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에도 많은 스포츠 경기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팀간 정기적인 프로리그가 열리는 종목으로는 쉽게 축구, 야구, 농구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구기(球技)로서 팀으로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종목들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고민에는 그닥 도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질적으로 개인 경기인데도 팀 및 팀리그가 공존하는 다른 스포츠를 찾아봐야 하는데, 이런 종목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탁구나 테니스, 배드민턴과 같은 테니스류, 그리고 사격이나 양궁, 골프 등과 같은 표적류, 이에 더해 권투, 태권도, 유도, 검도 등과 같은 격투기류나 당구, 볼링 등의 레크리에이션류에서 일부 단체전 형식이 존재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체전 등에서 학교대항전 형식이나 올림픽 등에서 국가대항전 형식으로 진행될 뿐, 정기적인 프로리그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하나 있을 뻔한 리그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씨름인데, 민속씨름으로부터 호기 있게 출발했던 프로(실업)리그는 LG 등 몇몇 대기업도 참여했지만 무수한 부작용 끝에 현재 유명무실한 상태입니다. 몇몇 선수들은 씨름판을 떠나 격투기장이나 방송 무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 경기로서 팀리그를 가진 스포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한 나라 안에서 일상적인 리그전을 갖기 위해서는 매일 같이 팬들이 꼭 찾아주어야 하는 정도로 어지간한 인기도가 없다면 무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개인 경기로서 팀리그를 가진 스포츠. 그나마 우리 이스포츠계와 현재 처한 상황이 가장 비슷한 경기는 아마 바둑일 겁니다.
1. 바둑 개인리그전
바둑은 현재 대략 14개 정도의 국내 프로 개인전 리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최자는 대개 신문방송사 등의 언론사로, 대개 총상금 1-5억 정도의 규모로 진행됩니다.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여성 기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기전이나, 노장 기사 혹은 고단진, 저단진 기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기전들도 존재합니다.
한 때 바둑 기전을 주도하던 KBS, MBC 등 공중파 방송은 서서히 발을 빼는 추세이며, 현재 대부분 바둑들은 전문 케이블 방송이나 인터넷에 의해 중계되고 있습니다.
2. 바둑 팀리그전
몇 년 전부터 한국바둑리그라는 이름으로 팀리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006년 현재 'KB 국민은행 2006 한국바둑리그'라는 명칭으로 총상금 30억 원의 규모로 Kixx, 월드메르디앙, 한게임, 제일화재, 파크랜드, 신성건설, 매일유업, 영남일보 등 총 8개 팀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이창호 9단 등 국내 최고의 프로바둑기사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지만, 한국바둑리그의 가장 큰 약점은 해마다 새로운 드래프트 방식으로 팀원이 구성된다는 점입니다. 즉 먼저 참여 기업이 정해진 후, 리그 시작 전에 해마다 팀별 새로운 선수들을 선발한다는 겁니다. 연봉 등은 있을 수 없고, 단지 팀이라는 이름만 걸리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둑 평론가 이홍렬 님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2, 3 년 전 가칭 금융단 프로리그가 추진된 일이 있다. 국내 굴지의 모 은행 관계자는 흔쾌히 출전을 약속하면서 “최고 선수인 이창호를 계약하려면 얼마쯤 드느냐”고 질문했다. 하지만 “당분간 드래프트 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관계자의 설명 한 마디에 분위기는 싸늘히 식었고 대회도 무산됐다. 그 관계자는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u>우리보다 규모가 10분의 1, 20분의 1에 불과한 은행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싸워야 한다면 지는 경우가 절반이란 얘기인데, 그런 위험한 무대에 자청해 나설 이유는 없지요.</u>”
이미 중국 바둑 프로리그는 자유계약 방식에 따라 팀별 소속 선수들을 선발하여 지속적인 리그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조훈현 9단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수준급 기사들도 옵션 계약 등에 따라 중국 구단 소속으로 리그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국내 바둑 팬들은 이러한 현상에 답답해 합니다. 한 팬 분(사이버오로 가화1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벤치마킹을 하자면 가까운데 아주 흡사한 모델이 있다. 바로 E-SPORTS에 투자하는 프로게임구단들이다. 스타크래프트는 전형적인 1대1 게임이다. ...... 바둑의 긴역사를 단 몇년만에 압축해서 따라잡고 이제는 그 운영에서 오히려 바둑을 앞서 나간다. 바둑이 스포츠로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고 있는 셈이다.
