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L 관전일기 - CYON 2005 온게임넷 1st 듀얼토너먼트 C조 (2005년 2월 22일)
세상의 중심에서 ‘밸런스’를 외치다
각 종족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공정한 경기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것이 ‘공식맵’의 임무라면, 요즘의 온게임넷 맵들은 공식맵 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종족 간 승률의 균형이 무너진 맵에 대한 문제 제기가 팬들의 몫이 된 것은 팬들이 갑자기 똑똑해져서가 아니다. 밸런스 붕괴의 속도와 규모가 인내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악화되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프로토스의 무덤 <머큐리>에서 ‘폭풍’ 홍진호 선수를 잠재우며 프로토스 팬들의 심장을 용솟음치게 만들었던 ‘영웅’ 박정석 선수의 “<발해의 꿈>에서는 프로토스가 이길 방법이 거의 없다. <머큐리>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는 발언은, 이미 공론화 되고 있는 <알케미스트>에 이어 <발해의 꿈>을 밸런스 붕괴의 강력한 차기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다. 왜? “<아방가르드>에서 테란과 프로토스가 격돌하는데, 프로토스 본진을 섬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이 지독한 가정의 연장선에 <발해의 꿈>이 서있기 때문이다.
박정석 선수는, 비록 <발해의 꿈>에서 본진간의 가까운 동선을 극복하지 못하고 전상욱 선수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동료인 ‘정석’ 김정민 선수를 <레퀴엠>과 <알케미스트>에서 연달아 잡아내며 끝내 차기 스타리그에 안착했다. 남은 프로토스 플레이어는 손영훈 선수, 박용욱 선수, 박지호 선수. 박정석 선수에 이어 ‘3경기 <발해의 꿈>, 5경기 <알케미스트>’라는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낼 또 다른 프로토스의 등장을 기다리는 프로토스 매니아들의 가슴은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다.
1경기 <레퀴엠> : 전상욱(T3) vs 조용성(Z12)
정확한 오버로드 정찰에 이어 저글링 푸시까지, 조용성 선수의 시작은 운과 빌드의 절묘한 조합 덕분에, ‘경기 초반에 강하다’는 전상욱 선수를 몰아붙이기에 충분했다. SCV까지 동원해 수비해야 했던 전상욱 선수는 별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채 2배럭 바이오닉 부대로 진출을 도모했고 조용성 선수의 앞마당 멀티 방어 라인이 단단하지 않음을 확인하자 고민 없이 달려들었다.
저글링과 성큰 컨트롤로 충분히 방어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조용성 선수의 뒤늦은 반응은 저글링과 성큰의 각개격파를 불러왔고, 맥없는 패배를 통해 ‘특별한 전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범한 기본기’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2경기 <레퀴엠> : 박정석(P6) vs 김정민(T3)
<레퀴엠> 처럼 본진 간 동선이 가까운 맵에서 김정민 선수의 깊은 조이기 라인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다가, 패하면 조용성 선수의 저그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박정석 선수가 꺼낸 필승 카드는 ‘다크템플러 드랍’. 박정석 선수의 강력한 1질럿-3드래군 푸시는 김정민 선수 특유의 침착한 대처에 저지 당하고 말았지만, 이런 과감한 액션은 다크템플러 드랍을 가리기 위한 사전 작업에 불과했다.
김정민 선수는 상호간 위치의 유리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앞마당 멀티를 시도하며 병력을 전진 배치 시켰다. 물론 이는 박정석 선수가 기다렸던 타이밍. 박정석 선수는 두 기의 다크템플러를 김정민 선수의 본진에 난입시켜 상대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린 후, 동시에 다수의 멀티를 확보하여 단숨에 자원의 우위를 차지, 대규모 물량으로 김정민 선수의 주력 병력을 궤멸 시키며 승리하였다.
<레퀴엠>의 3시와 6시의 관계라면, 앞마당 멀티를 거점으로 삼아 차근차근 전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일반적인 정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김정민 선수였을 터이다. 김정민 선수의 힘이 그런 평범하면서도 안정적인 운영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전력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같은 팀의, 게다가 당대 최고의 프로토스 플레이어에게 조차 정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3경기 <발해의 꿈> : 박정석(P11) vs 전상욱(T1)
혹자는 <발해의 꿈>을 <홀오브발할라> 혹은 <네오 포비든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반섬맵으로 규정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너무 큰 오산이다. <홀오브발할라>와 <네오 포비든존>에서는 선멀티 플레이를 시도하는 테란과 프로토스 모두에게 많은 고민이 요구된다. 빠른 테크트리에 기반한 드랍십/셔틀 게릴라로부터 본진과 멀티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본진과 멀티가 서로 고립되어 있으므로.
