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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9 18:24:06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5) 세손의 적
1. 세자의 장인
38년 윤 5월 14일, 에 뭐... 그 때 그 날 중의 일입니다. 홍봉한은 이런 요청을 합니다.
"한림 윤숙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조는 이에 분노하며 그들을 국문하려 했지만, 홍봉한은 거기까지는 말리죠. 그러면서 세자의 유품들을 불태우라 명 합니다. 그 때 지팡이에 숨긴 칼 같은 요상한 물건들이 많이 나오긴 했던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도교에 심취하던 세자였죠. 영조는 이를 보고 이렇게 말 합니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소론의 조재호, 그는 "모두 불충하지만 나는 세자에게 충성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탄핵이 시작되었고, 죽습니다. 이 일은 세자가 친소론이어서 죽은 거라는 근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뭐 이에 대한 평가는 과거편 결론에서 하겠습니다. 홍봉한은 이 옥사가 끝날 무렵, 상소를 올립니다. 이게 세자에 대한 충성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당파에 기댄 문제일 뿐이라는 거였죠. 그리고 그는 뒷사람들이 보기 정말 편하게 세 줄 요약도 해 줬습니다.
"이것으로써 말하고 싶은 것은 또한 세 단계가 있습니다. 그때에 영빈께서 아뢴 것은 오로지 전하를 위한 것이었으니 성상께서 단행하시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신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여러 신하들이 받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장래의 인심이 오늘 전하의 앞에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 염려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방도를 먼저 마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영빈 이씨는 세자의 어.미. 선희궁, 네 엄마예요. 배 아파서 낳은 자식 맞아요. 에 뭐 역시 과거편에서 다시 얘기할게요. 친절하게 정리해 줬지만 굳이 다시 정리하자면...
- 선희궁이 세자를 죽이라 한 건 영조를 위한 것
- 이 결정은 영조가 한 것
- 나는 충성으로 영조의 뜻을 따른 것
- 나중에 딴소리 하는 걸 막기 위해 이것을 확실히 명문화시킬 것
이걸 아주 장문으로 얘기한 게 따로 있습니다. 옮겨 보죠.
"아! 그날 성상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신에게 유시하시기를, ‘세자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다. (너는 병이라고 하는데 그걸 넘어섰다. 아버지의 정으로는 안 되겠지만 나라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아! 성상의 이번의 거조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염려하는 바는, 이치를 보고도 밝게 알지 못하고 수시로 흔들리는 자가, (이번 일이 부득이했는데도 나중에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날 처분하던 때에 어찌 좌우에 여러 신하들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전하의 마음을 알고 전하의 명을 받든 것은 신입니다" (우리는 공범이지만 책임은 님한테 있음)
"아! 사도 세자가 친히 믿을 사람이라고는 신만한 이가 없었고, 사도 세자는 내가 모시는 임금의 아들이니, 신이 어찌 전하를 섬기는 마음으로 사도 세자에게 충성하지 않으려 했겠습니까?" (솔까말 충성은 내가 제일 했고, 진짜 부득이한 거였죠)
영조는 별 토를 달지 않고 그 말을 듣습니다. 그 후에 홍봉한은 더욱 중용되죠. 나라를 위해 자식을 버린 아비와 사위를 버린 장인의 마음일까요.
이후 신나게 권세를 누리던 홍봉한을 공격하는 이가 있었으니, 한유입니다. 그는 간신에게 쓸 만한 형용사를 신나게 말한 후 "일물을 바친 죄"를 들어 홍봉한을 공격하죠. 이에 대해 영조는 대노하여 그를 처형합니다. 그 이후 영조의 한탄입니다.
"저가 비록 ‘홍봉한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끌끌...
영조가 사도세자의 일을 후회했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가 죽자마자 폐세자를 취소하고 사도세자라는 말을 붙여 줬고, 신하들에게 "니들이 날 꼬셔서 그런 거잖아!"라는 식의 말들을 했다고 합니다. 뭐 실제 정조도 영조가 "김상로가 너의 원수다"라고 했다고 했죠. 글쎄요?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를 사도 세자라 한다."
