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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9/04 21:00:43
Name 유유히
Subject 무의미한 역사속의 가정 - 만약 그러했다면.
"삐삐삐.. 삐삐삐..."

2010년 3월의 어느 아침, 알람시계의 시끄러운 알람 속에 잠에서 깬 나는 비몽사몽 속에서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듣는다. 교수의 출석에 대답하고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답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학교 식당에서 친구와 밥을 먹는다. 친구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했다.

"스타리그 보고 싶다."

졸린 가운데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타리그가 없어지고 온게임넷이 문을 닫고, 엠비씨 게임은 엠비씨 엔터(테인먼트)로 바뀌어 연예오락 프로 재방송과 신작게임소개를 병행하는 반쪽채널이 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부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스타리그를 좋아했었는지 알 법하다. 거의 나만큼이나 미련했었던 것 같다. 나는 스타리그가 중단될 거라는 루머에 불과한 소식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갈 때, 광우병 때도 하지 않았던 촛불시위를 하러 피켓을 들고 광화문에 나섰었으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개강한 다음날."

"아냐. 재앙이었지."

그제서야 작년의 오늘이 기억났다. 그래. 오늘은 온게임넷이 공식적인 송신중단을 한 날이었다. 1년이 넘은 게 아니었어. 오늘이 딱 1년 되는 날이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2009년 3월의 온게임넷 송출중단 사건을 떠올리며 말했다.

"끔찍한 일이었어."

"그 누가 상상했겠어."

"MBC게임이 남아있다고는 해도, 온게임넷은 스타크래프트 역사 바로 그 자체였으니까."

친구는 잠시 멍하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의아한 눈치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그날 얘기하는 거구나. 온게임넷 송출 중단."

이제 내가 의아한 눈을 할 차례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얘기 한 거 아니었어?"

"그것도 재앙이었지. 하지만, 3년 전 오늘을 생각해 봐."

3년 전 오늘? 나는 잠시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이 흐려지며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그날. 그래.
2007년 3월 3일. 이 판에 절대 진리가 현현하던 순간을.





2007년 3월 3일, 마재윤이 무명 프로토스를 3:0으로 가볍게 꺾으며 양대리그 통합 우승을 달성한 날이다. 언제나처럼 차분하게 소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제 시작일 뿐이다'라며 뿌듯한 표정으로 트로피에 입맞추는 그를 보며 관중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내가 자주 가던 커뮤니티인 PGR에서는 차분한 가운데 스타크래프트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 역사가 쓰여지는 순간에 감동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스갤과 파이터포럼, 와이고수의 분위기는 조용했다. 면제윤, 마죄윤이라며 별의별 이유를 대며 마재윤을 비난하던 키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글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 간혹 올라오는 글들은 '마재윤 최고다'라는 공허한 찬양과, 결승전을 앞두고 푸켓에 갔다온 이름없는 프로토스 게이머를 까는 글들이 전부였다.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무명의 프로토스 게이머는 그때의 비난이 못내 가슴속에 남았는지 얼마 못가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얼마전, 무명 프로게이머가 게임아이템 관련 사기를 벌였다고 하여, 그때 결승에 갔던 프로토스가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했던 기억도 난다. 마재윤이라는 이름의 그는, 그때부터 마본좌로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의 다음 스타리그 결승에서는 변형태라는 테란이 망령되이 본좌를 의심하려 들었다.

'너도 사실은 인간일 뿐이며, 나의 검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광전사의 독기 앞에 마재윤은 피식 웃어버렸다. 앞선 두 경기를 9드론 저글링만으로 끝내버렸다. 테란이 앞마당을 한 것도 아니었고 벙커를 안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재윤의 저글링은 같은 프로게이머라는 말이 무색하게 변형태의 마린을 유린했다. 마린은 죽어 나갔고 저글링은 죽지 않았다. 이성은이 탱크 사거리를 재듯이 마린 사거리를 재 가며 저글링을 컨트롤하는 느낌이었다. 벙커를 아무리 지어도 마린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허무하게 두 경기를 내준 변형태는 분노로 불타오르는 눈을 한 채 3경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마재윤도 평범한 운영을 펼쳤다. 남북전쟁이 펼쳐졌다. 난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응당 흥분해야 할 해설자들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경기만 지켜보고 있었다. 커맨드센터가 터지고, 팩토리가 터지고, SCV가 터졌다. 변형태는 분명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재윤은 칭얼대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치명타를 먹이지 않은 채 쓸데없는 지역만 공격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센터에 우글우글대는 울트라, 디파일러, 저글링들은 할일이 없다는 듯 춤을 추기도 했다.

