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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09/12 18:51:28 |
Name |
퉤퉤우엑우엑 |
Subject |
[소설] 殲 - 10.진행 |
아래를 바라보기도 하고, 앞이나 옆,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며 걸었다. 시선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이.
사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마주치지 않을까 해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하지만 근처에 상가하나 없는 아파트 단지의 길에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다. 더군다나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
공원 근처로만 가면 사람이 붐빌테지만 아직까진 한두명 정도 지나다닐 뿐이다.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조금 더 걸어가서 공원 근처에 도착했다.
가로수로 둘러싸여 있는 공원 근방엔 꽤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막연히 걷다가, 공원 출입구에서 반가운 사람을 발견했다.
태일이 공원 안에서 튀어나왔다. 소리를 지르려다가, 바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그만두고 달렸다.
입구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태일이 또 튀어나왔다.
"어, 여긴 웬일이에요?"
무서울 정도로 갑작스레 나타난 덕에 넘어질 뻔했다가 간신히 멈춰섰다.
"그냥 학교엘 가보려고. 집에서 마땅히 할 일도 없어서."
"그래요..."
말끝을 흐리면서 혹시 자신에게 뭐 할 말이라도 없냐는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글쎄...태일이한테 뭔가 물어볼 것이 있었는데...
"아, 맞아. 저녁에 공원으로 오라고 했지?"
"네. 그랬죠."
"저녁이라는 것보단 정확히 시간을 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
"어......"
무언가 생각하는 듯 두번째 말끝을 흐렸다.
적당한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건가, 아니면 다른 말을 생각하는 건가.
"그냥, 저녁으로 하는 편이 좋겠어요."
"뭐? 왜?"
역시 생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아니, '역시' 라면 생각을 했던 말이 되는거겠지.
"이유, 없어요."
"......?"
"이유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재밌잖아요."
"아니,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누구 한명이 기다릴 수도 있고 여러모로 좀..."
"제가 정확히 몇시에 공원에 가게 될지 몰라요. 또 몇시에 보여준다는 걸 보게 될지도 모르고."
"무슨 뜻이야?"
"시간을 정하면 그 시간에 정확히 맞춰서 갈 자신이 없어요."
대체 뭐지. 저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건.
그보다 처음엔 이유가 없다고 했잖아!
"보여준다고 한 게, 어느 시간대가 아니면 못 보여줄 것 같아서요."
"그러면 일찍 만나서 그걸 볼 수 있을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건 뭐야?"
"설명하자면 길어요."
말하면서, 태일이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가 공원에 있는 것처럼 공원 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그보다, 여기서 할 일이 있어서요. 선배도 가던 길 가세요."
약간 경사가 진 공원 입구를 살짝 뛰어서 가더니, 천천히 걸어서 간다.
아직 이것저것 따져보고 싶어서 붙잡으려다가 관두었다.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약속해놓고 만날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목적지인 학교를 향했다.
가능하면 누군가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속으로는 왜인지 모르게 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공원으로 가고 싶다거나 하는 건가.
입구에서부터 넓은 운동장이 펼쳐져 있는 학교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그 곳에서 뛰놀고 있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다─들을 보았다.
다들 낯익은 얼굴들 같아 보이는데, 좋지 않은 시력 때문인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괜히 아는 척했다가 모르는 사람이면 어떡할까. 지금은 그냥 운동장을 걸어 보기로 했다.
대각선으로만 100m는 되는 거리여서 한바퀴를 도는 데에 천천히 걷는다면 5분 남짓 걸린다.
얼마나 걸을지, 얼마나 걸었는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그저 걸었다.
시선을 하늘 쪽으로 향하고(구름없이 맑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갔다.
'이런저런' 이라고 해봐야 최근에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이상한 일들에 대한 것이 주제다.