그 때 그 날 동안의 일들이야 야사라 그렇다 쳐도, 조재호 등 세자를 옹호한 이들을 처벌하는 동안에도 세자에 대한 말은 저언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이런 말을 한 거죠. 이렇게 본다면, 저 말은 "마치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 것입니다.
정병설 교수는 이걸 두 편에 걸쳐서 반박합니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피의 메리는 아니고)을 처형했을 때, 그걸 들은 엘리자베스는 대신들에게 왜 멋대로 했냐며 쌍욕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명령을 내린 건 그녀였죠. 그가 인용한 책에서는 이렇게 말 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뻔뻔스런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꾸며낸 이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엘리자베스 자신이었다."
"히스테리 환자, 혹은 히스테리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어이없을 정도로 거짓말을 잘 할 뿐 아니라, 그 거짓말에 자기가 속아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들은 믿고 싶은 것을 정말로 믿어버린다. 그들의 증언은 모든 거짓말 중에서 가장 정직한 거짓말이며 가장 위험한 거짓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명령에 반하여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이 이루어졌다는 자기암시 속으로 열심히 자신을 밀어넣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는 확신이 배어들게 되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메리 스튜어트
물론 이런 태도는 다른 계산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가 정말 자기 생각만으로 저지른 일이면 세자가 죄인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게 되고, 세손은 죄인의 자식이 됩니다. 다른 간신들의 농간이 있었다, 그러면 죄가 다른 데로 돌려지죠. 정조에게는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한 가닥 불씨였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여기에 매달렸죠.
2. 김귀주
정순왕후가 궁에 들어온 이후, 경주 김씨 사람들이 대거 정계이 진출합니다. 김귀주를 주축으로 한 이들이었죠. 이들은 김종수를 위시로 한 청명당과 손을 잡고 홍봉한을 공격합니다. 탕평당에 맞서 그들이 외친 것은 의리였습니다.
영조 45년, 김귀주는 승지가 되는데 이 때 홍봉한은 김귀주의 벼슬을 올려주자는 건의를 하는데... 이 때 영조는 이런 말을 합니다.
"중궁이 이를 듣고 몹시 놀라며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또한 깨닫고 그 명을 정침한 것이다"
정순왕후가 말려서 벼슬을 올려줄 수 없다는 거죠. -_-; 이렇게 존재감을 조금씩 드러내는 김씨. 이런 상황에서 홍봉한이 갑자기 파직당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된 것은 김치인, 김귀주와 같은 편인 김종수의 삼촌이죠. (위에서 말한 한유의 상소는 이 시기 나온 것입니다)
이어 영조 47년의 일입니다.
"왕손이 추종을 외람되게 거느리고 다니어 도로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대장의 행차라고 지목하였는데도 대신은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고, (중략) 왕손이 방자하다는 말이 있는데도 조정에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그 누구를 믿겠는가"
이어 그는 홍봉한을 지목합니다. 그가 왕손들을 우대했다는 거죠. 마치 역모라도 일어난 것 같았던 상황은 홍봉한이 파직당하면서 끝납니다. 이 일을 잘 기억해 둡시다.
이어 다음 해의 일입니다.
"비록 사심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외람된 통망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고, 혹 사심이 있었다면 더할 수 없이 방자한 일이다. 이 사람이 이와 같다면 내가 장차 누구를 믿겠는가"
이런 말을 하며 그는 제법 많은 사람들을 내쫓는데, 김종수, 윤시동, 김치인, 정존겸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청명당의 일원들, 곧 김귀주를 향한 거였죠. 홍씨의 반격이었습니다. 슬슬 분위기는 달아오릅니다. 김씨 가문의 총공격이 시작된 거죠. 그 포문을 연 것은 김관주였습니다
이전 편에 설명했듯 그들이 홍봉한의 죄로 내건 것은 질 낮은 인삼을 썼다는 것, 병에 써야 되는데 금주령이라는 이유로 송다를 쓰지 않았다는 것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손을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근래에 듣건대 세손을 공갈하여 국본을 흔든다는 말이 처음 척리의 집안에서 나와 진신들 사이에 혀를 빼물고 돌아보며 근심 걱정하여 남몰래 탄식합니다."
