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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06/10/25 13:49:24 |
Name |
Artemis |
Subject |
[잡담] 가을로 번지점프를 하다 |
어제 <가을로> 특별시사회가 있어서 서울극장에 다녀왔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와 <가을로>를 연이어 보는 시사회였죠.
<번지점프를 하다>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김대승 감독님 신작이라서 기대도 많고 해서 그 전날부터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개봉 당시 극장에서만 여섯 번을 보고 그 뒤로 여러 경로를 통해 수없이 봤던 터라 이제 도합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볼 때마다 좋습니다.
제겐 거의 연인 같은 영화죠.^^
(이 영화를 같이 보게 되는 사람이 저의 반려자가 되리란 생각도 합니다.^^;;)
이은주 씨가 유명을 달리하고 나서는 어제 처음 <번지점프를 하다>를 제대로 봤는데, 많이 아프고 슬프더군요.
"걱정하지 마. 나 어디 안 가. 지금 모습 그대로 있을게."
태희가 인우의 머리를 보듬어 주면서 하는 대사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실제의 이은주랑 겹쳐져서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군요.
어디 안 간다던 그녀가 매우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껏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는 중에 가장 슬펐어요.
<가을로>는 정말 이 가을에 딱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풍경도 그렇지만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게 이 계절과 딱 알맞죠.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백화점 사고로 인해 약혼녀를 잃은 남자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여자가 서서히 그 상처를 회복해 가는 일종의 로드 무비입니다.
오랜 연인인 현우와 민주는 결혼을 앞두고 혼수를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검사인 현우가 일이 있어서 민주를 먼저 백화점으로 보내죠.
약속 시간 6시. 현우가 백화점 앞에서 길을 건너는 시각은 5시 54분, 그리고 백화점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5시 55분, 백화점이 바로 그가 보는 앞에서 무너집니다.
이후 10년을 현우는 죽은 사람처럼 삽니다.
변호사가 되어 서민을 도와주고 싶단 그의 바람은 이미 과거의 꿈이 되었고, 그는 냉철하다 못해 기계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표정은 생기가 없고 왜 사는지 의미를 찾을 수가 없죠.
그런 그에게 죽은 약혼녀가 남긴 일기장이 주어집니다.
'현우와 민주의 신혼여행'이라고 씌어진 그 일기장은 방송국 PD인 민주가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연인을 위해, 그리고 나중에 두 사람이 힘들고 지칠 때 다시 찾아오기 위해 사진을 찍고 지도를 그리고 느낌을 적고 사랑을 표현한 일기장입니다.
그 일기장을 들고 남자는 차례차례 여행을 떠나고, 죽은 약혼녀와 같은 말을 하는 어떤 여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점점 상처를 치유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주제 넘게 "그만 잊고 편안해지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힘드시겠지만 희망을 잃지 마세요. 산 사람은 또 산 사람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작은 위로를 던질 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번지점프를 하다> 때도 그랬지만 <가을로>에서도 김대승 감독님 특유의 연출법은 돋보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시간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번지에서 기차 지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면서 풍경이 여름에서 가을로 변하죠. 두 주인공이 사랑을 시작해 시간이 흘렀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름다운 판타지(번지에서 기차 차창에 비친 인우와 태희의 모습 같은 거요. 현실에선 인우, 현빈으로 남남(男男)인데 차창에 비친 건 남녀죠)를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감독 중 멜로 라인을 이렇게 디테일하고 아름답게 연출하는 데 있어서는 가히 김대승 감독님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스릴러였던 <혈의 누>에서조차 멜로 라인은 있었고, 그게 튀지 않고 영화속에서 자연스레 묻어났었거든요.
특히나 이번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경은 절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합니다.
다만 현우 역을 맡은 유지태 씨가 한겨울에 가을 옷이나 여름 옷을 입고 연기를 한 탓이지 얼굴이 얼어서 감정이 풍부하게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민주 역의 김지수 씨도 약간 튀는 느낌이 있지만 판타지 느낌이 강해서 그런 대로 보완이 됩니다.
게다가 민주라는 캐릭터는 남자고 여자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한 그런 캐릭터입니다.
예쁘고 씩씩하고 용기 있고 빛나는 그런 여자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세진 역을 맡은 엄지원 씨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싶습니다.
상처를 간직한 슬픈 눈의 여자를 정말이지 잘 소화해 냈거든요.
화면에 보이는 그녀는 정말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더군요.
사실 <가을로>는 김대승 감독님이 <혈의 누>를 찍기 전부터 인연이 있던 영화입니다.
<혈의 누>를 먼저 계약한 관계로 <가을로> 제작이 미뤄졌는데, 감독님은 이병헌 씨와 이은주를 캐스팅하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당시 이병헌 씨의 선택은 <중독>이었고, 이은주 씨야 이야기하면 가슴 아프죠....(<중독>은 이병헌 씨의 연기와 음악이 그나마 살려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미연의 몸을 사리는(?) 연기와 너무 친절히 설명해주는 연출 때문에 감동이 반감한 영화 중에 하납니다.)
만약 이은주 씨가 캐스팅 되었다면 그녀는 민주였을까요, 세진이었을까요.
사실 민주 역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또 죽는 역할이니까 그게 아쉽네요.
영화 보는 내내 너무 울어대서 집에 돌아올 때쯤 머리가 너무 아팠지만, 또한 웃을 수도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엉망진창이었는데 덕분에 좀 개운해졌어요.
일상이 지치고 힘든 사람, 상처를 보듬어 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본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Artemis
p.s.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면서 난폭토끼 님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오로지 PgR 내에서만 대화를 나눴을 따름이지만 PgR 내에서만큼은 저만큼이나 <번지점프를 하다>를 사랑하셨던 분이거든요. 자신에게는 <어린 왕자>와도 같은 영화라고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난폭토끼 님이 <가을로>를 보신다면 <번지점프를 하다>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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