한번도 생긴 적이 없던 갑작스런 기절이라든가 엄청나게 심했던 두통, 그리고 그걸 전부 일으킨(그렇다고 생각한) 이상한 악몽.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을 찾아낼 수가 없다. 고작 그 악몽이란 것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면, 난 아무래도 복권을 사야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두통을 느껴 쓰러졌을 때 많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다.
정말 그러고보니 그 때는 전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한두번 정도는 이럴수도 있겠지, 하고 넘어갔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한두번이 아니라 세번씩 그렇게 됐으니까 살다보면 일어날 일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좀 아닌 근거지만.
아무튼, 병원에 가든지 뭘 하든지 해서 원인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
일단 그러기 전에 부모님께 연락부터 해야겠지.
아아, 지금 깨달았다. 이런 내 상태를 부모님께 전혀 알리지 않았다는 걸. 별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진작 연락을 했어야 했나. 뭐, 일단 나왔으니 태일이까지 만나고 집에 돌아가서 하면 되겠지.
─타앙
흠칫, 하고 멈춰 섰다. 바로 앞에 공이 날아와서, 스탠드에 맞고 높이 떴다.
높이 떠 있는 공을 쳐다보다가, 문득 옆을 보았다. 멀리에 공 주인인듯 천천히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다가오면서 뭐라고 소리치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집중해서 들어보았다. 동시에 누구인가 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이초한...! 너 귀가 어떻게 됐냐...!"
어렴풋이 들렸다. 좋은 말은 아닌데, 듣지 않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때에 간신히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작은 눈에 길고 마른 얼굴, 그리고 저 부담스러운 뿔테안경을 쓴 사람은 성준밖에 없겠지.
더욱이 크다고 하기엔 많은 무리가 있는 저 단신이라면 확실하다.
아마 더 멀리 있는 저 군중들도 우리반, 혹은 중학교 때나 1학년 때 친구이려나.
내가 공을 차 주기를 바라는지 성준이 중간에 서서히 멈췄다. 공은 어느새 떨어져 튀기지도 않고 있다.
축구라는 게 딱히 잘하는 운동은 아니어서, 정확도를 위해 공을 차지 않고 던져 줬다.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한다. 가라는 손짓이었다면 그 순간 만큼은 정신을 잃어버릴거야.
"너 왜 왔냐?"
오른발로 살짝 공을 차고 걸으며 성준이 물었다,
"몰라.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왔어,"
"전화를 해도 안받잖아. 어디 바람이라도 났다고 생각했지만."
멀리서 빨리 가져오라고 소리치자, 공을 멀리 차 보내며 성준이 말했다.
방금 한 말이,별로 화가 나는 말의 내용이라기엔 이 녀석치곤 친절해서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할 일 없으면 가서 좀 축구라도 하자고."
"아니, 별로 흥미 없는데."
'흥미 없다' 는 잘 쓰이지 않는 말에 반응하는 듯, 성준이 꿈틀했다.
"뭐 어쩔 수 없으려나."
입모양으로 '어...' 라고 말하는 듯 무슨 말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아무일도 없기를 바라면, 빨리 합류하는 편이 좋을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인데."
"글쎄,"
성준이 나의 걸음걸이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며 말했다.
"별로 대단히 큰 사건은 아니야. 겨우 네 아버지라는 분에게 너의 가짜 이성친구를 만드는 것 뿐이니까."
아무 느낌 없이 그 말을 듣고, 여전히 천천히 걸었다. 성준은 조금 더 빨라 지는 듯 했다.
글쎄, 나름대로 크게 놀라며 '안돼!' 라고 외치길 기대 했겠지만 그렇게 하진 않을텐데 뭘.
솔직하게 지금은 그다지 뛰고 싶지는 않다. 귀찮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고.
전혀 축구같이 뛰어다니는 걸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한 가지 뛰어야 하는 일이 생긴 것 같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악마가 뒤를 보고 미소지으며 꺼내든 저 핸드폰을 뺏어야 할테니까.
