이 나빠졌다.
나에게 그런 동정심은 필요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아직 그런 동정까지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적어도 너는 이렇게 되지 않게 하겠다고 몇번, 몇수십번씩 생각하고 다짐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이러고 있으면 절대 안돼.」
그의 말이 조금 잘못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적어도 너는, 이라구요...?」
그에게 다시 되물었다.
「적어도 너 만큼은 자만하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 슬픔이 느껴졌다.
「──나 처럼, 잘못되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예...?」
「내가 전성기일 때의 얘기를 조금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래. 그 때는 너와 매우 흡사했다. 아니, 너보다 더 대단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우승을 휩쓸었고, 무서운 건 전혀 없었다. 누구와 만나든 그저 이기기만 하면 됐을 뿐이었으니까 나에게 부족한 건 시간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지.」
그는 여전히 슬픈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가 말이야, 가장 약할 때라는 걸 지금와서야 알아버린 거지.」
「...가장 약한 때라니요...?」
「가장 약할 때. 그건, 자만하기 시작할 때.
그래. 난 점점 자만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더욱 약해져 갔다고 할까. 조금씩 내가 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것을 부인했다. 난 질 리가 없고, 항상 이겨왔고, 특별했으니까.」
질 리가 없다.
항상 이겨왔다.
특별하다......? 이건...
「결국, 그것을 나 자신이 마지막에서야 인정했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너무 늦어서, 나에게 남은 건 고작 황제라는 옛 명성 따위 밖에 없었지.」
──내가, 생각했던 거잖아.
「그래도 지금은 다시...」
「아아, 아니. '다시' 같은 건 나에게 있을 수 없을 거야. 너무나 높이 올라 갔었고, 그 만큼 많이 떨어져 내려왔으니까. 내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보답한 것이──」
순간, 그가 말 끝을 흐렸다.
어두워서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고, 빗소리로 그가 하는 작은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아마 그는──
「...보답한 것이, 이번에 최선을 다한 경기들이었으니까.」
그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낸 듯이 힘들게 말을 끝마쳤다. 무언가를, 참으려 애쓰는 듯한 그 목소리. 어떤 감정을 참으려 애쓰는 듯한.
그가 말을 마치고, 아주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아마 시간은 별로 가지 않았지만 그것은 긴 침묵이었고, 그래야 했다.
그 침묵이 길지 않다면, 그의 세월들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 나 스스로 그렇게 느꼈고 그렇다고 단정지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널 여기서 이러고 있게 할 순 없다.」
그는 최대한 단호한, 화가 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목소리에 섞여 있던 동정심은 아마 자신에게 향하던 게 아니었을까.
「......이번엔, 나를 따라오지 마라.」
그는 말하고, 뒤를 돌아 다시 걸어갔다.
난 그저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몸이 일어났다.
그저 지금 이대로 보내버리면 안될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영원히 떠나가 버릴 것 같아서,
다시는, 나에게 승리한 '그' 가 되어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내가 소리치는 소리에, 그가 멈춰서서 뒤를 돌았다.
「그런 것, 몰라요. 당신이 가는 길이 뭔지,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인지, 그런 건 몰라요. 전 그냥 따라갈 거라구요!」
그 때, 비가 내리는 것이 고마웠다.
나를 이긴 사람과 마주보고 있는데, 이렇게 울어버리는 걸 보여주기 싫었다.
이렇게 차가운 빗물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같이 얼굴에 흐르는 걸, 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처음으로 고마웠다.
「───바보 같은 자식.」
순간, 하늘이 번쩍하고 빛났다.
나와 그의 모습이 모두 환하게 보여지도록 빛났다.
그리고 그 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가 내리는 것을 고마워한 것이, 나만이 아닌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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