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후배
대학친구 B의 하숙방은 남영역과 S여대에 둘러싸인 그 어느 중간에 위치해있었다. 이른바 역세권과 여대세권(?)이 절묘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룬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닌 곳이었다. 수도권과 서울 중심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데다가 단아하고 화사한 여대생들이 강의노트를 끼고 쉴 새 없이 오가는 길목의 한가운데였으니, 이른바 자취나 하숙을 꿈꾸는 남학생들의 성지(聖地)라 부를 만 했다. 조선건국 당시 태조 이성계에게 "한양의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동향으로 궁궐을 짓지 않으면, 왕위 장자(長子) 계승이 어렵고 나라에 큰 액운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던 무학대사가 만약 B의 하숙방을 직접 목격했다면, 그 신묘한 지리적 요건과 절묘한 형세에 무릎을 치며 감탄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날은 대학 수업을 마치고 같은 과의 또 다른 친구인 E와 내가 B의 하숙방에 처음으로 방문하는 날이었다. 단지 남자동기의 하숙집에 방문하는 일임에도 나는 이유 없이 설렜다.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지를 처음으로 순례하는 낯선 순례자의 기분으로 경건하게 그의 하숙집 앞에 당도했다. 처음으로 마주한 B의 방은 침대와 책상을 제외하면 제대로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소박하고 단출했다. 우리를 방으로 안내한 B는 잠시 공용 화장실로 나갔다. 좁은 방안을 둘러보며 하릴없이 앉아있던 우리는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B가 오기 전까지 인터넷이나 하며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그렇게 검은 모니터 안에 파란 윈도우 바탕화면이 열리고 둥근 'Internet Explorer' 아이콘으로 마우스 화살표가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혹시 B도 야동 보려나?"]
E와 나 둘 중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를 뜬금없는 말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우리는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했다. 평소 여색(女色)을 멀리하는 꼬장꼬장한 남원 선비 같은 스타일의 B였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야동을 볼까?', '한번 찾아볼까?' E와 내가 서로를 향해 눈빛으로 질문을 주고받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흥미로움과 궁금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했다. 우리는 B가 하드디스크 깊숙이 신주단지처럼 숨겨놓았을지도 모를 위험한 보물을 찾아내기 위한 원정대를 꾸리는데 본능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화장실로 간 친구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우선 복잡다단한 윈도우 세계를 향한 창을 넘기 전에, 우선 어디부터, 어떤 식으로 빠르게 접근할 것인지 우리는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우선 프로그램 파일 검색부터 해보자."]
미지의 세계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마법사 간달프와 같은 노련한 눈빛으로 친구가 말했다.
["아냐. 그냥 C드라이브부터 직감적으로 찾아들어가 보자. 그러다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겁 없는 프로도처럼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의견을 제시했다.
["흠.. 언제 C드라이브 폴더를 하나하나 클릭해서 찾아? 그리고 과연 그냥 순순히 C드라이브에 저장을 해뒀을까? 외부저장 메모리나 보조드라이브부터 우선 뒤져 봐야하는 거 아냐?"]
우리의 토론은 제법 열띠고 진지해져갔다.
["아냐, 그건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 녀석들이나 쓰는 방법이지. B는 혼자 살잖아. 입장 바꿔 생각해봐. 굳이 외부저장 메모리까지 연결해가며 저장하는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을까?"]
진화심리학(?)을 적절히 곁들인 나의 반박에 E의 눈빛이 살짝 움찔하며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없었다. 마치 몸 전체가 응급 상황인 교통사고 환자의 수술을 눈앞에 두고 복강부터 열 것인지, 골반 내 출혈부터 잡을 것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빠르게 결론을 매듭짓고 메스를 잡아야했다. 나는 바쁘게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 일단 날 믿어봐. 우선 C드라이브부터 가보자."]
잠시 머뭇거리던 E는 이내 신뢰어린 눈빛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난 뒤 마우스로 '컴퓨터'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예상치 못한 뜻밖의 여정에 몸을 맡긴 '야동 원정대'는 그렇게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며 첫발을 내디뎠다. 초반 여정은 순탄했다. 우선 '컴퓨터-C드라이브'로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곤 여기서 마우스가 첫 번째로 멈칫했다. 1차 관문이었다. 약 열개 가량의 프로그램 폴더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는 신중해야했다. 여기서부턴 일종의 직관(直觀)과 감각의 영역이었다. 낯익은 두 가지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Windows'와 'Program Files'. 생각을 복잡하게 많이 할수록 불리한 싸움이었다. 나는 고민을 접고 손이 이끄는 대로 'Program Files'로 대담하게 찔러 들어갔다. 그러자 눈앞에 수십 개의 폴더가 주르륵 일렬종대로 늘어섰다. 죽 늘어선 폴더들이 찾아볼 테면 찾아보라고 비웃는 듯 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수싸움이자 승부의 핵심이었다. 우선 느낌이 가는대로 몇 개의 폴더를 급하게 더블클릭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몇 개를 더 클릭해봤지만 허탕이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일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하나 전부 클릭하는 노가다 전법으로 파훼하기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언제 B가 들이닥칠지 몰랐다. 이제는 철저히 B의 입장이 되어야했다. 거대한 벽을 마주한 이세돌처럼, 철저하게 나를 버리고 '내가 상대방이라면..'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B의 입장에서 편견 없이 순수하게 모니터를 바라봐야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일단 밑으로 내려 보자. 스크롤를 쭉 밑으로 내려 보니 하단에는 'Window'와 관련된 폴더명들이 쭉 나열돼있었다. 왠지 그 중 맨 마지막 파일에 눈길이 갔다. 밑져야 본전인 상황에서 주저 없이 더블클릭을 했다. 하지만 역시나 뜻 모를 이름의 폴더들이 나열되어있을 뿐이었다. 얕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였다. 순간 그 폴더들 사이에서 하나의 한글제목이 한줄기 빛처럼 눈에 들어왔다.
