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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04 23:02:29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이후 - 4. 이건 내 역사니라


+) 이전 글 덧글이 늦었네요. 뒤늦게나마 달아놨으니 확인해 주세요~

인조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쭈욱 얘기했으니 이번 글에서는 소현세자 등 호란 후의 일들을 다루고, 나름대로 평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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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의 죄를 성토하고 들어와 대통을 이었음에도 그 치욕의 정도는 광해보다 백배나 되는 경우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천재와 시변이 광해에 비하여 더욱 많고, 흉년이 드는 일이 광해에 비하여 더욱 심하고, 인심이 원망하고 능멸하는 일이 광해보다 더욱 깊으며, 세 차례의 병화는 광해에게는 없고 전하께서는 당하였으니, 장래의 환란이 필시 이 정도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다면 당초에 거의(擧義 의를 일으키다)할 이유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인조 21년 9월 26일 유백증의 상소문

1. 소현세자와 강빈
1643년. 청 태종이 죽자 구왕 도르곤은 청 태종의 아들을 순치제로 앉힌 후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명은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상황이었고, 자기 가족이 죽은 걸 알게 된 오삼계는 산해관을 들어 바칩니다. 그리도 두꺼웠던 명나라의 대문은 안에서 열린 거죠. 도르곤은 곧바로 북경을 점령한 후 반대를 무릎쓰고 천도합니다. 이 도르곤이 한 짓이 많았는지 순치제는 그가 죽은 후 존호를 없애고 무덤에서 꺼내 해골도 훼손해 버렸다고 하네요.

59년, 순치제는 남명의 잔당들도 다 없애버리면서 청 제국을 공고히 합니다. 그리고 그를 이은 강희제는 청을 확실히 제국으로 만들죠. 이 쪽 얘기하면 너무 길 테니 포기합니다. orz 청이 명에 저지른 학살 얘기는 결국 못 했네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갑시다.

북경을 차지한 도르곤은 마침내 소현세자를 돌려 보냅니다. 인조 23년, 1645년 2월 18일 그는 꿈에도 그리던 서울로 돌아옵니다. 9년만에 돌아온 거였죠. 이 때 세폐도 절반 넘게 내려지고 이후에도 계속 줄어들면서 명 때와 다름 없는 동아시아 세계가 재구축됩니다.

소현세자에 대한 평이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염현집에서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기이한 물건만 모았다"고 까고 있죠. 공부는 확실히 싫어했나 봅니다. 서양인들과 교류도 트고 그 문물을 접한 게 바로 "기이한 물건들"이었겠죠. 하지만... 세자가 심양에서 한 걸 보면 오히려 반대되는 생각이 들죠.

실록 곳곳에는 세자가 용골대와 나눈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주로 양국의 문제에 대한 거였죠.

"이보다 앞서 용골대가 세자에게 횡의를 하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위협하는 말로 협박하자, 세자가 화를 내면서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고 하니,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하였다고 한다."
40년 11월 1일

웬수 같은 용골대에게 한 방 먹인 거라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죠. 이 외에도 시시콜콜 그에게 협박이 쏟아진 모양입니다. 명을 정벌할 때, 각종 척화신 문제, 최명길 문제 등에서 소현 세자는 언제나 참가했고,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들 하나하나를 슬기롭게 넘겼습니다. 가장 어려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한 거죠. 남한산성에서도 스스로가 나가겠다면서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기대와 인질로 있다는 처지, 그 때문인지 잠시 귀국할 때마다 백성들이 거리를 메워 가며 환영했습니다.

청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사서 농사를 짓고, 그걸로 무역을 하니 시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건물을 지을 때도 "지금 때가 어느 때고 장소가 조선도 아닌데 토목공사를 하냐"고 비판 당합니다. -_-; 광해군의 상처가 오래 가긴 한 모양입니다.

"아, 인정은 궁하면 반드시 통하는 것이요, 운세는 갔다가도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다. 앞서는 울었으나 뒤에는 웃으니 이는 천재일우의 시기이고 치욕과 허물을 깨끗이 씻었으니 의당 지금부터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이다"
세자가 돌아온 다음 날, 대제학 이식이 지어서 전국에 반포한 교서입니다. 이 일을 기점으로 삼아 다시 일어나자는 거였죠. 세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은 곧 나라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의미였을 테니까요. 그리고...

4월 26일 세자는 숨을 거둡니다.