처음 스타가 시작될때만 해도 개인전 상금 위주의 대회가 전부였지만, 대기업이 관심을 갖고 프로게임구단이 창설되면서부터 선수들은 연봉계약에 의해 구단에 흡수된다. 구단마다 간판 스타들이 자리잡고 있기때문에 구단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고 필요에 의해서 트레이드를 하기도 한다.
작년 광안리 스타리그 결승전에 십만이 넘는 인파가 몰린 이유도 단 한가지, 재미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현주소는? 과연 그만큼 팬들에게 재미를 주고 관심을 끌도록 운영하고 있는가? 이제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금력과 기획력이 갖추어진 구단 중심의 운영으로 포커스가 이동해야 할 때가 됐다고 본다. 처음에는 스폰서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타리그처럼 개인리그도 병행해서 구단에서 연봉을 받으면서 개인 상금도 획득하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래야만 스폰서 업체에서 연봉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3. 바둑과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와 팀리그
아이러니합니다. 팀리그보다 개인리그 강화를 주장하는 스타크래프트 팬들에 비해, 바둑 팬들은 개인리그 축소와 팀리그 강화를 주장합니다. 또 다른 바둑 팬(네이버 블로그 김상훈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저는 한국바둑의 발전의 저해요소는 난립(亂立)된 국내기전에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에서 M&A(Mergers and Acquisitions)가 되듯이 바둑 기전에서도 M&A되는 방향을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내기전은 한국바둑리그가 중심이되어 다른 국내기전들을 흡수 통합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국내 프로야구리그나, 중국의 바둑리그, 미국의 메이져리그, 프로농구나, 프로아이스하키처럼 8개정도의 기업에서 참여하고, 각 기업에는 20 ~ 30 여명의 프로기사를 소속합니다. 경기의 수는 지금의 한국리그보다 대폭 증가하여, 하루에 8개팀 모두 대국을 하도록 합니다. 소속된 기사는 리그중 최대 대국수를 제한하여 한 명의 기사에게 의존하는 부분도 보완할 수 있습니다.
4. 바둑과 스타크래프트: 서로 다른 배경
프로바둑기사는 현재 211 명입니다. 현재 한 해 입단자는 남자 7명, 여자 2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 중 한국기원 연구생 중 6명, 지방 연구생 중 1명이 선발됩니다. 서울만 120여 명의 연구생들이 존재하며, 세계 대회 우승보다 국내 프로되는 일이 더 힘들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아마 대회 역시 세계아마바둑대회가 열릴 정도로 프로 대회 못지 않습니다. 유명 정치인이 바둑 대회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석하여 언론에 실릴 정도로 바둑은 팬 층이 넓습니다. 동네마다 곳곳에 바둑 학원이 존재하고, 학부모들의 열정 또한 이에 못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프로 바둑기사라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연봉도 전혀 받지 못하는 국내 프로기사들은 실제 가난하기 그지 없습니다. 개인리그전 상금은 억대 수준이지만, 이를 차지하는 기사는 전체 200여 명의 기사 중 5-6 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기사들은 공식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이 전혀 없는 셈입니다.
이들은 전국 곳곳의 기원이나 바둑 학원에서의 강습, 그리고 일부 명망 기사들의 경우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인에 대한 과외를 통해 그나마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단들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갉아먹는 묘혈(墓穴)일 수밖에 없습니다. 허영만 화백의 작품 속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옳지 못한 길입니다.
반 세기 넘는 역사를 가진 프로바둑기사가 현재 211 명임에 비해, 5-6년 남짓 프로게이머는 벌써 312 명입니다. 현재 개인리그는 3-4개 정도이며, 공식적인 아마 대회는 거의 1-2개에 불과합니다. 몇몇 정치인이 힘을 내고 있지만, 사회적 지위는 아직도 ‘오락꾼’ 수준에 불과하며, 여기 PgR21에도 프로게이머 고민 글에 대해 만류하는 목소리가 훨씬 높습니다. 동네에 피씨방은 많아도 이스포츠 학원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국내 프로게이머들의 생계 수단은 막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개인리그에서 상금을 따내지 않는 이상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은 전혀 없었던 거지요.
