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몰라 몰라. 각하 맘대로 해.”
“이 지지배가. 너 사형!”
엄마랑 생김새도, 하는 짓도 꼭 닮은 은실은 혀를 내밀어 메롱거리며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
다.
숨은 폐쇄회로카메라가 책상 바닥에 숨긴 모니터에 딸이 응접실을 지나 복도로 들어가는
모습을 비추었다. 엄마는 그제야 농담으로 가리고, 일상으로 버무린 위장을 치워 버리고는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의 기밀 폴더를 클릭했다. 노트북은 지문, 홍채, 성문(聲紋), 일주일에
한 번 바뀌는 난수 암호 등 길고 복잡한 4단계 보안 과정을 요구했다. 간신히 열람이 가능해
진 기밀 폴더의 이름은 “국제 비밀 결사 정보”. 세계의 이면, 국가의 윗선, 국제 정치의 뒤
편에 있는, 일반인은 절대 알지 못하는, 오로지 한 나라의 대통령과 한 나라의 정보부 수장
이 아니면 장관급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인, 기업가도 절대 알 수 없는 어둠이 엄마에게 활
짝 열렸다.
폴더가 열리면서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아까까지는
없던 두통이었다. 그것도 고약스러운 스트레스성 편두통이었다. 뇌에 고춧가루를 뿌린 번개
가 번뜩이는 듯한 느낌, 때론 뇌를 지나쳐 눈알과 볼, 턱까지 물들이는 듯한 그 경련이 엄마
를 엄습했다.
“휴…….”
근대적인 민주 국가 형성이 잘 쳐줘봐야 100년, 그나마 우리나라는 60년, 문자 기록으로 시
작된 역사시대가 2500년. 그러나 최고(最古) 기록이 1만 년 전일 만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조직도 한 수 접어줘야 하는 고대 조직들의 정보가 이 폴더 안에 있었다. 이들은 당
대 종교와 문화, 상업, 정치가 최고로 부응한 곳에서 생겨나 처음에는 친목회, 계모임, 동호
회, 길드 같은 자잘하고 단순한 생활 모임이었다. 그러나 유정란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보
통 첫째 아들 아니면 길드장이 추천한 후임 길드장이 이어받은 연락처, 모임 장소, 회비, 상
호 연구 기술은 신중함과 복리, 회원들끼리 교환한 결정적인 투자 정보로 엄청난 세를 불리
며 곧 껍질을 깨고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권력은 절대를, 연합은 제국을 지향하는 법.
이들은 엄청난 빠르기로 성장하다가 결국 레드 오션 모델의 끝자락의 교과서의 교범의 FM의
본때를 보여주는 식으로, 같은 성격의 모임들끼리 생존을 걸고 첨예하게 부딪히게 되었다. 일
단은 단순하고 화기애애했던 태생답게 서로 좋은 말과 서신으로 통합을 권고했으나 승자는
단 한 조직뿐인지라 협상이 결렬되면 그 즉시 피와 돈과 철의 향연이 펼쳐졌다. 수십, 수백이
죽던 전투는 상대를 고지에서 누르기 위해 좀 더 크게, 좀 더 강하게 뭉치면서 지방 유력자와
영주, 추장, 시장, 교장, 메이드장, 집사장, 동네 귀엽고 예쁜 언니 등 지위가 있는 자들과 단
체가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수십, 수백은 아주 간단히, 그리고 빠르게 수천, 수만으로 커졌다.
또한 수천, 수만에 머물지 않고 수십만에 닿았다. 결국 아무리 작은 조직도 국가 대여섯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규모를 가지게 된 이들은 세계사의 이면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전 인류를 조
종하며 비밀 결사끼리 자금과 인력, 영향력을 동원하여 흥망성쇠를 겨루는 그랑디스 엑스페
디티오(*라틴어 Grandis Expeditio. 영문 Grand campaign)를 부정기적으로, 그러나 자주 열기에
이른다.
진정한 권력과 분리된 일반인이 기록하는 겉면의 역사는 이러한 비밀 조직들의 대 결투를 이
집트 상왕조 하왕조 분리 사건, 진나라 개국, 예수 탄생, 기독교 로마 국교 지정, 게르만 족 로
마 멸망, 이슬람교 확산, 흑사병, 중세 암흑기, 백년 전쟁, 장미 전쟁, 러시아 개국, 스페인 무
적 함대 격침, 신대륙 발견, 미국 독립 운동, 증기 기관 재발명, 남북전쟁, 1차세계대전, 2차세
계대전, 핵폭탄, 독일과 일본의 패망, 625, 월남전, 대한민국 경제 발전, IBM 컴퓨터 대중화,
인터넷, 아이폰 3GS, 컴퓨터 게임 문명 5 출시, 2014 새해맞이 구로2동 재중현한 동포 윷놀이
축제 한마당 등으로 역사서에 등재했으며 후대에는 진실의 1/4도 안 되는 얄팍한 두께 그대로
교육받는 것이었다.