이번이 여섯번째는 된 것 같다. 부모님 번호를 저 녀석한테 알려준 게 잘못이라는 걸 깨닫은 것은.
아아, 정말이지. 오늘도 그리 편하게 끝날 하루는 되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썩 즐거웠다고 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본디 운동을 그렇게 잘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였고, 기분까지 좋지 않았으니.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면 특별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에서 점수를 주겠다.
그것이 이렇게 헐떡거릴 정도로 힘든 일만 아니었다면, 박수까지 쳐 줬을텐데.
"뭐야, 벌써 끝난거냐?"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끝내기를 바라면서도 아직 저녁이 아니어서 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내뱉었다.
지금의 호흡 상태로는 걸어다니기도 힘들게 보이겠지만.
"너, 지금 상태하고 조금은 맞는 말을 해줘."
"우린 널 걱정해서 이러는 거야. 절대 우리가 힘들...거나 한...건...아니야..."
웃기려는 듯, 일부러 마지막에 힘든 척을 하며 대답하는 원준을 위해 몇명이 피식하고 웃어주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9시부터 이 짓을 했단 말이야."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던 성준이 말했다.
그의 앞엔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는 글귀가 쓰여있다.
"9시?"
"그래, 9시. 아무리 혈기왕성하다지만 이것들, 좀 심했어."
대충 말하고 다시 수도꼭지에 입을 갔다댄다.
내 생각에는, 아마 이 녀석이 모두를 부르지 않았을까. 모두의 표정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공은 내가 가져간다."
유일하게 성준보다 키가 작은 범규가 말했다.
'어디서 말하는지 안보여서 모르겠어. 하하하' 라고 말한 원준은 본인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 하다.
"내일은 9시에는 안부를거지?"
굵은 목소리기는 한데, 한둘이 아니어서 누군지 잘 알 수가 없는 목소리로 누가 말했다.
"아아, 내일은 그렇게까지 일찍 나오라고는 안할께."
자연스레 사실을 시인하면서 성준이 말했다.
대부분 물을 마시고, 범규가 공을 든 채로(원준이 잠깐 달라고 한 것을 무시했다) 교문을 향했다.
왼쪽으로 가는 일행과 오른쪽으로 가는 일행.
난 집은 왼쪽이지만, 공원으로 가는 빠른 길인 오른쪽으로 향하려 했다.
"내일은 8시다. 아침부터 계속 전화할거야."
성준이 외치며, 왼쪽으로 향했다. 거의 도망치는 가는 그를 따라 '잡아!' 라며 서너명이 따라간다.
나머지는 모두 오른쪽길로 향한다. 모두 힘이 드는 듯 걸음속도가 느리다.
"근데, 너 집 저쪽 아니었냐?"
나올 줄 알았던 질문에, '아니, 공원에 가려고. 누가 불러서.' 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이후로 중간에 대열에서 이탈해 집으로 가는 사람에게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오히려 그러는 편이 나에게도 편했다. 태일이 뭘 보여줄지 생각하느라 바빴으니까.
공원으로 들어가며, 더 멀리 집이 있는 몇명에게 인사했다.
나름대로 반가이 대답해주지만 여기까지의 거리만큼은 더 가야하는 지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막을 수 없다.
공원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와서, 가장 가까이 있는 벤치에 앉았다.
딱히 하고 있을 일은 없고 걸어다니는 건 귀찮다. 편하게 앉아있자고 생각했다.
중앙 분수대로 향하는 길에 3m정도의 높이로 솟아 있는 시계를 보았다. 3시가 조금 안된 시각.
너무 일찍 와버린 것 같다. 저녁, 이라면 아마 6시 쯤일텐데.
피곤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잠드는 건 무리일까.
이상할 정도로 추운 날씨덕에 땀은 많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잠은 자지 않더라고 일단 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 같아 불편하긴 하지만.
이대로 기다리자. 혹시 실수로 잠들면 절대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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