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수학자 김민형이 이 문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근데 이게 위상동형의 개념으로 해결되는 문제인가요?"
김민형이야말로 이것이 genus 1인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왜 이랬을까요?
2.2.
이런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도넛 카페에서 도넛 대신 컵을 파는 사람이 있다 해봅시다.
그는 고소를 당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넛과 컵은 둘 다 genus 1이다. 둘은 같은 것인데 왜 날 고소하는가?"
자, 다 압니다. 이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미친 걸까요?
2.3.
이 사람은 이 뒤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수학을 정말로 깊게 탐구해야지만, 세상을 탐구할 수 있게 되고,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세계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될 때에만 내가 왜 틀렸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왜 미친 것인지를 알기 힘들게 될 겁니다.
이 사람은 전형적인 논리를 법학에 넣으려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계를 논리적으로 완전히 설명하려는 행위는 뭐가 잘못일까요?
2.4.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의미와 무의미를 그 의미 안에서 한계를 지으려는 시도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의미있는 명제는 진정한 의미의 뜻에서 무의미합니다.
논고 6.53이 보인 철학의 방법은 윤리적인 문제 대신 대답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문제만을 문제로 삼음으로서 윤리적인 질문을 표현하는 행위를 피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논고 6.521처럼 문제의 해결 대신 문제의 소멸로서 오히려 윤리적인 문제를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의 뜻에서 무의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뜻에서 의미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대해 어떤 한 경향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3. 철학적 해석
3.1. 칼 슈미트
칼 슈미트는 초기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합니다.
3.1.1. 법의 예외상태
법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처럼 법이 적용되는 정상상태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상태를 규정합니다.
칼 슈미트 전 법실증주의자들은 법의 정상상태만을 논의했지만, 칼 슈미트는 달랐습니다.
칼 슈미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지금의 법에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계엄령에 대한 법률이 있는 것을 봅니다.
법은 언제나 그 법을 거부해야 할 예외상태가 있다고 말합니다.
3.1.2. 결단
또한, 여기서 그는 정의와 법의 관계에 대해서 말합니다.
칼 슈미트는 아마도 법이 얼마나 정의를 다루기 힘든지를 무의식적으로 처절하게 알아챈 인물이라고 봅니다.
정의는 언제나 트롤리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내 판단으로 한 명의 사람을 죽여야 할지, 자연의 힘으로 다섯 명의 사람을 죽여야 할지 문제를 삼아야 합니다.
칼 슈미트는 이 해답으로 "결단"을 강조합니다.
이 결정 불가능한 정의에 있어서 결단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3.2. 무서운 결론
그는 이 논변을 통해 무서운 논변을 댑니다.
바로 주권자의 독재입니다.
독재만이 결단을 최적의 상태로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칼 슈미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영원한 대화만을 이끌어내려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법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영원한 대화는 이것을 막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뜻은 오히려 독재에서 더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3.3 데리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데리다는 자신의 탈구축이라는 이론을 이용해 이것을 비판합니다.
3.3.1. 지시
데리다는 말합니다. 언어의 의미는 어떤 것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상해 보이지만, 비트겐슈타인과 콰인은 이것에 대한 논변을 세웠습니다.
해외의 누군가가 연필을 가리키며 "이것은 가바가이다"라고 해봅시다.
이것이 "이것은 연필이다"를 뜻하는지 "이것은 둥글다"를 뜻하는지 "이것은 나무다"를 뜻하는지 "이것은 하나다"를 뜻하는지 "이것은 딱딱하다"를 뜻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3.3.2. 저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래도 저자는 그 뜻을 알고 있다."
이것을 비판하는 것은 이상해 보이지만, 롤랑 바르트는 이것에 대한 논변을 세웠습니다.
그는 그의 철학 초기에 "영도"라는 것을 제안합니다.
영도는 어떤 제도가 생성된 순간의 현장, 즉 역사적인 가치판단이 개입해서 그것을 더럽히기 전의 가공 전 상태를 말합니다.
롤랑 바르트의 시절엔 구조주의라는 다양한 인간적 삶의 형태에서의 "영도의 탐구"를 하려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에 말한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때에만 자신의 판단이 가능하다는 한 미친 사람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그의 후기에 "저자의 죽음"이라는 것을 제안합니다.
저자의 뜻은 전혀 상관이 없고, 그의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독자만이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3.3.3. 두 해석
데리다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해석을 종결할 수 있는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에 대한 우리 생각과는 다르게, 해석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텍스트는 언제나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게 열어준다."
문자언어의 의미는 언제나 두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주장은 참으로 논쟁적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칼 슈미트도 이것을 반대할 것 같습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트롤리 문제와 같은 정의 앞에 우리는 언제나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것을 중지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만일 정의가 언제나 이렇게 결정 불가능할 것이라면 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할 것입니다.
3.3.4. 대안
데리다는 여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의미는 두 해석을 열어주지만, 언제나 의미는 언어에서 나온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의미는 불가피하게 여기서 열려 있게 됩니다.
4. 결론
여기서 누군가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자에게는 도저히 좋은 비판이 아닙니다.
이 현대 철학의 흐름을 위해 미셸 푸코의 이론을 인용할까 합니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은 해답, 교훈,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인이 사람들에게 "인간은 자유롭다"고 말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 지식인은 "어떤 것이 인간을 부자유케 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만들어나가고, 저항의 정치를 실행하게끔 도움을 줄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라는 말만큼 한심한 말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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