"저 하찮은 소추가 몰래 다른 계획을 품고 이에 감히 우리 세손을 위해하고 우리 국본을 요동시키면서 흉패한 일을 자행함이 끝이 없습니다"
김귀주는 여기에 지원사격을 합니다. 아니 이게 본 게임이라고 봐야겠죠.
"(세손이 그걸 알고 배척하려 하자) 홍봉한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부도의 말을 하기를, ‘저하께서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땅히 이러이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국본을 흔들려는 말입니다."
"잠깐 사이에 또 동궁을 보호해야 한다는 설을 만들어 내어 인심을 현혹시키고 공의를 협박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동궁의 외조이니, 참으로 나를 해치는 마음을 두는 자는 이는 동궁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허나 그에 대한 영조의 답은...
"오늘날의 조선에는 나라가 있는가, 임금이 있는가? 거의 10년 동안 고치려 했는데도 또 당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김씨 일가를 아예 내쳐버리고, 척신은 주요 직책에 오르지 못 하게 했죠. 뭐... 일단은 홍씨 가문의 판정승입니다. 하지만, 김귀주가 약해진만큼 홍씨 가문도 세력이 약화됐죠. 이 틈을 찌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3. 홍인한과 정후겸
그 뒤를 이은 게 바로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 옹주의 양자 정후겸 듀오입니다. 영조 50년에 우의정에 오른 홍인한은 영조가 죽기 마지막까지 최고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정후겸은 영조가 그리도 아끼던 화완 옹주의 아들, 양아들이라 해도 영조의 사랑은 그대로였습니다. 뭐 이게 문제였죠...
영조 51년 11월 30일, 영조 나이 여.든 둘, 세손이 이미 스무 세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마침내 영조는 물러날 생각을 합니다.
"긴요하지 않은 공사는 동궁에게 들여보내되, 상소에 대한 비답과 공사 중에 긴급한 것은 내가 왕세손과 상의하여 결정하겠다. 수일 동안 기다려 그 일처리하는 솜씨가 익숙하게 되는 것을 보아가며 마땅히 여기에 추가하는 하교가 있을 것이다"
대리청정은 물론 왕위를 물려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죠. 당연히 대신들은 반발하고 또 반발했습니다. 영조는 자기 병을 얘기했죠. 문제는 이 때 홍인한의 태도였습니다.
"이때 홍인한이 승지의 앞을 가로막고 앉아서 다만 승지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또한 임금의 하교가 어떻게 된 것인지도 들을 수 없게 하였다. (대신들에게는 그냥 말로 한 거라고만 했구요)
임금이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써놓은 전교를 읽어 보아라.”
하였다. 임금의 생각은 조금전에 불러 쓰게한 전교를 이미 썼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때 홍인한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감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신자된 자로 누가 감히 읽겠습니까"
세손은 안 되겠다 싶어서 자기가 사양하는 상소를 올려야겠으니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홍인한의 모습입니다.
"홍인한이 묵묵히 앉아 응답하지 않고 승지를 돌아보며 손을 저어 중지하도록 하였다. 이명빈은 여러 대신들의 뒤에 있었고 여러 대신들은 홍인한의 뒤에 있었으므로 모두가 홍인한의 앞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또 임금의 하교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듣지도 못하였다."
헤에... 재밌게 흘러가네요.
영조는 이게 저지되자 병권을 주려 했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전례가 있다면서 설득시킵니다. 이어서 인사 처리, 상소와 문서 결재까지 일사천리로 맡기죠. 적어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준비해서 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 직접 그와 얘기한 것이 홍인한, 영조의 반박에 하나하나 설득당한 것도 홍인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오는 길에 세손이 아직 상황을 모르고 한 번 더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니 도와달라고 하자 이렇게 말 합니다.
"궐내에서 한 일을 신 등이 어찌 알겠습니까"
다음 달 3일, 서명선의 상소가 올라옵니다. 나름 충격적인 거였죠.
