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일제 치하 도쿄제대 조선인 유학생 일람의 후속 격입니다.
이번에는 일제가 설립한 괴뢰국가 만주국의 최고 학부 역할을 수행한 건국대학을 소재로 다뤄보았습니다.
1. 만주국의 최고학부 건국대학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 건국대학은 이 만주국의 최고학부로 1938년 설립된 대학입니다. 일본이 직접 운영하거나(여순공과대학), 또는 일본 유관단체가 운영하는(만주의과대학) 다른 만주의 교육기관과 달리, 건국대학만큼은 만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설립하고 관리하는 대학이었습니다. 법령상으로도 만주국의 국무총리가 대학 총장을 겸임한다는 점이 상징하듯, 건국대학은 민간이 아닌 새롭게 “건국”된 만주국의 국가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그 설립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관료 양성소로 출발한 도쿄제국대학의 설립 경위와 유사합니다.
대표적인 괴뢰국의 예시로 만주국이 늘 언급되는 것처럼, 이 나라는 만주족을 중심으로 한 제대로 된 민족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특히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의 주도로 설립된 인공적인 국가였기 때문에, 결여된 민족주의 대신 만주 지방, 아니 일제 치하 전역의 각 민족이 함께 나라를 만들겠다는 오족협화라는 슬로건으로 갈음하려 했습니다. 국적 없이 누구나 와서 ‘만주국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만주에는 그릇되었을지언정 자기만의 이상낙원을 건설하고자 했던 일본 관동군과 추종자 또는 사업 성공을 위해 뛰어든 일본인들,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3등, 4등이 아닌 2등 신민(만주국이 오족협화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각 민족 사이에 위계가 있었고 그에 따른 이점을 누리기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흥미를 끕니다.)으로서의 신분 상승을 위해 고향을 떠난 조선인들, 원래 살고 있던 중국인과 만주족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었습니다.
그런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 역시 만주국의 구성을 반영하듯, 만주국뿐 아니라 일본 본토, 조선 등 일제 영역권 전체에서 학생을 모집했습니다. 그래서 건국대학에는 조선에서 온 조선인, 그리고 한말~일제강점기 시기 이주한 간도 거주 조선인 등이 있었습니다. 건국대학의 학사과정은 일본 학제에서의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전기 3년, 그리고 대학 본과에 해당하는 후기 3년으로 편성되었습니다. 학과는 정치, 경제, 문교 3개 학과로 구성되었는데, 일본의 후발 제국대학이 이학부, 공학부 등 엔지니어 육성을 중시하여 자연계 학부로 출발한 사실과 대조적으로, 오로지 문과계 학과만을 편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국대학의 강한 관(官) 지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학비 지원, 기숙사 생활, 졸업 후 고등관(고등문관시험 패스자 상당) 취직 보장이라는 특혜를 제공하여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 했습니다.
2. 같지만 다른 제국대학의 변형
건국대학은 분명 일제 대학 체계의 이식이었으나, 원본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전기, 후기 6년 과정 중 전기과정, 그리고 기숙사 생활이 대표적인데, 자유로운 교양 습득을 중시했던 구제 고등학교나 대학 예과(심지어 식민지인 경성과 타이베이의 제국대학 예과도 어느 정도 그랬다.)와 달리, 건국대학의 생도들은 근로 실습과 군사훈련을 이 시기 받아야 했습니다. 일종의 교련이었던 셈입니다. 또, 일반교양 외에 오족협화 등의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학습해야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정훈교육, 그리고 중등-고등교육 과정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국민윤리 교과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건국대학의 기숙사
물론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일본 본토보다도 훨씬 접하기 쉬웠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련과 정훈이 혼합된 기숙사 생활, 중국인 학생들의 민족주의 운동 탄압 사례 등으로 미루어볼 때, 오히려 이는 반자본주의 경향이 어느 정도 있었던 만주국의 통치 세력 관동군의 영향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제의 군국주의화, 식민지 지배 등으로 인해 일본, 그리고 조선의 제국대학 역시 통제가 강화되고 있었다고는 하나, 만주국은 한층 더 국가주의화가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의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의 교육과도 퍽 유사합니다. ‘만주 모던’ 내지 한국의 발전국가 모형, 나아가 일본의 전후 국가 주도 성장을 만주국 체험에서 찾는 주장이 있는데, 교육에서도 어느 정도 만주국의 ‘실험’이 이식된 것 같습니다.
