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교황청은 신생국가 대한민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입니다. 1947년 8월 교황청은 패트릭 번 주교를 초대 주한 교황순찰사로 임명했고, 10월에는 "대한민국을 합법적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문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승인받게 된 것은 1948년 12월의 일입니다. 물론 1947년과 1948년 사이 대한민국도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분주히 노력했습니다. 1948년 9월 프랑스 파리 제3차 유엔총회에 장면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당시 소련을 위시로한 공산권 국가들의 방해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은 교황청의 도움을 요청했고, 당시 교황 비오 12세는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설득했습니다.
장면으로 말하자면, 그는 일제시대 당시 미국에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건너가 맨해튼 컬리지를 졸업한 미국통이었습니다. 졸업과 같은 해 1925년, 그는 한국인 신자 대표로 교황청을 방문하여 한국인 성인 시복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한국인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한 사례로는 거의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귀국 후에 가톨릭 선교활동을 도왔고, 그 과정에서 당시 한국에서 포교활동에 열심이던 패트릭 번 주교와 친분을 맺었다고 합니다. 이 인연은 후일 한국이 독립된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그 결과 한국은 비교적 빠르게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패트릭 번 주교는 장면 사절단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을 위한 소개장을 10통을 써주었고, 교황청에도 따로 이들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시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교황청 소속 주교의 소개장은 무척 도움이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파리에 도착한 사절단은 당시 유엔의장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으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고, 그대로 귀국할 수는 없으니 로마 교황청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장면은 교황을 알현하면서 대한민국 승인을 위해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 부탁을 받은 비오 12세는 직접 교황청에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명을 하달합니다. 그 결과 장면은 결국 유엔총회 의장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가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합니다.
그 이후에도 교황청은 대한민국과 계속 인연을 맺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에 맞서는 구심점이 되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고, 또 김대중이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살리기 위해 서한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전두환 정권 당시 방한하였는데, 첫 공식일정으로 광주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이 반대했음에도 전남도청과 금남로 일대 방문을 관철하였고 심지어 한센인들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던 소록도를 방문했습니다. 그의 방한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무단통치에서 일종의 해빙기로 전환하였고,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높아져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주교황청 대사 중에 유명한 사람은 성염 대사입니다.
그는 2003년 교황청에 부임하여 2007년까지 대사직을 맡았는데, 그는 다른 것보다 라틴어 사전과 라틴어 강의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한양대, 한국외대,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서양고전학회 회장, 서양중세철학연구소 이사장 그리고 한국가톨릭철학회 이사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또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운영위원을 맡았었죠.
현재 주교황청 대사를 맡고 있는 자는 이백만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도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매일경제, 한국일보, 한국경제 등을 거친 언론인으로, 참여정부 시절 현 민주연구원 원장인 양정철과 함께 청와대 홍보실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 양정철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그리고 후일 유시민과 함께 국민참여당을 창당하기도 했고, 정계에서 실패한 후 자연인으로 돌아가 노무현재단에서 일하였고, 나중에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제3세계 선교활동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2017년 12월 문재인 정부의 첫인사로 주교황청 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커리어로 보면 친노/친문의 핵심인사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부요직이나 정당에 등용되지 않고 교황청으로 파견 된 게 의미심장합니다. 그만큼 현 정부가 교황청 외교를 비중있게 보고 있는건가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여간 흥미로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