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가을날.
햄스터 옷을 입은 수성은 이부자리를 박차고 창문부터 열었다. 적당히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
이 그를 어루만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성은 아침 요깃거리로 사놓은 빵과 우유를 먹으며 텔레비전 앞에 신문지를 깔고 쫙 늘어놓
았던 물건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플라스틱이 7할, 둔탁한 은색으로 얼핏 보면 납처럼 보이는
주석이 3할인 백여 개의 미니어처 유닛들이 거기 있었다.
“흐음.”
수성은 코가 닿기 직전까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멀리서 봤을 땐 신문지만 젖어 있고, 유
닛들은 보송보송해 보였는데 아니었다. 적지 않은 물기가 유닛의 팔다리나 무기의 돌출된 부
분에 작은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녀석들에다 바로 색칠을 한다면 아크릴 물감이 제대
로 정착하지 못해 겉돌거나 금세 벗겨질 것이다.
“좀 더 말려야겠.”
갑자기 수성을 어머니 자연이 찾았다. 인간이란 고립된 계에 열역학 제2법칙이 발동되는 순
간이었다.
수성은 먹던 빵을 아무 데나 던지고는 옥탑방의 화장실 문을 열고 양변기 앞에 섰다. 그가 위
아래가 원피스 작업복처럼 한 벌로 붙은 햄스터 옷을 재빨리 벗자마자 공중파라면 장면 건너
뛰기, 케이블 방송이라면 상체 클로즈업 씬, 컴퓨터 게임 심즈라면 모자이크가 특정 부위에
따라붙었을 만한 행위가 벌어졌다.
오래 참았던가. 수성이 장탄식했다.
“오오오오. 오오오오옹오오오.”
길고 긴 시간 동안 몸에 들어 있던 액체가 새로운 곳에서 장거한 순환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외부에 노출이 되었다. 노출 분량이 많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수돗물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이어졌다. 화무십일홍이오, 인불백일호인지라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
사가 끝이 났다.
레버가 내려간 양변기가 작은 폭포 소리를 내는 가운데 옷매무새를 추스른 수성은 옆에 있던
세숫대야를 들여다보았다. 신문지 위의 미니어처 유닛들이 최초로 거쳐 간 곳이었다. 지금도
새로운 유닛들이 안에 들어 있었다. 플라스틱 유닛은 이형제, 주석은 탈크라고 둘 다 금형에
서 제품을 뽑을 때 더 쉽게 나오라고 쓰는 성분을 씻기 위해 물에 비누를 풀어 담가놓은 것이
었다.
‘대야 안의 유닛은 하루에서 반나절, 신문지 위의 유닛은 하루에서 이틀로 대기 시간을 바꿔
야겠다. 안 그러면 색칠 준비가 너무 오래 걸려.’
방으로 들어온 수성은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빵을 모두 먹어 버리고 탁상을 편 다음 새로운
신문지를 꺼내 위에 올렸다. 그런 다음 프라모델용 레이저 블레이드와 타미야 니퍼, 손톱깎
이, 작은 줄, 유리판을 그 위에 가지런히 정렬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의 주인공, 오늘
손질할 워해머 사만 임페리얼 가드 보병인 카디안 쇼크 트루퍼 세트가 등장했다. 화장실 대
야 안, 방 안의 신문지 위를 거쳐 최종적으로 수성의 “집도”를 당하기 직전의 유닛들이었다.
수성이 니퍼를 들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무기, 머리, 팔다리, 몸통, 기타 장비가 한 군데 모여
있는 플라스틱 판, 일명 스프루를 해체하기 직전 옆에 있던 사람이 끼어들었다.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체격 좋은 삼인방 중 리더 격인 남자였다.
“수성 씨, 화장실 사용하실 때는 문 좀 닫아주셨음 좋겠습니다.”
그 말에 햄스터 옷을 입은 중년 수염 남자가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워낙 혼자 있어버릇해서 그만.”
“꼭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경호하는 데 거슬립니다.”
나머지 양복쟁이들도 공감하는지 뒤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
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경호할 때 지루하지는 않아요? 밖에 있는 분들은 순찰 때문에 돌아다니시지만 팀장
님이랑 다른 분들은 지금 가만히 앉아 계시잖아요.”
좌식 의자에 앉아 있던 덩치 큰 양복쟁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같은 마음
으로 보여도 대답은 리더만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 네 뭐…….”
“방도 원룸이다 보니 어디 돌아다닐 데도 없으니까요.”
“그렇죠.”
“잡지나 신문 같은 것도 안 가져오셨고.”
“그런 건 원래 못 봅니다. 경호에 집중해야죠.”
“하지만 특별히 하시는 일도 없잖아요.”