23일 그의 병이 학질이라는 판명이 내려지고, 3일 동안 침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죠. 6월 27일, 그의 졸곡제 날 기사입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독살왕 이덕일이 내 놓은 그 많은 독살설 중에서 납득할 만한 유일한 건이죠. 정말 독살이었는지, 그랬으면 인조가 얼마나 관련 있었을지는 지금 다 밝힐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 건강 자체가 좋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후에 봉림대군이 침을 거부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에 이미 독살 혹은 의료 사고라고 여겼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야사에는 서양 문물을 보여줬다가 벼루에 맞아서 상처가 덧나서 (아마도 파상풍) 죽었다고 돼 있다는군요.

독살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인조가 의심받을 정황은 충분하다 못 해 넘칩니다. 설사 독살도 아니고 인조가 배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저게 부자지간 맞냐"는 생각이 들 정도죠.

인조 18년, 소현세자는 일시 귀국합니다. 이경헌의 요청이었는데, 청은 허락하고 대신 인평대군과 원손을 보내라고 하죠. 그리고 인조는 이경헌에게 곤장을 치고 유배보냅니다. 세자 일행을 환영하는 공식적인 환영도 없었고, 위에서 적었듯 백성들이 맞았죠.

이후 정명수가 세자빈의 부친상 때문에 세자를 귀국시키려 한다는 말을 하자 뜬금 없는 의논이 시작됩니다. 일시 귀국이었는데 영구 귀국으로 잘 못 들은 거죠. 왜 중한 것(세자)은 포기하고 가벼운 것(대군)을 취하냐는 거였죠. 누가 봐도 조선을 위해주려는 거였고, 신하들도 그렇게 말했지만 인조는 이렇게 말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쪽에서 내보내면 그만인데 우리의 말을 기다릴 게 뭐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변수가 많으니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도리어 의혹이 생긴다. 활에 한번 상처를 받은 새는 으레 이런 법이다"
43년 10월 11일

이전부터 청은 소현세자를 가지고 왕위를 갈까 하는 협박을 한 적이 있었죠. 이미 이 때부터 인조에게 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었다고 봐야겠죠. 이후 세자가 돌아왔음에도 환영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정승들이 상에 직접 참가하라고 건의했지만 이렇게 답 합니다.

"과인이 지금 재변이 참혹하고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을 걱정하느라 법 밖의 예나 외람한 거조는 생각이 미칠 틈이 없다" (44년 2월 9일)

세자가 귀국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디서 뭘 했다느니 하는 무미건조한 기록만 나올 뿐 반겼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세자가 죽은 그 날에도 "아픈데도 불구하고 상에 참가했다"면서, 아무리 아파도 당연한 걸 큰 일 했다는 듯이 적고 있죠. 효명세자가 죽었을 때 정말 슬퍼 했던 순조와 크게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세자의 장례식 역시 사대부의 예로 하라고 했고, 무덤도 멀다고 가까운 곳으로 옮기자고 하는가 하면 원손을 바로 세손으로 앉히라는 상소에도 크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졸곡제가 지난 지 단 이틀 후인 윤6월 2일, 폭탄 선언을 하죠.

"나에게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이따금 심해지고 원손은 저렇듯 미약하니, 내가 오늘날의 형세를 보건대 원손이 성장하기를 기다릴 수가 없다. 경들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시 세자의 큰 아들 석철이 11살이라 어리긴 했고, 인조 역시 4년 후에 죽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린 왕이 조선에 드문 게 아니었고, 영조 때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 원손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졸곡제 단 이틀만에 세자를 바꾸자는 뜻을 내비쳤고, 너무나도 완강했죠. 김류와 김자점 등이 인조의 편을 들면서 결국 봉림대군이 세자가 됩니다. 사관은 이에 대해서 김류, 김자점 등의 이름과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낱낱이 까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 왕을 욕 하지는 못 하고 "왕의 정상을 흐리게 했다"느니 하면서 에둘러 말 하고 있지만, 그 주체는 누가 봐도 인조입니다. 그리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죠. 다음 타겟은 소현세자의 아내, 강씨였습니다.

7월 24일, 강빈의 시녀였던 애란은 무당과 통했다는 이유로 국문당하고 유배됩니다. 이게 시작으로 다른 궁녀들 역시 고문 끝에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8월 26일, 강씨의 오라비 4명이 유배되면서 그 의도가 확실히 보이기 시작하죠. 강빈은 이미 참을 수 없었는지 대전을 찾아 항의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하죠.