"지난달 20일 대신이 입시하였을 때 좌의정 홍인한이 감히 ‘동궁이 알게 할 필요 없다.’라는 말을 함부로 전석에서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이른바 삼불필지(三不必知). 홍인한의 죄였습니다. 11월 20일로 거슬러 올라갑시다. 그 이전부터 영조는 조금씩 세손에게 대리 청정을 맡길 뜻을 내비쳤습니다.
"(내가 늙었는데 이제 어쩔까?)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만한가 알겟으며 이조 판서는 누가 할만한가를 알겠는가?] (슬슬 청정을 하려고 하는데 어떠냐?)"
"세손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알 필요 없습니다.]
저 세 가지를 알 필요 없다. 이것이 삼불필지입니다. 서명선은 이것을 통렬하게 반박하며 그를 처벌하라고 하고 있죠. 영조는 이걸 회의에 붙이는데, 흥미로운 말이 나옵니다. 세손이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린 게 있다는 거였죠. 영조는 급히 가져오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일을 돕는 게 효인 건 맞는데) 다만 천만 불안한 것이 있는데, 참으로 두 대신의 ‘알게 할 필요가 없고, 염려할 것이 없다.’라는 연석에서의 주달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저는 못 할 것 같네염)"
이걸 본 영조는 "내가 늙었다 하나 아직 왕이다"면서 대노했고, 다음 날로 바로 홍인한을 파직시켜 버립니다. 결국 이 일은 세손, 정조가 자기 편을 이용한 반격이었던 거죠. 이후 순조롭게 대리 청정의 명령이 떨어지고, 세손이 세 번(-_-;) 사양하는 형식 끝에 그가 거의 모든 업무를 맡게 됩니다. 이 때 영조의 말입니다.
"아! 묻노니, 나의 손자는 내 나이를 아는가?"
"아! 조선이 할아비와 손자에게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어찌 네 할아비를 곤란하게 하느냐? 어제 밤에는 잠을 잘 잤는데, 오늘밤은 네가 곤란하게 하니, 어찌 눈을 붙이겠는가?"
영조의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죠. 다음 해, 그는 마침내 길고 길었던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4. 세손을 위협한 자들
자... 그럼 -_-; 정리를 해 볼까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원수라는 김상로, 문성국, 문녀를 모두 처벌합니다. (뭐 두 명은 죽었지만요 -_-;) 그 다음으로 홍인한, 정후겸, 화완 옹주에게 화살을 돌려 그들을 숙청하죠. 정후겸과 화완 옹주도 대리 청정을 사양하라고 강요했었거든요.
혜경궁은 홍인한 역시 변명합니다. 어떻게 그걸 하나하나 "알 필요 없다"고 했겠냐는 거죠. "그냥 임금 말 다 듣고 전체적으로 알 필요 없다"고 한 거라고 한 거죠. 사실 대리 청정 때 그런 걸 반대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원래 임금의 후계인 동궁이라는 자리는 임금의 건강 같은 것만 맡으면 됐습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정말 알 필요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 변명의 정도가 좀 약한 편이네요.
영조실록 마지막의 사관론에는 이렇게 홍인한의 태도가 자세히 적혀 있고, 그에 관련된 정후겸 등의 문제까지 다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정조 집권 후 홍국영 등이 적은 거겠죠. 그의 죄도 꾸며진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가 정말 원론을 말했을 수 있다는 거죠. 다만 정조 때 홍씨에 의해서 일어난 역모, 정조가 아무리 밀어붙였다지만 정말 일말의 반론도 없을 정도로 쉽게 처벌이 된 것 등을 생각하면 그들이 정말 대리 청정을 반대하고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 그걸 생각하면 정말 어이 없는 꿈을 꾸었다는 게 되겠지만요. 확실한 건 아예 정조를 제거하려는 수준까진 아니었더라도, 이 때 홍씨 일가는 확실히 세손의 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청명당은 이 배후에 홍봉한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조 초 홍봉한은 청으로 보내는 사절에 홍인한을 추천하기도 했구요. 배후에서 조종했을지, 그냥 동의하는 수준에 그쳤을 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딱히 길을 달리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이에 대해 홍인한이 홍봉한을 배반한 거라면서 홍봉한은 철저히 지키죠. 일단 죄는 있다는 뒷맛을 남긴 채로요.
