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 및 행사들이 가득한 한달이다. 다른 이들에게 5월이 중요한 의미를 띄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5월은 나에게 있어 중요한 달이다. 나의 인생이 송두리채 바뀌게 되버린 것은 어느 5월, 또 다른 기념일을 지킬 의무가 생기면서였다.
나에게 5월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달, 아버지의 기일을 지키는 달이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은 8년 전의 5월,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가족들의 곁을 떠나셨다. 항상 가족들에게 든든한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시던 아버지는 더이상 계시지 않았고,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들은 처음으로 현실의 민낯과 대면하게 되었다. 현실의 자비없는 온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하게 우리 가족을 흔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약 20년 이상을 가정주부로 지내시다가 한순간에 두명의 자녀를 먹여살려야 하는 과부로써 신분 변화를 맞이해야만 하셨다. 그나마 불행중에 다행인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고3 때였고, 아직 최후의 스퍼트를 달릴 마지막 찬스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마지막 스퍼트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6개월로 기록되었고, 난 근방에 나름 좋은 대학에 합격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공부할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약 12년간 지내던 우리 가족은, 나의 고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한국으로 복귀하게 됐다. 한국에 가면 어쨌든 지푸라기라도 잡으며 입에 풀칠하고 지낼수 있지 않을까, 그게 어머니의 심정이셨을 것이다.
대학 과정을 코앞에 두고 아버지가 사라지며 금전적 문제로 꿈이 좌절된 친누나는, 그뒤로 계속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자신은 성공할수 없는 사람이라며 세상을 한탄하고, 자신을 집안에 가두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매정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누나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사는것조차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였기에, 부디 알아서 잘 극복하고 자립해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건 고스란히 어머니께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난 그저 다시 해외로 나가서 합격한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잘 보내고 싶은 심정이였을 지도 모른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저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익숙했던,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내려놓고, 홀로 외국생활을 하기 위해 출발했던 그날. 새벽 1시너머를 가르키는 시계 아래서 열심히 내 앞으로의 4년을 책임질 생필품들을 주워담던, 분주한 어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묵묵히 밀려오는 불안감과 눈물을 애써 억누르고, 난 가족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긴 여행가방을 잡아들고 공항버스에 올랐다. 있는 힘을 다해 웃는 얼굴로 작별인사를 고했지만, 입가의 근육은 그날따라 애석하게도 무거웠다. 그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애썼던 입가 근육은 어느새 힘을 잃고, 내 눈가의 근육까지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적 속에서 주체할수 없이 흘러내리는 내 눈물은, 뒷받침해줄 울음소리조차도 없었고, 그저 표정없는 나의 얼굴을 타고 수십분동안 흘러내렸다. 어느새 눈물이 멈추고, 눈앞에는 목적지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이 보였다. 손에 들린 왕복이 아닌 편도 티켓은 종이 한장 치고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나로써 굳은 다짐을 하게끔 만들었다. 결코 앞으로 혼자 보내게 될 세월을 헛되지 하게 않겠다고.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금의환향이라는 느낌은 이런 것이였을까. 한국을 떠난지 8년, 요즘은 해외 직장인이 되어 넉넉한 살림으로 한국을 휴가마다 방문한다. 벛꽃이 피어나는 4월, 핑크빛이 만발해있을 한국땅을 밟기 위해 수많은 추억들이 담긴 공항을 다시 찾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 공항은 애증의 장소이다. 수많은 이별과 재회, 그리고 나의 인생까지도 고스란히 간직되있는 이 장소. 수많은 변화를 거쳐왔던 곳이지만, 이곳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그시절들의 실루엣이 보이는듯 하다. 갑작스러운 귀국, 그리고 어머니와 누나와 같이 말못할 감정에 이곳에서 부여잡고 함께 울던 시절의 흔적이 눈에서 가시지 않는다. 이것에 그치지 않고, 아직도 더 많은 추억들이 있는, 그리고 더 많은 추억들이 기록될 장소이기도 하다.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모든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나의 지난 세월은 헛되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게 되는 시간이였다.
그리고 다시 찾은 집에는, 내가 그 누구보다도 감사하는 두 사람이 있다. 조금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어둠의 터널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시작한 우리 누나는, 나에게 조금은 깐깐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누구보다도 나를 잘 챙겨주는 사랑이 넘치는 누나다. 그리고 우울한 누나가 아닌 이런 개성 넘치는 깐깐함을 가진 누나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포기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의 믿음에 그 무엇보다 가장 감사하다. 여태까지 본인이 더 힘들었을 텐데도 용기를 잃지 않고 늘 웃으며 힘이 되어주셨던 어머니에게, 난 입이 백개라도 그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가족이 화목하게 시간을 보내는게 이토록 어려운 것인지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한마디.
“고마워, 아들. 잘 커줘서.”
난 가볍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 미소의 의미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고마워 엄마. 늘 믿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