3. 패망 이후의 건국대학 출신들 – 창군의 주역?
늦은 설립연도에서 보듯 건국대학이 보장한 고등관 임용은 막상 초기 1, 2기수, 그나마도 반년 정도 일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일 경력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건국대학 설립 이전 만주로 생활 터전을 옮긴 이들에게서 발견되지, 건국대학 출신에게는 그러한 경력이 드문 편입니다. 대동학원을 거쳐 만주국에 근무한 대통령 최규하를 비롯해, 만주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신경군관학교 출신들, 만철 조사부, 기타 만주국 소재 각종 기관 종사자들이 전자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건국대학 3기 이후의 기수는 다른 동시기 일본 소재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고 소련이 만주를 점거하자 건국대학은 폐쇄되었고, 징집지에서 해방을 맞은 건국대학의 학생들은 원 소속 국가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국인 건국대학 출신자 중에는 우선 남한으로 귀국하여 창군 과정에 뛰어든 인사가 많았습니다. 군대식 기숙사 생활과 학병 세대라는 경험을 모두 겪었기 때문일까, 건국대학 출신들은 군이라는 조직문화에 친숙한 인재들로서 창군 과정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민기식(육참총장), 강영훈(국무총리, 예비역 육군 중장) 등 다수의 학병 출신 창군기 거물이 배출되었습니다. 이는 군에 굳이 뛰어들지 않으려 한 다른 제국대학 출신들과 대비되는 점입니다.
민기식 전 육군참모총장
강영훈 전 국무총리
둘째, 다른 구제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계에 뛰어든 인사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문교학과(교육학과)가 주요 학과로 독립되어 있었다는 특징에 기인한 것인지 서울사대, 고려대 등 각 대학 사범대학에 자리 잡은 이들이 돋보입니다. 건국대학은 철학 내지 철학과의 하위 분과로서의 교육학이 아닌, 국가 윤리의 체득을 목적으로 하는 문교학과를 정치, 경제학과와 병립시켜 설치하였습니다. 이 문교학과를 거쳐간 사람들이 해방 후 한국의 사범대학에 자리잡았다는 점도 흥미로운 점입니다.
셋째, 해방으로 학업을 아예 마치지 못하고 재학 중 귀국한 사람들은 다수가 경성대학 학부와 예과에 편입되었습니다. 일본의 상황과 비교하면 꽤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일본의 경우, 정부 당국이 관할하는 식민지의 교육기관(경성제대, 대북제대, 여순고, 대북고 등) 출신자는 폭넓게 본토의 구 제국대학과 구제 고교로 편입 조치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국대학 출신에 대해서는 어쨌든 외국(만주국)의 대학이라는 이유로 그 정도까지 편의를 봐주지는 않았습니다. 교육 이력을 까다롭게 판정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관립대학 편입을 포기, 사립대학인 와세다대 등에 편입한 일본인 학생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그러한 엄격한 선별 없이 대체로 무리없이 경성대학에 편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해방을 맞아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국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북으로 간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창군 과정에 뛰어든 인사가 많았다고는 하나, 만주라는 지역 특성상 이북 출신이 많았을뿐더러, 일찍이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 2세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북행을 택하거나 소수는 귀국하지 않고 만주에 잔류, 중공 내 조선족으로서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학병 징집 과정에서 소련 사할린에 억류된 오창록(93년 한국 영구 귀국), 4.19 혁명 직후 혁명 분위기를 틈타 동창들을 포섭하려 했던 남파 간첩 고대유(체포 후 전향, 복역 후 전주 낙향) 등 특이한 삶을 살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첨부는 건국대학을 거쳐간 조선인 입학생 명단입니다. 북행 또는 간도, 사할린 등에 남은 경우 적색 란으로, 각종 군 장교로 임관한 경우 녹색 란으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