다음 해인 46년 1월 3일, 전복 구이에 독이 들어 있다고 하자 곧바로 강빈을 의심합니다. 사관 역시 이에 대해 모함이라고 적고 있죠. 인조는 강빈을 별당에 감금하고 음식도 구멍을 통해 주라고 하며 그 궁녀들을 잡아 국문합니다. 이번에도 혐의를 시인하는 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죠. 2월 3일에는 아예 비망기를 내립니다. 일부를 옮겨 보죠.

"예로부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의 사이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율문을 상고해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이미 인조에게 강빈은 며느리가 아니라 무당으로 저주하고 음식에 독을 넣는 역적이었던 것이죠. 이번에도 김자점은 철저히 왕의 뜻에 찬성합니다. 그래도 자식이니까 은혜를 베풀라는 청에 인조의 대답이 정말 유명하죠.

"개새끼(狗雛)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2월 9일)
개 구자야 다들 아실 거고 취 자는 새끼를 뜻 하는 말로, 의역 같은 거 할 필요 없이 개새끼입니다. 왕의 입에서 이런 욕이 나온 것은 실록에서 달리 찾아 볼 수가 없군요. 임금이 엄한 말을 해도 글로 적을 때는 적당히 다듬는다고 하는데, 이 원문이 얼마나 독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2월 12일, 결국 그녀를 폐서인하고 사사하라는 명이 내려집니다. 이 때 최명길과 이경석은 시기라도 늦추기를 건의하려 했지만 말도 꺼내지 못 하게 했죠. 이후에도 최명길 등이 계속 반대의 뜻을 밝혔지만 3월 15일, 강빈은 사사됩니다. 이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적고 있슨비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 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강빈은 사사되기 전에 자식들에게 혈서를 써 소숙(인평대군? 봉림대군?)과 조씨(인조가 새로 들인 후궁 조씨)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1년 뒤 강빈 밑에 있었다는 시녀가 궁궐 곳곳의 장소를 밝히니 거기서 저주에 관련된 물건이 나오게 되죠. 당시에는 나오지 않았다가 1년 뒤에야 나온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 직후,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 셋을 제주도로 보냅니다. 첫째 석철, 둘째 석린이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되죠. 인조는 안타까워 하는 척만 하다가 넘겨 버립니다. 청에서는 이 때 이들을 데려가려 했는데, 조선에서는 두 명이 죽었다고 둘러댑니다. 재밌게도 이 이후에 두 명이 목숨을 잃죠.

셋째 석견은 유배될 때 네 살이었는데, 효종 대에 교동으로 옮겨졌다가 말년에야 경안군에 봉해집니다. 그리고 현종 6년, 22살의 나이로 형들을 따라가죠. 추노에 나온 귀여운 석견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추노를 다 보지 않아서 마지막에 석견의 혐의를 풀어달라는 말의 배경을 모르겠는데, 이 분위기는 효종 때에도 계속됐습니다. 따지고 보자면 효종은 자기 형 대신에 오른 자리였고,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강빈이 확실히 역적이었어야 했죠. 그는 강빈에 대해서 말하는 걸 금지하고 언급하면 역적으로 몰았습니다. 석견에 대한 대우가 좋아져 가는 것을 보면 아예 미워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 역시 이런 부분에서는 인조와 다를 바 없었죠.

이렇게 인조는 자기 자식을 역적으로 몰아 완전히 초토화 해 버립니다.

2. 살아남기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척화파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친청파를 받아들입니다. 39년 2월 7일에 인조가 한 말입니다.
"이 어찌 척화한 것이겠는가. 곧 나라를 그르친 것이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병자호란 직전에 청에 해명하는 사신을 보내려던 것을 척화파들의 반대 때문에 늦은 것을 탓 하는 말이니, 말 자체는 틀린 게 없죠. 하지만 이게 척화파에 대한 인조의 시선이라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달 말 김상헌과 정온을 다시 등용하라는 요청에도 이렇게 답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 몰라라 떠났으니, 지금 부르더라도 어찌 오려 하겠는가"

애초에 반청을 명분으로 반정했고, 호란 전만 해도 척화의 선두주자였던 그가 이런 행보를 보이는 거죠. 41년에는 땅에서 발굴한 골동품을 청 태종에게 바쳤는데, 황금 14조각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44년에 청이 북경을 점령하자 축하 사절을 보내야 된다며 강조했던 것, 청사가 왔을 때 은화 3000냥을 주자는 논의가 나오자 5000냥으로 올리는 등 완전히 친청파죠. 김자점과의 대화를 보면 극명히 드러납니다.