[할미새사촌]
다른 폴더명들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이 한글제목의 폴더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이 깊숙한 C드라이브-Program Files-Windows 폴더 안에서 목적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어색한 '새 이름'의 한글 폴더가 반짝반짝 자체발광하고 있었다. 무언가 모를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급하게 폴더를 생성하고 난 뒤 미처 폴더명을 수정하지 못한 듯한 촉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E와 나는 동시에 서로를 마주봤다. 우리는 같은 예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할미새사촌'을 더블클릭했다. 그러자 딱 한 개의 동영상 파일만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아리 후배>.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동아리 후배.. 동아리 후배라.. E와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열어본다?" 나는 가위를 들고 시한폭탄이라도 마주한 폭탄해체 전문가처럼 진지하게 물었다. E는 자못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마우스를 가져다대었다. 잠시 후 모니터 화면에 곰발바닥 아이콘을 지닌 동영상 플레이어 하나가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드디어 B의 동아리 후배와 정식으로 마주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드디어 등장한 화면 속 B의 동아리 후배는 도대체 어떤 동아리 소속의 후배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저 헐벗은 몸과 무언가 애타는 듯한 눈빛으로 외설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스타일의 동아리 후배였다. 하숙방 안에는 고요한 침묵과 함께 격정적인 일본어만이 맴돌았다. "에이~ 뭐야 이건 크크", "쯧쯧.. 이놈은 뭐 이런 걸 보냐~" 영상 따위에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짐짓 허세어린 대화를 주고받는 E와 내 눈은 말투와는 달리 붙박이처럼 모니터에 고정되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였다. 우리는 B의 동아리 후배를 조금 더 자세히 소개받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곤 원정대 대원으로서의 나의 임무를 떠올렸다. 이런 영상은 평소 선비와 같은 강직함을 지닌 친구 B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마치 절대반지를 손에 들고 '운명의 산' 분화구 용암 앞에 선 프로도처럼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거.. 그냥 확 삭제해버릴까?" 한참 동아리 후배와의 아이컨택에 빠져있던 E는 잠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친구는 굳은 표정과 눈빛으로 말 없이 물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나는 다시 깊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사실 B의 허락 없이 오늘 잠시 그녀와 셀프소개를 받았을 뿐, 그녀는 내 동아리 후배가 아닌 엄연히 B의 동아리 후배였다. 내겐 B와 그녀 사이를 갈라놓을 그 어떤 권한도 없었다.
그래, 이건 예의가 아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B가 그녀와 정식으로 작별을 할 기회와 권리 정도는 지켜줘야 했다. 그것은 순전히 B의 몫이었다. 아무리 거칠 것 없는 야동 원정대의 리더라지만 최소한의 상도덕은 지켜야했다. 나는 임무를 완수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동영상플레이어 우측 상단의 X(닫기) 버튼으로 마우스를 끌었다. 아쉽지만 이제 슬슬 동아리 후배와도 작별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마우스를 클릭하며 모험을 마무리하려던 찰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친구는 예의 그 순박한 얼굴을 들이밀며 들어오고 있었다. 아차. 순간 X버튼을 누르려던 나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당황한 나는 동아리 후배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침대위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도저히 이 4자대면(?)을 맨정신에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는 민망함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못하고 킥킥 터뜨렸다. 방문을 연 B는 눈앞에 펼쳐진 당황스런 상황에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고, E는 동영상 플레이어를 끄려고 애타게 마우스질을 했다. 자꾸만 삑사리 나는 E의 애타는 마우스질이 마치 누아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처럼 너무나 안타깝고 처절했다. 눈치 없는 동아리 후배만이 모니터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향해 애타는 눈길과 끈적한 몸짓으로 아이컨택을 해대고 있었다.
그 후 시간이 흘러서도 이 일은 두고두고 우리 사이에 회자되곤 했다. 너한테 그런 동아리 후배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며, 진작 소개라도 시켜주지 그랬냐며 명절날 돌아오는 떡국 먹듯 짐짓 시치미를 떼며 짓궂게 농담을 하곤 했다. 어쨌든 나는 그 후 친구 B와 그의 동아리 후배의 뒷이야기까진 알지 못한다. 그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까지는 차마 묻지 않았다. 친구가 그날 바로 동아리 후배와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고 결별을 선언했을지, 아니면 그녀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아끼며 총애했을지는 B만이 알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동아리 후배를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날의 모험 이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그 후 내 방에 있는 컴퓨터 안의 그 어떤 폴더도 '새 이름'으로 방치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