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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1/15 20:32:45
Name 해소
Subject [일반] 혼자 춘천에 다녀왔습니다.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2박 3일간 혼자 춘천에 다녀왔습니다. 애초 계획은 춘천을 찍고 정동진까지 가서 쭈욱 내려올 계획이었는데, 출발하는 아침에 갑자기 일이 꼬여버렸습니다. 춘천까지 가는 길이 열차에서 전철로 바뀌었더라구요. 불과 2년 전에 새벽 열차를 타고 춘천을 거쳐 정동진에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춘천에서 영동 지방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뭐 몇 가지 있겠지만,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별 수 있나요, 애초에 대단한 관광을 기대하고 계획한 여행이 아니니까, 그냥 경춘선에 올라탔습니다.

춘천까지 한 시간 20분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중간에 남양주를 지나 가평, 강촌부터 해서 가볼만한 곳(특히 MT로 좋은 곳들)을 많이 지나쳐왔습니다. 놀러가는 사람들 절반에, 서울 외각에 사시는 분들 절반 정도 타신 것 같더라구요. 아무래도 전철이다 보니 바깥을 보면서 가고 싶은데 앞사람을 마주보고 앉아있다니보니 조금 흥이 떨어지기는 했습니다. 옆에 이제 갓 고등학교 졸업할 때이거나 대학교 1, 2학년쯤 되어보이는 친구들 여덞명 정도가 아이패드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면서 춤만 추지 않았으면, 조금 제 감흥에 젖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어쨌거나 춘천에 도착해서 그냥 발 닿는대로 움직였습니다. 애초에 자세히 알아보고 온 것도, 계획을 짜고 온 것도 아니구요. 그냥 맘이 답답하고 안 좋은 일이 많아서 머리나 식히려고 온 춘천이었습니다. 딱히 어느 명소를 가봤다, 라고 할 만한 이동은 아니었고 그냥 말 그대로 시내 구경의 느낌이었어요. 눈발도 조금 날리고, 괜찮은 맛집(으로 보이는) 곳을 몇 군데 찾았는데 대부분 2인분 이상을 주문해야 해서 못 먹은 게 좀 아쉬웠습니다.

혼자 하는 여행이 무언가 제 안에서 덜어낼 수 있도록 해줄 줄 알았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가서 무얼 하든, 그냥 돌아다니고 혼자라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고 그러다보면 내가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것을 그곳에 두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막상 2박 3일동안 타지에서 혼자 있어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더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맘 아팠구요.

밤 늦게 혼자 할 일이 없어서 택시를 탔습니다. "춘천cgv로 가주세요." 기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원래 수다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혼자 다니다보니 말 할 일이 없어서 더 외로웠던 것 같습니다. "저 내일도 춘천 여기저기 돌아다닐 생각인데, 어디 추천해주실만한 곳 있나요?" "딱히 없는데... 특히 혼자 왔으면 다 재미없지." "......여자친구가 없어서 혼자 온 건 아니구요..." "있는데 두고 왔어?" "...아니 없기도 없지만(이 아저씨가...) 안 좋은 일도 있고 생각할 것도 있고 해서 즉흥적으로 왔어요." 그랬더니 얼마 전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구요.

정장 입은 분이 밤 늦게 남춘천역 앞에서 택시를 잡더랍니다. 그러더니 소양강 근처나 뭐 어디에 우거진 숲 없어요? 라고 묻더래요. 그래서 기사님이 아는 곳으로 차를 몰았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 사람이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내리더니 숲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서는 "김 부장 XX끼야! 이런 X같은 니X...." 하면서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한참을 소리지르다 돌아왔다네요. 기사님 왈, "속이 좀 시원하세요?" "조금 살 것 같네요." 저한테도 물어보셨습니다. "그 숲으로 데려다 드릴까요?"

낮에는 혼자 돌아다니고, 밤에는 혼자 영화 보고 술 먹고. 춘천에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별로 슬프지도 않은데 영화 중간에 엉엉 울고, 시끌시끌한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나발을 불고. 낮에는 내가 무슨 버스를 탔는지도 모르게 돌아다니고... 외롭더라구요. 저를 괴롭히던 것들이 생각나구요. 힘들어서 외로운 줄 알았는데, 외로워서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음 단단히 먹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지니까, 나중에는 모두 덧없게 느껴지더라구요. 사는 게 당연히 '혼자' 인 것 아냐? 여행으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거나 맘이 괜찮아진 것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은 아픔에 대해 받아들이게 된 것 같습니다. '혼자'라는 사실 자체도요.


내일은 전라도에 갑니다. 여수와 순천을 둘러볼 생각이에요. 여수는 정말 좋은 곳이라고, 여수 고향이신 분에게 술자리 때마다 들었구요. 순천은 '내일로(기차여행 패스)'의 성지라고 하더군요. 언제나처럼 부담없이 갈 생각이지만, 최소한 바다와 멋진 풍경, 맛있는 음식 한 두 가지 정도는 챙겨볼 생각입니다.