최명길에 대한 시선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명길을 곧바로 삭탈관직했고, 최명길이 자기가 죄를 다 짊어지지 않는다며 욕 했으며, 자기가 다 짊어졌다는 말을 듣자 "임경업에게 다 덮어 씌웠다"며 욕 했죠.

이에 대한 비판도 거세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맨 위에 건 유백증의 상소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히 줄일 수 있죠. "이럴 거면 반정 왜 했음?" 심기원의 역모 역시 이런 걸 아주 잘 이용한 예구요.

이런 친청 행보는 뭔가 다른 목표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의 살아남기를 위해서 한 거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반정할 때부터 그랬죠. 명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반정을 했음에도 그는 최대한 청과의 갈등을 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되면 태도를 바꿨죠. 반정 초기의 모습부터 모문룡을 제어하지 못 한 것, 33년에 있었던 청과의 갈등 모두 그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됩니다. 남한산성에서는 화친은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자기가 성을 나가느냐의 문제로 한 달을 버텼고, 이후에는 척화파를 모두 물리치며 친청 행보였죠.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된다는 최명길 등의 주장을 따르긴 했지만 걸리면 철저히 꼬리를 잘라냈습니다.

오히려 병자호란 이후에는 더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청에 의해 육로가 차단되고 인정은 해 줬지만 여전히 찬탈자로 보았던 명과는 달리 청은 국경도 연결돼 있고 자신을 확실히 인정해 줬으니까요. 이 때문에 한명기 교수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은 '추대된 군주'였던 인조가 - 늘 자신을 옭아매었던 - 인조반정의 명분을 뛰어 넘고, 반정공신들과 언관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조는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자기 권력을 위협했던 아들은 없어졌고, 인조는 그 씨까지 다 말려버렸죠.

왕조 국가에서 왕이 정권 유지에 급급한 것은 어쩔 수 없었고, 가장 중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복수를 꿈꾸었다느니, 소현세자가 친청이라서 몰아냈다느니 하는 말은 맞지 않죠.

3. 요약을 하자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선조에 대해 정말 간단하고도 정확한 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조는 유능했다. 다만 미쳤을 뿐."

임진왜란을 연재할 때 "선조가 저렇게 잘났었다고?" 하는 반응을 많이 볼 수 있었죠. 그랬던 분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지금까지의 시리즈들을 보면 인물이나 정책의 평가에 있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 많이 볼 수 있으셨을 겁니다. 제 내공 부족도 있겠지만, 그만큼 모든 게 한 마디로 말 할 수 없기 때문이었죠. 왕 하나, 인물 하나의 평가를 한 단어나 한 줄로 요약하는 건 교과서에서 외우기 쉽게 하는 것일 뿐이죠. (교과서에서 지적되는 문제 중 대부분은 결국 이겁니다. -_-; 줄일 수 없는 걸 줄인 거니까요.)

단적으로 얼마 전에 문제가 됐던 백선엽에 대한 문제를 보죠. "나라 구한 친일파". 전혀 양립할 수 없는 말임에도 둘 중 하나를 빼면 심한 왜곡이 돼 버립니다. 그나마 나라 구했다가 타락했다면 모르겠는데 나라 구한 게 뒤의 일이죠. 때문에 한국 전쟁을 얘기할 때 그의 친일 경력은 무시되다시피하고, 친일 경력을 얘기할 때도 한국 전쟁 때의 공은 완전히 평가절하 됩니다.

세상이 간단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선조에 대한 위의 평가가 가능했던 것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덕분에 그의 유능과 미침이 정말 제대로 드러났기에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럼... 이제 인조에 대한 평을 줄일 수 있을만큼 줄여 보겠습니다. 물론 그 부연 설명은 엄청나게 길 겁니다.

친명배금으로 인한 청의 침략을 불렀다. 이것이 인조에 대한 기존의 평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 내내 볼 수 있었던 것은 "갈팡질팡"입니다. 명분과 실리 안에서 계속 흔들리면서 명과 청 양쪽 어디에도 확실한 지침을 갖지 못 했습니다. 중시했던 것은 자신의 살아남기 뿐이었구요.