그것은 흔히 비유로 표현되는 '관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간'이었다.

퀸을 뽑아 먹은 커맨드센터 셋에서 모은 인페스티드 테란 세 부대가 우르르 몰려와 테란 본진에 자폭했을 때, GG조차 치지 못한 변형태가 엘리미네이션되며 방송 사상 최초로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분한 아이처럼 소리내어 우는 그를 조규남 감독이 달랬지만, 그의 표정도 변형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관중들은 승자에 환호하는 한편 패자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재윤은 당당하게 두 번째 스타리그 우승 트로피에 입맞추었다. 임요환 이래 최초로 스타리그 연속 우승이 달성되었다.

그 이후 스갤에서는 '최강자' 떡밥이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가끔 올라오는 뻘글과 낚시만으로 도배되었다. 지금 누가 최강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누가 최강일지 누구나 다 아는데 무슨 키보드 배틀이 필요하겠는가. 미래를 알아버린 어린아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맵퍼들은 마재윤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저그압살맵을 만들었다. 그 결과는 마재윤을 뺀 모든 저그가 나가떨어진 것이었다. 저그의 암울기가 찾아왔다. 마재윤은 경기를 하는 족족 이겼으나 다른 저그들은 하는 족족 패했다. 스타리그에 저그가 사라졌다. 스타리그 진출자 중 저그는 마재윤뿐이었다. 그리고 대회를 하는 족족 우승해버렸다. 맵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섬맵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마재윤의 열세번째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제동이, 박지수가, 김준영이, 박성균이, 박찬수가, 송병구가, 이영호가 덤볐다.
그리고, 압살당했다.
그날 이후, 모든 OSL과 MSL이 단 한 명에게 석권당했다.
팬들은 마재윤을 마본좌에서 '마신'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본좌에서 신으로 승격당한 마재윤은 그때부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를 상대로 본좌라는 거..?"



자연 흥행논란이 일어났고 팬들의 관심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누가 우승할지 뻔히 알고 있는데, 뭣하러 가슴 두근거리며 경기를 보겠는가. 프로리그도 마찬가지였다. 마재윤이 아닌 다른 선수들의 경기는 OME라 불리며 외면받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에게 마재윤의 잣대를 들이대며 왜 너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악마의 재능을 선사받지 못한 다른 프로게이머들은 부당한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다 속속 은퇴를 선언했고, 그 숫자에 비례하여 팬들이 사라져갔다. 인기가 식기 시작한 스타리그와 프로리그에는 스폰서도 잘 붙지 않았고, 오프에도 마재윤의 팬을 제외하고는 잘 오지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의 패배를 보러 오는 팬은 없었다.

2009년 피망맞고배 스타리그 결승은 100명 남짓의 관중수를 기록했다. 온게임넷은 소녀시대를 초청하는 초강수를 두었지만 처음에 북적대던 관중은 소녀시대의 축하공연이 끝나자마자 다 빠져나갔다. 엠비씨 게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디들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러던 중 일대 대사건이 일어났다. 2009년 피망맞고배 스타리그 결승에서 이영호가 마재윤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백명 남짓한 팬들은 경악에 휩싸여 이영호를 연호했고, 굳은 표정의 마재윤이 고개를 저을 때 이영호가 환하게 웃으며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렸다. 드디어 게임 관계자 얼굴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비극을 위한 희망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결승이 끝나고 나서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드디어 3년간의 독재 통치가 끝났다. 소감이 어떤가?"

"오늘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다. 마린이 잘 죽지 않더라."

전혀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마린이 잘 죽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재윤의 굳은 표정은 워크래프트 리그에서 있었던 사건과 유사한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 팬들의 조사요구가 빗발쳤다. 결국, 스타리그 연출 차원에서 맵에 조작을 가하라는 지시가 맵퍼들에게 있었던 것과, 리그에 사용된 맵에서 저글링의 공격속도 너프, 히드라의 사정거리 너프, 뮤탈리스크 뭉치기 컨트롤 견제 등 전방위의 조작이 가해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영호의 우승은 극적인 방법으로 파탄을 맞이했다. 우승이 취소되었다. 온게임넷의 사과방송이 이어졌다. 그러나 팬들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이만큼 분노할 팬이 남아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증오에 찬 글들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대부분의 내용은 스타리그 다시는 안볼거다, 온게임넷은 문닫아라 등의 비난이었다.