군대 가기 전에 떠났던 여행, 그리고 군생활이 13개월 정도 남았을 때 휴가 나와서 갔던 동해바다, 그리고 이번 여행까지. 여행은 늘 겨울에만 가는 것 같습니다. 이맘때에는 늘 심경의 변화가 생기는 것인지. 제가 제대로 된 여행을 못 해서인지, 며칠 떠났다가 돌아오더라도 사실 크게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내 주변의 다른 곳으로 눈길 한 번 돌리는 것? 그래도 그게 참 가치있네요. 자꾸 자기 안으로 함몰하다보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미 다녀오신 분도 있을 테지만, 다들 겨울 여행 한 번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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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타
12/01/15 20:41
수정 아이콘
순천만이 그렇게 겨울에 아름답더라구요.
흥덕식당 불낙 정식이 참 맛있는데 글에서처럼 2인분 이상만 되서 흑흑...
가신 김에 셀카도 좀 찍고 오시고 하시면 여행하는 분위기가 나지 않나 마 그래 생각하고 있슴다.
여수는 오동도 근처에 큰 건물도 짓고 있고 오동도 내에서 바람의 동굴인가 하는 곳이 참 멋있었어요.
조심하시고 건강히 다녀오세요. 헤헤
여기로와
12/01/15 21:05
수정 아이콘
저도 어제 제천에 다녀왔습니다. 청풍문화재단지와 의림지. 청풍문화재단지에는 겨울이라 사람이 없더라구요. 단지 맨위 정자에서 보는 충주호가 참 멋있고 웅장하더라구요. 같이 일하는 동생이랑 같이 갔는데.. 그놈이 좀 시끄러운 녀석이라 조용하게 바람을 맞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싶었는데..
안되더라구요. 의림지는 축제여서 사람이 많이 북적거렸고.. 한가롭게 거닐고 싶은 맘이 있었는데 말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롭고, 옆에 누군가와 같이 어떤 풍경을 보고 있어도 외롭더라구요.
요즘 참 쓸쓸하네요. 왜 사람은 문득 외로운 걸까요.
제 고향이 여수인데.. 향일암도 좋아요. 벌써 5년을 떠나있었네요. 언제든 볼 수 있는 그 바다가 참 그립습니다.
이번 설에 내려가면 혼자 바다를 보며 바람 좀 쐤으면 좋겠어요.
여행잘하시고 건강도 잘 챙기세요. [m]
ComeAgain
12/01/15 21:49
수정 아이콘
소양댐 근처의 그 숲이라면... 왠지 알 것 같네요;;

춘천은 요즘 사람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ㅠㅠ
그래서 춘천 사람이던 저는 춘천보다 더 오지인 양구로 들어와버렸습니다...?

그나저나 참 멋있게 다녀오셨네요~
헤르세
12/01/15 21:52
수정 아이콘
저도 작년 가을에 강릉 혼자 다녀왔어요. 혼자서 여행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사실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잘하는 편이라 외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무척 외롭더군요.--; 찜질방에서 혼자 자려고 누울 때가 제일....--; 날씨라도 좋았으면 신나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거 같은데 날씨도 좋지 않아서 축축 쳐지고... 저는 그래도 1박 2일을 꼬박 밖에서 혼자 있어 보니 기분 전환은 잘되더라고요. 저도 당시에 힘든 일도 많고 고민할 일도 많을 때였는데, 실제로 해결된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을 비워 내고 나니 편해지고 좋았어요. 요즘 같은 날씨는 너무 춥고;;; 봄 되면 한 군데 또 가 볼 생각입니다.
춘천은 친구랑 갔었는데 그때도 날씨가 안 좋아서 참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전라도 여행 잘 다녀오시고, 마음에 있는 무거움들을 많이 덜어내고 오시길 바랄게요.:-)
12/01/15 21:57
수정 아이콘
예전 기억이 잘못 되신 모양이네요.. 기차 시절에도 춘천에서 기찻길은 끊겼습니다..
12/01/15 23:25
수정 아이콘
아 정말 글이 매우 공감이 가네요. 저도 지금 제가 붙잡고 있는것들을 놓아버리고자
다른곳도 아니고 딱 춘천 여행을 계획중이었는데
그렇군요.. 더 외로워지는군요
12/01/15 23:57
수정 아이콘
혼자하는 여행 몇번 해봤는데, 다니는 동안 쭉 외로운 건 사실입니다. 근데 혼자 여행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희열 같은 게 있어요. 그건 아주 잠시일 뿐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순간을 잊을수는 없더군요. 그래서 전 아직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혼자 여행했던 한 때입니다.
오세돌이
12/01/16 04:03
수정 아이콘
"자꾸 자기 안으로 함몰하다보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말 지금의 저에게 꼭 필요한 말 같네요.
가신 곳 저도 가보려고요. 글 고맙습니다.

혹 여수 가시면 칠공주식당 가셔서 장어탕 한그릇 하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Bequette
12/01/16 13:28
수정 아이콘
기차 다니던 시절에 서울이 답답하다 느껴질 때 당일로 춘천에 몇번 다녀오곤 했는데... 그때 생각이 나네요.
정말 혼자고 끝까지 혼자고 여전히 혼자다.. 싶었는데, (받아들이기엔 아직 어렸을 때고) 이런저런 생각하며 그냥 외면했달까, 잊었달까.. 그렇게 버텼었네요.
여수 다녀오신 다음엔 시간된다면 제주도도 한번 다녀오세요.. 주말,성수기 피해서 저가항공사 이용하면 교통비가 전남,전북 다녀오는 기차나 버스비랑 비슷비슷합니다. 올레길 뭐시기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걷기에 좋은 길들이 참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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