"갈팡질팡"과 "살아남기" 이것이 인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코드일 것입니다.

그에게도 억울한 점은 많을 겁니다. 태종과 세조처럼 주인공이 아닌 주역 중 한 명일 뿐인 상황에서 그의 정통성은 많이 약했습니다. 최소한 광해군 대의 잘못을 시정하는 것 뿐이었다면 그는 나름 괜찮은 왕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았죠. 유백증의 상소에는 "그냥 이어받은 것이면 모르겠는데 반정을 했으면서"라는 게 강조돼 있습니다.

이전에 얘기했듯 호란은 조선의 어느 왕이었더라도 막을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귀주대첩 시즌 2가 나오거나 명이 청의 침략을 결국 막아내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이미 이런 가정을 하면 대체역사소설이죠) 실제 역사대로든 대몽항쟁 시즌 2가 되든 결과는 비슷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조가 반정을 했고, 그 반정 명분이 정말 주요하게 작용했기에 그의 억울함을 인정해 줄 생각은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몰아냈던 왕은 조선의 어느 왕 중에서 유일하게 그 일을 하려고 했던 왕이었구요.


광해군으로 돌아가 볼까요. 광해군이 한 건 인조와 비교해 보면 정말 일관적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추출해 낼 수 있는 말은 "광기"입니다. 옥사를 할 때의 모습이나 궁궐에 대한 집착 등의 모습을 보면요. 명이 건재하고 청이 몰락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거기에 초점이 맞춰졌을 것입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외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중립 외교로 높여지진 않았겠죠. 그 정도로 그가 밀어붙인 건 일관적이었지만, 혹독했습니다. 자기의 왕권 강화 등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가 한 것들이 여기에 얼마나 관련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옥사는 효과야 있었겠지만 이이첨의 권력만 높여주고 반정의 명분을 만들었고, 궁궐 때문에 백성들도 고생시켰으며, 후금에 대한 외교는 그의 정치생명을 완전히 깎아버렸죠.

다만 그렇기에 그가 한 외교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치생명"과는 전혀 관련 없는 문제였으니까요. 심하 전투 때의 큰 피해로 "실리"를 의심받지만, 그 때문에 이후에는 명에 대해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아무리 누르하치 때였다 하지만 후금과의 갈등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아쉬움이야 많이 남지만, 이게 "시도" 수준이었다는 것도 확실하죠. 본게임은 누르하치가 죽은 이후부터였습니다. 홍타이지부터는 설령 그였더라도 계속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구요. 하지만 그 시도 자체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결국 그 외에 그의 공이라 할 것은 없다시피 합니다. 외교를 빼더라도 그가 쫓겨날 이유는 충분하구요. 광해군부터 인조까지 도원수에 올랐던 장만이 궁궐 건축을 계속 탓 하고, 무엇보다 그 최명길이 반정의 주역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죠.

+) 광해군에 대해 아쉬운 것이 그의 군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제가 광해군 대에 군사적인 방비도 강화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인조 대에 이괄을 올려보내면서 "이런 걸 몇 년 동안 했으니 백성들이 고생한다. 이제는 북쪽에 병력 충원하지 말자"는 논의 뿐이니까요. 광해군 말에 명의 추가 징병 요청 때 "병력이 2만이었다"는 것도 있지만요. 외교와 군비, 양 쪽이 다 잘 돼야 중립 외교라 볼 수 있을 것인데 군비에 대한 연구는 없다시피하네요.

여담이지만 만약 광해군이 정권을 유지했고, 외교가 정말 잘 돼서 전쟁 없이 무사히 청이 중화 질서가 되고 정권도 이어졌다면 현재는 "자존심도 없이 알아서 기어서 정권 유지했다" 와 "외교 잘 해서 별 탈 없이 잘 넘겼다"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다시 인조입니다.