반면 김귀주가 여기에 관련이 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습니다. 혜경궁이 남긴 김귀주의 죄가 있긴 하죠. 세손이 사도세자의 일이 적힌 승정원일기의 해당 부분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 김귀주는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의 논리는 이거였다고 하죠. "대명률에 미친 사람은 죄 줄 수 없다 했는데 그렇게 되면 영조가 죄를 지은 게 된다"는 게 이유였죠. 하지만 이건 대명률에 없는 거였습니다. -_-a 뭐 결국 정조는 영조에게 말 해 이 때의 기록을 없애버리긴 합니다. 반면 김귀주 쪽의 기록에서는 세손은 수정을 원했고 김귀주는 아예 없애버리자고 했다는군요. 비슷하지만 뭔가 다릅니다.
혜경궁은 이걸 거슬러 올라서 사도세자를 죽인 죄까지 소급하려 하는데... 솔직히 한 게 뭐가 있는지나 모르겠습니다. -_-; 정순왕후가 왕비가 된 건 세자가 죽기 2년 전, 이 때 홍봉한의 위세는 막강했고, 부자간의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된 상태였죠. 오히려 김씨네가 제대로 움직이는 건 세자가 죽은 지 10년 가까이 돼서입니다.
오히려 정순왕후는 이 때 정조를 도왔습니다.
"아! 과궁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우리 자전의 성대한 덕과 은혜 때문이다. 선대왕의 대리 청정하라는 명을 도와서 빨리 큰 계책을 결정하고, 흉악한 무리들의 선동하는 모의를 살펴서 화의 싹을 미리 꺾어놓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 홍봉한이 자기를 협박한다는 것을 정순왕후에게 말했습니다. 위에 홍봉한 공격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 때 김귀주가 인용한 말은 바로 이 때 정조가 정순왕후에게 했던 말이었죠. 세손이 홍씨를 경계한 것은 이미 이 때였고, 정순왕후와 김귀주는 그것을 받아들여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 결과는 오히려 김귀주의 패배였죠 -_-; 하지만 그들은 정조 때에도 홍씨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홍씨를 공격한 것은 세손 시절 정조의 지원 사격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들 자신의 목적에도 맞았지만) 그 이후에도 정조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저 김귀주의 임진년(영조 48년) 상소는 아주 놀라고 두려워할 곳이 있었으니, 곧 그 중에 추숭의 설이다."
+) 찾아보니 이 때 김귀주가 말한 것 중에 "홍봉한이 세손한테 내가 사도세자 추숭해 줄 테니 나만 믿어라" 이랬다는 부분이 있네요. 정조가 지은 말은 아니었네요.
"대저 김귀주가 처음에 정후겸과 더불어 주무하고 배포해서 사생 동고의 친구로 맺어 힘을 합해서 홍봉한을 공격하였다"
전혀 뜬금 없는 말이 나옵니다. 48년 김귀주가 홍봉한을 공격한 상소는 그가 정후겸과 동맹해서 한 거라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가 정순왕후에게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홍봉한에게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고 합니다.
정후겸이 이 때 김귀주와 같은 편이었다면, 그는 김귀주를 배신하고 홍인한과 손 잡은 것이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김귀주도 정후겸과 어울렸다는 죄를 받을 만 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뒤에 있었던 건 정조가 정순왕후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조가 세손 시절 홍씨를 견제하기 위해 김씨와 손 잡았다가 그걸 배신한 거라고 봐야죠.
세손 시절부터 정조는 이랬습니다. 과연 답은 무엇일까요? 홍씨와 김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며, 세손의 대리 청정을 반대한 건 대체 누구였을까요? 그리고, 정조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편은 예고했듯 해답편 방식으로 이루어지겠습니다. 문답 형식으로 할 것 같네요. 혹시 구체적으로 질문할 것이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그런 것에 대한 답을 하는 방식으로, 사도세자가 죽은 날부터 순조 때까지의 모든 일들을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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