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그런 거창한 것들을 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이놈으로 대신하려고요. 작년에 디앤디
만든 회사에서 스타워즈 미니어처도 나왔거든요. 플레이어가 별로 없어서 톰이 안 들여오고
있는데 수성이부터 꼬셔놓으면 한국인들도 따라올 거예요. 하나하나 차근차근 중독시키는
거죠.”
“수성 씨가 그렇게 영향력 있어요? 맨날 지각하고 이상한 짓 많이 하는데 욕먹는 게 아니고
요?”
“그게 또 그 친구 나름의 매력이에요.”
은실은 매력의 새로운 정의를 접하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 친구랑 플레이하면 워낙 재미난 말을 많이 해서 마치 재미난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 같
아요. 게다가 안 그래 보여도 심성이 고운 편이고요. 무엇보다”
폴은 약간 망설이다가 말을 마쳤다.
“좋은 스타워즈 미니어처 플레이어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고요.”
“폴 씨는 스타워즈 팬이신가 봐요.”
그가 씩 웃더니 긴 팔 티셔츠의 어깨를 박력 있게 내렸다.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핸들이 따라
움직이는 바람에 순간 차가 비틀거려 차선을 넘나들어서 은실은 속으로 ‘엄마야!’ 하고 소리
쳤다.
어깨에는 크고 선명한 문신이 있었다. 원 안에 선수(船首)가 체스의 퀸처럼 뾰족한, 왠지 전투
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림이 그려진 문신이었다.
“저항군 마크예요.”
“네?”
“스타워즈 저항군 마크요.”
“그, 그렇군요.”
처음 본 것이라 무어라 말할 거리가 없었다. 다만 영화 속 디자인을 팔에 새길 정도로 큰 열
정은 알 수 있었다.
“왼쪽 어깨엔 제국군 마크가 있어요.”
“……그것도 스타워즈에 나오는 거예요?”
“물론이죠.”
은실은 정상인 같던 폴이 두 배로 더 멀고, 나쁜 쪽으로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과연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친구를 살펴보라는 옛 속담이 틀린 것 없다고 생각했다.
‘덕후 고수성의 친구 폴 웨이드는 뭐다?’
한강을 건넌 차는 여의도를 지나 영등포로 들어섰다. 신도림역을 거쳐 대의동을 지난 차는 마
침내 구로구에 도착했다. 구청 앞 주차장에다 차를 댄 두 사람은 아파트를 지나 개발이 안 돼
복잡하게 얽힌 다세대 주택으로 이뤄진 골목 앞에 섰다. 그들 앞에는 세를 놓는 것이 이곳의
유행인지 3층 아니면 4층인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적 벽돌로 이뤄진 건물은 미적인 부
분보단 용적을 따져 네모반듯했다. 모든 건물이, 전부.
“와.”
“여길 지나야 해요.”
“이건 마치 탑, 아니야 더 적당한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미궁이요.”
은실이 그 말에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여기 들어섰을 때는 과연 이 길을 외울 수 있을까 싶었죠. 길을 잃은 적도 두 번이나 있
어요.”
과연 그러겠다 싶었다. 두 사람은 긴장하며 골목에 들어섰다.
*
건물 그림자가 그들을 덮치며 주위가 아까보다 확실히 어두워졌다. 온도도 더 내려갔다. 두 사
람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가 서서히 부서졌다.
등 뒤에서 까악까악 하는 갈까마귀 소리가 들려서 은실은 깜짝 놀랐다. “불길한 색깔”인 파란
색 후드 티 차림에 무척 음산하게 생긴, 한 덩치 하는 대여섯 살 소년이 세발자전거에 달린 경
적을 울리는 소리였다.
소년이 낮게 움직였다.
“빵빵, 빵빵. 미안합니다.”
위협적인 꼬마가 먼저 지나가길 마음 졸여 기다리는데 이번엔 하늘에서 위험하고, 교활한 거
체가 깃털과 공기를 함께 울리며 비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잔뜩 움츠리면서 쳐다본 머리 위로
각종 전염병과 세균, 세금, 정치인, 바바라 스트라이샌드의 허밍을 사방에 옮기고 다니는 비둘
기 떼였다.
폴이 속삭였다.
“조심해요. 정신 차리고 바짝 따라와요.”
“네.”
그들은 미궁 안으로 한 발 한 발 들어설 때마다 아래로 가라앉는 자신들의 마음을 느꼈다. 아니,
몸도 같이 침몰하는 듯했다. 여러 가지로 악의적이었던 미궁 속 분위기는 극에 치달았다. 마침
내 공기마저 문제를 일으켰다. 짙고 거칠었다. 악의적이어서 그대로 숨을 쉬기 곤란할 지경이었
다. 걸음이 빨라졌다. 두 사람은 뚜껑을 열고 주위에 슬러지를 잔뜩 퍼놓은 하수도 공사 지점을
지나, 골목을 좌우좌우우좌좌상방15도 각도 등을 어지러이 틀면서 돌아다녔다.