입구 빼고 삼면을 나눠 앉아 있던 사내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더는 이를 알아채고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죠.”
퍼스트 건담 꺾인 허리에 코어 파이터가 꽂힐 때 불꽃이 튀듯, 어둠 속의 하이에나가 썩은 먹
이를 발견했을 때 눈에 광채가 돌 듯, 해리포터가 서양호랑가시나무 지팡이와 처음 대면했을
때 갖고 싶은 욕망에 이글이글거리듯 건수를 발견한 수성의 눈이 빛났다.
“그러면요. 그냥 앉아 있는 시간에 재미난 취미 하나 배워 보시죠.”
“네?”
“부담 갖지 마시고요. 심심한 것보다 낫잖아요.”
“네에?”
“이게 말이에요, 워해머 사만이라는 건데요.”
“아니, 저기요.”
*
“우리 딸 진짜 취향 독특하다.”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남자애 집엔 왜 가.”
은실은 너무 억울해서 가슴까지 두들기며 봉황이 그려진 큰 책상 뒤, 대형 태극기와 봉황기
사이, 금 봉황이 붙은 벽 앞의 엄마에게 소리쳤다.
“내가 말했잖아! 고수성은 미니어처 보드게임 애호가 연쇄살인사건의 주요 참고인이라고!
내가 그래서 폴 씨 소개를 받아서 간 거라고!”
“조용, 조용.”
엄마가 입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애원하는 표정 반, 꾸짖는 표정 반을 지었다.
“조용히 좀 해. 옆방에 양당 원내대표 계셔. 오늘 원래 삼자 회담하는 날이었단 말이야. 엄마
체면도 있잖아. 그럼 안 돼.”
“자꾸 딸을 괴롭히는 엄마 따위 망신 좀 당하라지.”
“어머, 얘가 말이면 단 줄 알아. 자꾸 막말할래? 자꾸 막말하면 사형시킨다?”
“흥.”
엄마는 책상에 놓여 있던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 사람 보드게임방 했다가 홀랑 말아먹었었네. 보드게임 전문리뷰 사이트 만들었다가 홀랑
말아먹었고. 이 사람 뭐든지 말아먹네. 푸드 파이터야, 아주. 뒤늦게 업종 변경해서 미니어처
전문점 차리려고 하다가 <고블린 시티>라는 데 선수를 빼앗겼대. 차려도 문제였겠다. <고블
린 시티>가 평이 엄청 좋네.”
“엄마, 어디서 그런 정보를 구했어?”
“국정원이지 어디긴 어디야. 참, 정말 너 이 사람이랑 관계없니?”
“엄마아!”
은실이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더니 다시 물었다.
“진짜 싫어하는구나.”
“진짜 싫어하지 그럼 가짜로 싫어하냐?”
“그렇다면.”
엄마의 목소리가 낮고 은밀해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났던 은실은 음모를 꾸미는 듯한
그 목소리에 빨려 들어가듯 집중했다.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은실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제안에 담긴 함의는 책임질 수 없는 무게를 지녔던 것이다. 엄마
는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이 참. 농담이야, 농담. 그 왜 영국 영화 있잖아. 그거 보고 따라해 봤어. 거기 잘생긴 수상
이 그러잖아.”
“엄마.”
“아니라고!”
엄마는 소리친 다음 약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은실이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엄마, 지금 일반인 암살을 제의하고서 화내는 거야? 내가 뭐 잘못 반응했어?”
“아, 몰라 몰라. 너 사형.”
“엄마!”
“안 되겠다. 너 한 달간 날 집에서도 각하라고 불러. 엄마 소리 듣기 싫어 죽겠네. 어쨌든 간
에 수성의 경호는 당분간 계속할 거야. 첫째 네 이야기가 거짓말일 수 있어. 아닌 것 같지만
난 확률을 믿지 감을 믿지는 않아. 인질로 잡고 널 해하려는 데 쓸 수도 있으니까 그걸 막아
야지. 둘째 경호를 핑계로 그 뱀파이어들이 실제로 있는지, 접촉할 것인지 밀착 감시할 수
있어. 실제로 뱀파이어란 게 있다면 난리 나겠군. 미국에서 즉시 샘플을 요구할 거야. 들리
세요? NSA? 혹시라도 잡으면 한 명 바로 드릴게요. 페덱스 착불로. (*NSA는 미국 국가 안보
국의 약자. 미국의 상시 도청을 확정하고 발언한 것.)”
조금은 엄격했던 연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너도 강화된 경호가 따라붙을 거야. 웬만하면 비밀리에 이뤄지겠지만 꼭 그렇게 되지만은
않겠지. 어떤 땐 드러내놓기도 할 테고, 불편하기도 할 테고. 하지만 알지? 다 널 위해서야.
넌 내 하나뿐인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