하지만 <발해의 꿈>에서는 프로토스만이 이런 고민을 안게 된다. 먼저, 프로토스가 테크를 포기하고 멀티에 욕심을 내면, 대륙에 안착한 팩토리에서 생산되는 테란의 병력에 멀티 효과를 빼앗기게 된다. 테란은 드랍십이 없어도 병력을 대륙에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토스가 자원을 포기하고 빠른 리버 드랍을 시도한다 해도 큰 효과를 거두기는 사실상 어렵다. 본진과 멀티가 나란히 붙어 있기 때문에 테란은 손쉽게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아방가르드>에서 테란과 프로토스가 격돌하는데, 프로토스 본진을 섬으로 만들어 버린 경우’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문제점은 고스란히 경기에 반영 되었다. 전상욱 선수는 거침없이 더블커맨드를 시도하였고, 박정석 선수는 대륙에 게이트웨이를 건설하기 위해 빠른 테크트리를 선택하였다. 박정석 선수는 소수 드래군으로 전상욱 선수의 앞마당을 괴롭혀보지만, 좋은 위치의 시즈 탱크로 이내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박정석 선수라 할지라도 조기에 활성화 된 두 곳의 자원이 뿜어내는 테란의 물량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훌륭한 생산력으로 적절한 병력을 구성한 박정석 선수는 전상욱 선수의 방어라인을 해체해보려 하지만, 벙커를 비롯한 다수 시즈 탱크에 전멸당하며 쓰디쓴 패배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온게임넷 공식 맵은 팬들의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발해의 꿈>이 선수들에게 평등한 전장인가. 맵을 만들고 고르는 이들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선수들의 스타리그 진출 가능성은 종족과 무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4경기 <네오기요틴> : 조용성(Z5) vs 김정민(T1)
저글링 푸시를 통해 마린의 발을 묵고 동시에 가스 러시를 시도하는 조용성 선수의 ‘스타급 센스’는 칭찬해 마땅하지만, 역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기본기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겠다.
조용성 선수의 가스 러시 때문에 테크트리와 병력의 균형이 모호하게 되어버린 김정민 선수는 전진 팩토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위해 바이오닉 병력을 전진 배치시켰다. 이미 세 개의 해처리를 확보한 조용성 선수는 다수의 저글링으로 김정민 선수의 주력 병력을 잡아내려 했지만, 그 흔한 포위 공격 한 번 보여주지 못하고 저글링을 잃고 말았다.
최근 ‘구름 베슬’로 대 저그전에서 엄청난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는 ‘천재’ 이윤열 선수처럼 김정민 선수는 다수의 베슬을 동반한 한 방 러시를 감행하고, 베슬의 화학 공격에 보유 러커의 반 이상을 잃은 조용성 선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5경기 <알케미스트> : 박정석(P3) vs 김정민(T11)
대규모 접전이 애초에 불가능하고, 어느 시점까지는 상대의 진출을 소수 병력으로 지연 시킬 수 있는 복잡한 지형의 맵에서 테란이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는 다면 대부분의 프로토스 플레이어는 빠른 캐리어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김정민 선수는 박정석 선수의 1질럿-3드래군 푸시와 셔틀 1기를 동원한 난입까지 무난히 막아내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본진과 멀티 방어에 집착하며 경기의 호흡을 놓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련한 박정석 선수는 김정민 선수의 분위기를 정확히 감지, 세 개의 스타게이트를 동시에 건설하며 캐리어를 향한 의지를 다졌다.
6시 다리를 거점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김정민 선수는 많은 자원을 토대로 병력을 모은 뒤, 박정석 선수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정확한 판단이었지만, 그 속도가 문제였다. 평소의 김정민 선수가 보여주던 단단하고도 빠른 전진이 아니었다. 병력의 운용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듯, 골리앗과 탱크의 한걸음 한걸음은 무거웠고, 그 사이 박정석 선수의 캐리어는 김정민 선수의 멀티를 한 곳씩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캐리어에 커맨드 센터를 각개격파 당한 김정민 선수는 자원의 고갈 앞에서 차기 스타리그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고, 그의 팬들 역시 함께 눈물 흘려야 했다.
모든 투수가 시속 150Km로 공을 던질 수는 없지만, 어떤 투수라도 생각, 감정, 긴장 정도 등은 조절할 수 있다. 베스트 피칭은 여기서 나온다. 김정민 선수가 어느날 갑자기 ‘괴물’이나 ‘천재’ 혹은 ‘퍼펙트 테란’으로 진화하길 바라는 팬은 없다. 김정민 선수의 팬들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베스트 피칭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의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질까?
-sylent, e-sports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