다리가 슬슬 아프기 시작할 때 골목 끝에서 세상에선 있어선 안 될, 상상 속 괴수의 형상이 희
끄무레하게 떠올랐다. 곧 선명해진 그 모습은 고대 이집트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지고
네 발을 안정적인 태도로 바닥에 몸을 깐 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수수께끼를 던지는 불길하
고 음울한 운명을 닮았다.
은실이 말했다.
“누가 멀쩡한 인형을 버렸네요.”
“그러게요. 비싸 보이는데요.”
그들은 불가사의한 만남을 뒤로 하고 용감히 전진했다. 그 후로 한참 마치 초기 어드벤처 게임처
럼 배경을 한 장만 그리고 채도, 명도, 한두 가지 세부사항만 바꾸고 돌려쓰는 듯한 건물들이 그
들을 맞이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과 예측할 수 없는 길 패턴은 골목 곳곳에 소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방목
해 놓아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폴이 갑자기 도망간다면 은실은 미아가 될
판이었다. 슬슬 실타래나 과자 부스러기가 갖고 싶던 은실에게 폴이 멈추며 말했다.
“다 왔어요. 이 건물 옥탑이에요.”
*
수성의 집 역시 집 장수가 천편일률적으로 찍어 붉은 벽돌 재질에 개성 없는 네모 네모난 4층짜
리 건물이었다.
은실은 폴을 따라 집 장수가 자재값을 아껴 폭리를 취한 게 분명한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
라갔다. 3층에서 작지만 앙칼진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옥탑에 오르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
리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보통 공공장소에서 듣는 웅성거림과 달리 이곳의 뭉개진 목소리
들은 은실에게 익숙하였다.
문을 열자 중앙에 녹색 판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남자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
다.
“어서 오세요.”
“어?”
“엇.”
“폴이랑 정은…….”
말을 꺼낸 수성은 물론 활발하던 사람들이 외마디만 뱉고 금세 조용해졌다. 무어라 말을 걸어
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폴도 까먹고 확실히 물어보지 않은 사실에 대해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미리 예상을 한 터라 은실은 얼른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본명은 정은실이에요. 말씀 드리긴 껄끄러운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꿨어요.”
은실은 이야기 뒤를 잇기 전 재빨리 남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 정도 믿는 것 같았다. 은실
은 속으로 만족하며 결정타를 꺼냈다.
“옛 남친 때문이에요. ……그 친구가 절 스토킹 했어요. 예전에 매직더게더링 동호회에서 서
로 만나 1년을 사귀다가 느낌이 아니다 싶어서 이별을 고했는데 바로 스토커로 돌변하더라고
요.”
“저런.”
“한 2년인가 고생하다가 어느 순간 고맙게도 걔가 잠수를 타면서 모든 게 정리되고 끝났죠.
하지만 여기도 매직처럼 좀 드문 취미잖아요. 여기에 다른 닉네임으로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
각했어요. 그래서 바로 가명을 썼던 거죠. 미리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대부분의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수성이 말했다.
“매직하는 사람들이 모두는 안 그런데 가끔 몇몇은 좀 음험한 구석들이 있지.”
은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놀고 있네. 지들은 지들 중 살인자도 있는 주제에.’
양익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원이는 은실 씨가 형사라고 했어요. 우리가 요새 불민한 일이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형사가 침투했다고.”
수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저런 야리야리한 미인이.”
그는 말을 끝맺으며 천하게 묘한 타이밍에서 침을 삼켰다. 아니, 이 사람 많은 데서 설마.
그를 미워한 까닭에 자동적으로 생긴 오해였을까? 하여간 수성은 생긴 것부터 밥맛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속은 가운데, 원의 중얼거림에 은실이 뜨끔했다.
“그렇게 안 약하고 강단 있으셔 봬는데. 하여간 그럼 앞으로 어떻게 불러드리면 돼요?”
아빠를 사랑하는 딸, 아빠바보 은실이 말했다.
“아스트로넛이요. 집에 가면 닉네임도 이걸로 교체할게요.”
“오, 우주비행사. 괜찮네요.”
원을 포함해 모두가 진지하게 대꾸하고 반응하는 가운데, 수성 혼자만 킥킥거렸다.
“아스? 애스. ……엉덩이?”
“형, 여자분 닉네임인데.”
원이 대신 정색하는 것이 은실은 크게 고마웠다. 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
한 수성이 얼른 목소리를 점잖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불쾌하게는 생각 마세요. 꼭 아스 님으로 불러드릴게요.”
“그러시던지요.”
그의 너스레를 끝으로 남자들이 자리를 내줬다. 폴은 수성 바로 옆에, 은실은 그게 싫어
부러 반대편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