그러나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80년대 응씨배 석권한 조훈현 9단을 위해 중앙일간지가 일면 탑기사로 싣고, 국민적 카퍼레이드까지 열었던 바둑계에서도 실패했던 기업 스폰서가 국내 이스포츠계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피씨방에서 컵라면만 먹던 게이머들은 삽시간에 수천 만원에서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게이머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5. 새로운 실험: 중국 바둑리그
바둑 기전에 팀리그를 최초로 도입한 곳은 중국입니다(사실 중국은 원체 땅이 넓어서 전국적인 개인전을 치루기 힘들다고 합니다). 중국 바둑리그의 팀은 우선 한 기업체가 도시에 대한 연고를 갖고 바둑 구단을 만든 뒤 기사를 스카웃해 리그에 출전시키게 됩니다. 각 팀은 홈앤어웨이 방식으로 1년 동안 대국을 치르게 되는데, 매 라운드 4대 4 단체전으로 치르며 이기면 2점을, 2대 2로 비기면 1점, 지면 0점을 얻는 식입니다. 이렇게 도합 22번의 라운드를 치른 뒤 최종 승점이 높은 팀이 우승하게 됩니다.
중국 바둑리그에서 특징적인 것 하나는 매우 까다로운 계약 조건입니다. 몇 년 전 이창호 9단에게도 한 판 당 1만 달러씩 네 판을 두어줄 것으로 계약을 제시한 바 있었고, 이세돌 9단에게는 8판을 소화해야 하고, 한국 기전일정과 중국 기전일정이 겹치는 경우 중국 일정을 우선해야 하며, 조정이 되지 않으면 한국 기전을 포기해야만 하고, 팀내 공익활동 참가와 지정된 인터뷰 등 팀을 위한 활동에도 필수적으로 참여할 것 등의 조건으로 계약한 바 있습니다. 물론 계약 쌍방 중 누군가 지키지 못하면 책임을 져야(위약금을 내야) 합니다.
사실 개인리그 선수에게 기업이 연봉을 지원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박세리 선수를 지원했던 삼성의 경우는 소속이라기보다 개인 스폰서에 가깝겠지요. 과거 동양과 임요환 선수 정도의 관계입니다. 볼링이나 권투 등 다른 스포츠에서도 연봉이라 할만한 금액이 지불되지는 않는 것으로 압니다.
중국 바둑리그는 개인전과 팀전을 병행해야 하는 소속 기사들에게, 팀리그에 대한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내거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요약: 이스포츠(특히 스타크래프트)에서 참고할 만한 것들
첫째, 연봉제를 기본으로 하는 팀들의 형성은 스포츠의 발전에 있어서나 선수들의 경제적 안정에 있어서나 그 어떤 개인 경기들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대단한 성과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거품 때문이었든 한국적인 현상 때문이었든 간에 이 구조를 무너뜨려서는 안됩니다.
둘째, 참여 기업이 선수들의 개인전을 지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대신 각 기업들은 선수들과의 계약에 있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미리 명확한 조건으로 내걸어야 합니다. 이른바 옵션 조항으로, 각 선수의 능력에 맞게 “프로리그전에 몇 게임 이상 출전하여 몇 % 이상의 승률을 올려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를 초과 달성하면 보너스를 지급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위약금을 받아낼 수도 있겠습니다.
셋째, 개인리그가 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여성 및 아마추어 대회나 이벤트전도 늘어야겠지만, 정식 개인리그도 더 늘어야 할 것입니다. 바둑의 경우 오랜 전통을 가졌던 MBC 바둑제왕전이 폐지되었고 KBS 바둑왕전도 거의 사장된 시간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물론, 시청률이 나오지 않고 광고가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둑의 특성상 한 경기에 아무리 짧아도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사실 방송 중계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스타크래프트만의 독특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방송 이외에는 별다른 중계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죄송한 말씀이나, 방송사들에 의해 주관되는 리그전이 오히려 다른 개인리그들의 생성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현재 체계로서는 새로운 방송사가 생기지 않는 이상 새로운 프로 개인리그가 생기기 어렵습니다. 개인리그전 역시 협회로 창구를 단일화하고, 방송사는 협회와 중계권을 협상하는 것은 어떨까요?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만.
넷째, 협회의 중심은 프로리그전에 있어야 합니다. 협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모든 프로게이머들의 권리 향상이어야 합니다. 이들의 경제적인 안정을 위해 기업들의 팀 창설을 유도하고 이러한 기업들간 무한경쟁의 장인 프로리그를 활성화시켜야 합니다. 팬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프로리그를 좀 더 흥미롭게 구성하고, 이러한 팬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업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
예전부터 생각해오고 있었던 내용인데, 최근 사건들 때문에 마음만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졸필이라 오해를 살 수도 있을텐데, 더 많은 다른 스포츠들과 폭넓게 비교해보면서 이스포츠계의 미래를 고민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