연산군이라는 창작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막장 왕과 근대로 역사가 넘어가는 고종을 제외하면 조선에서 가장 까이는 왕은 선조와 인조일 겁니다. 하지만 그 때의 모습이나 대처를 보면 선조는 정말 유능한 군주였다는 걸 느끼게 되죠. 단적으로 파천한 횟수만 선조는 단 1회, 인조는 3회입니다. 광해군의 패륜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 역시 아들에 대한 대처를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하죠. 최소한 광해군 때 죽인 이들은 정말 자기의 정치 생명을 제대로 위협한 거였죠. 옥사 자체야 광해군 대가 더 심했습니다만 인조 대에도 옥사는 적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죽은 이들 역시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리고 의주부터 경기도까지 초토화 되고 수십만의 백성들이 잡혀가는 일을 당하게 한 왕이었구요. 소현세자는 그렇게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그를 옹호해 줄 마음은 싹 사라집니다.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심화되었다가 크게 비판받고 왠지 그 반대급부로 인조가 띄워지는 일도 볼 수 있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유백증의 말을 다시 옮기며 글을 맺겠습니다.

"이렇다면 당초에 거의할 이유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역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게 태종과 세조입니다만, 그들은 명군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정 때문에 나오는 윤리적인 부분과 그 한계로 욕 먹죠. 반정을 했다면 그 평가는 더 까다로워져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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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얘기는 이걸로 맺겠습니다. 뭐 결론을 얘기하면 둘 다 실패한 왕이고, 욕 먹어 마땅한 왕이었다는 거겠죠. 다만 그 세부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구요.

앞으로 하나, 혹은 둘로 나눠서 효종, 현종 대로 이어지는 모습들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끝이 보이네요. 제목은 "북벌의 깃발 아래"입니다.

제목을 추노에서 가져왔는데, 추노 전체를 볼 엄두가 안 나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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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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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갈지자 행보. 애초에 이성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겠지요.
반정과 파천을 함께 했으니 공포심과 컴플렉스가 아주 적절하게 짬뽕 된 최악의 상황입니다;;
구국강철대오
11/08/0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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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사실 실록에 저렇게 적힐 정도면 대놓고 사사한 것이나 다름없지요. 당시 분위기가 짐작이 됩니다.
호떡집
11/08/04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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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그의 아들, 그의 손자. 어찌보면 닮았고 어찌보면 완전히 다른 3명의 왕. 조선이 가장 위기였던 전란의 시대를 살다간 세 왕의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만약 내가 저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를 고민해 보기도 하구요.

이미 흘러간 역사를 가정해보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지만, 그보다 재밌는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밌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무리수마자용
11/08/05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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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었다면 정통성문제때문에 모문룡을 제어못하지늠 않았을겁니다 뭐 다른이유로 쳐들어올수는 있넜겠지만요 [m]
11/08/0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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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이산인가 하는 사극을 감독한 분이 사극쪽으로는 유명한 분이라고 하던데
차마 소현세자에 대한 사극은 너무 슬프고 처참해서 만들지 못하겠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글로만봐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더욱 나을 인생이겠구나 싶습니다
생에 대부분을 볼모로 지내다 아비에게 죽음을 당하고 부인과 자식들도 죽음을 당하고 단 한점이라도 복수를 하지 못했군요
어쩌면 이렇게 기록되어지고 회자되어지는것 자체가 복수일까 싶기도 합니다
나이트해머
11/08/05 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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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글쎄요? 별 기대가 안됩니다.
조선의 통치체제는 왕 혼자 독단적으로 끌고 가고 어쩌고 하는 시스템이 아니죠. 전제왕권이라고 하나 '공론' 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제도개혁도 이러한 공론의 구축에 심혈을 기울여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 거죠.
그런데 저렇게 공론을 무시하고 혼자서 나댄다? 그것도 '반정으로 즉위한' 왕의 아들이? 반정 한번 더 터지기 딱 좋죠.
11/08/05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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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질 내용은 북벌이군요.

수업을 들으며 저 북벌이란 것에 대해 알면 알수록 효종을 깔수 밖에 없던지라...

눈시BB님은 과연 북벌에 대헤 어떻게 썰을 풀어나가실지.... 기다리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1/08/05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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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역사를 보면 권력에 대한 집착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도 그렇고, 인조도 그렇고 결국 그에 대한 집착이 모든 것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것 하나만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실패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군요.
그리고 이어질 북벌 연재 기대하겠습니다~~
youngwon
11/08/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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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유백증의 상소문은 정말 인상 깊네요.
저는 이렇게 직접 상소문 내용을 올려주시는 게 참 좋더라구요. 아무런 해석없이 그 당시를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리고 계획하신 시리즈가 마무리 되시면,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폐주 연산에 대한 이야기도 기대해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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