엄마가 중얼거렸다.
“분명해.”
엄마는 미니어처 보드게임 마니아 연쇄살인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국제 비밀 결사 정보
폴더 속 해당 폴더가 떠올랐다. 놈은, 놈의 정체는 이 안의 어디엔가에 있었다.
클릭 포인터가 피카툴루(*Pikkathulu) 애호회 폴더, 흑맥주 시음 모임 폴더, 비누 제조 연구회 폴
더, 로마 목욕탕 협회 폴더, 인도류 조기 무술회 폴더, 장강 탑 쌓기 연통회 폴더, 클레이모어
사지 절단 기술 공유 클럽 폴더, 스팀 엔진 레이싱 동호회 폴더 등을 천천히 지나쳤다.
역사의 무게와 품격, 무시무시한 함의를 자랑하는 이름의 숲에서 헤매던 엄마는 문득 이번 사
건으로 뱀파이어 관련 폴더가 만들어질지 아님 이미 그 비슷한 조직에 관한 폴더가 있는데 자
신이 모르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엄마는 마우스 쥔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고수성이 어떤 시정잡배인지는 모르겠다만 만에 하나 그들과 연관이 있다면, 그래서 뱀파이어
니 뭐니 나오는 것이라면, 그러다 우리 착하고 예쁜 딸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관련자 전원에게 단어 뜻 그대로 지옥을 보여주리라. 월권을 행사해서라도, 역사와 민주주의에
오점을 남기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는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는 암콤임을
증명하리라.
“아, 이거.”
마우스가 부서지기 직전 엄마는 원하던 폴더를 찾아 클릭했다. 잠시나마 마우스도, 엄마도 평온
해졌다.
잠시나마.
*
장갑화 되었으나 겉으로는 평범한 밴이 재력가의 별장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국정원의 안가(安
家)인 모처의 전원주택 앞에 멈췄다.
차에서 예의 등짐 가방과 여행가방을 들고 내린 수성은 요원의 안내를 받아 전원주택 안 응접실
로 들어섰다.
약간 긴장했던 수성은 응접실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은실을 보고 희색이 돌았다.
“어서 와요.”
“아스 님 계시네요. 다행이네요.”
“뭐가요?”
수성이 히죽거리며 목을 쭉 빼 탁자 위에 있던 꽃병에 대고 말했다.
“그 왜 국정원 하면 고문, 억지로 시키기 이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물론 21세기 들어서는 안 그런
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과거를 참고하지 않을 수 있나요. 국정원은 그런 점에 있어서 일종의 전과
자니까.”
은실은 분명히 도청하고 있을 국정원 요원 열 좀 받겠다 싶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
말에 실린 진의를 제대로 곱씹기도 전에 수성의 표정이 음험하게 변했다. 무언가 분명히 망설이면
서 한편으로는 달려들기 직전인 것 같은 묘한 느낌이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그녀는 속으로 반문했다.
‘내가 착각했던 거라면…….’
은실은 다른 형사가 진행한 사전 증인 심문에서 수성 역시 피해자가 정말 싫었다고 증언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수성을 피해자 겸 중요 증인으로 생각하여 그를 제대로 보호하면서 정보를 캐고, 협조를
구하려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연쇄 살인 용의자가 수성의 옥탑방 근처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연쇄 살인범이 꼭 한 명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성이 공범으로 살
인을 돕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김강 수사반장이 실종되었고, 실종에 미니어처 마니아 연쇄 살인마가 개입했을 거라는 추측이 설
득력 있게 대두된 현재, 골목에서 발견된 C4 꾸러미는 위장으로 그의 혐의를 벗고 이러한 기회를
기다리려는 계략이었을지 모르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일테면 수사진에 대한 두 번째 공격
인 셈이었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면서 머릿속의 전광판에 선명한 붉은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광판
은 고장 났는지 같은 말을 반복해서 번쩍였다.
‘이 사람도 범인인가?’
은실은 이곳 경호 책임자에게 반납한 자신의 권총이 그리워졌다. 권총이 아니라도 그보다 더 효과
적인, 위험할 때 누르라고 받은 비상벨 리모콘이 입고 있는 점퍼 오른쪽 주머니에 뻔히 있는데도
공포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면서 그녀는 바로 겁먹은 사실을 드러내는 자신의 몸을 원망하는 동시에, 야수들이 반
사적으로 약한 짐승을 공격하는 것처럼 수성이 즉각 행동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편으로는 도
청하고 있을 게 확실한 국정원 요원들이 왜 들이닥치지 않나 궁금해졌다.
묘한 표정의 근육질 남자가 드디어 뒷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