엠비씨 게임이 반대급부로 떠오를 법도 했다. 그러나 팬들의 의문은 엠비씨 게임에도 이어졌다. 결국 엠비씨 게임 역시 조사 결과 정도가 다를 뿐 어느 정도의 조작을 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똑같은 비난이 이어졌고, 남아있던 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2009년 2월, 온게임넷은 스타리그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2009년 2월, 엠비씨 게임은 연예정보와 게임정보를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채널이라는 미명하에 '엠비씨 엔터'로 채널명을 변경한다.
2009년 3월, 온게임넷 송출 중단 소식이 이어졌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팬들과, 스타리그를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스타리그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부흥운동을 벌였던 흑치상지의 심정만큼이나 참담한 운동이었다.

2009년 3월 3일.  
이스포츠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뭐 하냐?"

친구의 말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댄 뒤 김치를 집어 입에 넣어 오물거리던 중 학생회관 TV에서는 엠비씨 엔터가 방영되고 있었다. 서태지의 근황을 밀착취재했다고 떠벌여대는 박상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케이블채널의 인기 MC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였고, 공중파 예능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날로 인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그가 구가하는 인기가 더해져갈수록, 나는 강민, 한승엽, 이승원..아니, 엄재경, 김철민, 전용준, 김태형 등 사라진 이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더 이상 스타리그가 방영되지 않는 지금. 그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서태지의 소식에 이어서 스타 골든벨에 출연한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김제동의 부추김에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과거의 그 어설픈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공중파 최초 콩댄스!"라는 큼지막한 자막이 화면에 박혔고, 다른 게스트들이 민망한 웃음을 짓는 것이 비춰졌다.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홍진호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김구라에게 '먹고 살기 힘드니깐 이런 데도 나오네'라는 핀잔을 듣는 홍진호를 보던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유일한 저그의 희망이었던 그가, 그 누구보다 웃음거리가 되길 싫어했던 그가, 이제 스스로 웃음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눈이 갑작스레 뜨거워졌다.

이 모든 것을 마재윤 탓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가 무슨 죄일까. 그는 단지 게임을 엄청나게 잘했을 뿐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나는 갑작스레 마재윤이 보고 싶었다. 신으로 군림하다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 세상을 다 멸망시킨 그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뜨거워졌던 감은 눈이 갑작스레 시원해졌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 놀란 친구의 말조차도, 스타리그가 멸망한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던 내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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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ellOsisM
09/09/04 21:50
수정 아이콘
피식피식 웃으며 읽다가 마지막에,
아...콩은 또 왜ㅠㅠ
09/09/04 23:06
수정 아이콘
뭔가 매우 난해한 단편 소설을 읽은듯한 기분이네요
09/09/04 23:07
수정 아이콘
난해하네요......
귀염둥이 악당
09/09/04 23:12
수정 아이콘
글과 관련된 내용은 아니지만 강간의 은유가 관광 아닌가요?

강간 → 너무 쎄다 싶어 관광으로 순화 → 관광으로 순화하다 보니 버스로 저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데려다 준다는 은유로 변화...
유유히
09/09/04 23:26
수정 아이콘
귀염둥이 악당님// 네. 맞습니다.
Karin2002
09/09/04 23:59
수정 아이콘
강간이란 표현과, 김택용 온라인 사기 표현은 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09/09/05 00:55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제목만보고는 소설일줄은 몰랐네요
09/09/05 01:26
수정 아이콘
이거 재밌네요. 한국공포문학단편집에 나오는 글중 하나 같습니다 크크
탈퇴한 회원
09/09/05 03:47
수정 아이콘
뭔가 진지하면서 웃긴........ 크크 재밌네요.
김영민
09/09/05 06:51
수정 아이콘
가끔 택뱅리쌍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하하하 ^^;
딩요발에붙은
09/09/05 08:07
수정 아이콘
등골이 오싹하네요.
lafayette
09/09/05 10:42
수정 아이콘
진짜 마재윤선수가 곰시즌1 우승하고 차기 양대리그까지 먹었다면, 이것과 비슷하게 갔을지도 모르겠네요.
고마워요 김택용??
09/09/05 22:5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근데 택용선수의 응원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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