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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9 16:26:47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5) 궁 밖으로
1. 온양으로
혜경궁은 여러 차례 세자가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 되는 사실입니다. 일 년에 몇십 일이나(!) 바깥으로 보내주는 군대에서도 더 나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요. 안 그래도 지옥 같았던 궁궐, 빠져 나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영조가 허락이나 해 줄까요.
그 때 세자가 이용해 먹은 게 바로 화완옹주, 이른바 정처입니다. 영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녀, 의외로 세자와의 사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혹은 어쨌든 오빠니까 세자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가요. 이 때의 모습이 또 가관입니다.
세자는 정처의 어린 아들을 인질로 삼고 -_-; "궁궐이 갑갑해서 그러니까 나를 밖으로 보내줘라. 내가 습진 있는 건 너도 알잖아"라고 협박했따고 합니다. 이 어린 아들이 바로 화완의 양아들, 후에 논란이 되는 정후겸입니다. 혜경궁은 그에 대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라면서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평가를 남겼죠. 화완 옹주는 겁 먹은 것이든 애처로웠던 거든 그 청을 들어 주죠. 영조도 허락합니다. 세자는 시강원 관원들에게도 습진을 보여주며 보내주기를 호소했다고 하죠.
이 온천행에 대해 영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기의 방식대로 치료하라고 했다고 했고, 이게 또 그럼 그렇지라는 느낌이 들지만, 영조는 이전에 자기가 병에 걸렸을 때도 그랬습니다. 물론 실패했고 그 자신도 온천으로 갔죠. 아무튼... 이 온천행은 쓸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대리 청정까지 하는 세자, 그를 따르는 건 520명 정도였습니다. 수천 명을 동원하기로 정했던 건 영조였는데도요.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 이 때 세자의 화증은 씻은 듯이 낫습니다. 이 때 사도세자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면해 줬다고 하고, 호위 군사가 콩밭을 헤치자 보상해 줬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에... 정조가 직접 지은 행장에서요. -_-; 그리고 이게 실록이든 한중록이든 찾아볼 수 있는 세자의 유일한 업적입니다.
허나 이것도 의심해 봐야 됩니다. 세자가 온양으로 떠나던 날, 실록의 기사입니다.
"사부·빈객이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으니, 식자들이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왕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한 명도 안 따랐다는 거죠. 그런데 행장에서는 이 때 (병 핑계대고 계속 빼 먹었던) 서연을 매일마다 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서연을 열 스승들이 없는데도요. 정작 영조가 온양으로 갈 때는 백성들 일일이 만나보고 하면서 바쁘게 살았지만, 세자가 갔을 때는 그런 게 딱히 보이지 않죠. 정조는 후에 이걸 꽤나 기념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비석을 세우고 뭘 하고 뭘 하고... 영남만인소에서도 이 때 세자의 치적이 보이긴 합니다. 이 때 정말 잘 했다구요.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병은 나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거 외에는 따로 얘기할 거리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9일 동안의 외출, 그게 얼마나 달콤했을까요. 그의 병이 정말 확연히 나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를 전혀 일으키지 않은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담배 끊었다가 한 대 피면 정말 달콤하죠. 그리고... 정말 끊을 수 없게 되죠. 금단 증상은 찾아 왔고, 그의 비행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외출로 인해 병이 나았다는 것에서 그의 병이 뭐였는지 더욱 확실해지죠.
+) 나았다 낳았다 드립 쓰고 싶은데 어렵군요 -_-;
2. 혼돈, 파괴, 망...
세자의 병에 대해서는 정말 여러 가지 심리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는 소재죠. 이를테면 영조 앞에서는 발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정말 정신병인가 하는 주장이 있고, 한국 고유의 (...) 정신병 화병이라고 반박하는 게 있죠. 뭐... 이런 자세한 건 적지 않겠습니다.
1760년, 영조 36년부터 그의 증상에 대한 모습은 심해집니다. 양제와 빙애, 세자가 몰래 들였던 첩들이고 자식들까지 낳았습니다. 하지만... 세자는 이들까지 죽입니다. 이쯤되면 그가 죽인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죠. 아니, 혜경궁에게 손 안 댄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손 대기도 했구요. 그가 열 받아서 바둑판을 던져서 실명할 뻔 했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았고 눈두덩이 부풀어 올라서 영조도 못 볼 정도까지 갔다고 합니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고는 있지만, 온양으로 간 9일 동안 남편을 못 봐서 다행이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그 기간 동안 가족과 친척들을 부릅니다. 자기도 나름 자유를 되찾은 거겠지만, 언제 죽을 지 몰라서 그랬다고 생각해도 되겠죠. 자기 생일 때 세손을 비롯한 자식들이 문안 왔는데, 이 때도 "부모도 모르는 자식"이라면서 욕 하고 내쫓습니다.
그냥 병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세자도 이 때 확실히 느꼈을 겁니다.
61년, 영조 37년에는 이천보, 민백상, 이후 삼정승이 모두 죽습니다. 이 때가 특이한데, 하필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던 세자의 관서행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때문에 이걸 당대는 물론 현재에도 (이모씨라든가) 세자의 죽음과 연관짓는데, 알고 보면 다들 관서행 전에 죽었고, 다 병사였습니다. 얼마나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병설 교수는 대천록을 빌려 직접적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영향은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전에 선위 때 문녀에 대해 적은 걸 생각하면 대천록의 신뢰성이 그리 높진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세자 때문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인식과는 확실히 다른 결론을 내려야 됩니다. (세자의 비행에 대한 책임으로 죽었든 세자와 왕 사이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죽었든 간에요)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신하들은 일관적으로 세자를 옹호했고, 영조도 그걸 물리치다가 받아들이려고 했고, 다시 물리쳤습니다. 세자 반대파인 노론이 세자 옹호파들을 내쳤다고 하지만, 반대로 봐야 됩니다. 영조가 세자 옹호파들을 철저히 내쳤고, 때문에 왕 주위에는 세자 반대파밖에 남을 수 없었다구요. 홍봉한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개인적인 정을 빼더라도 세자를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권력의 원천이 세자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 섭니다. 무슨 음모 그런 게 아니라 왕의 마음이 세자를 떠났기에 그걸 쫓았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옷 입다가 사람 죽이고, 말 안 듣는다고 죽이고, 자신의 "은혜"를 거부한다고 죽이고... 그런 한편으로 세자는 계속 숨어 들어갔습니다. 세자는 지하에 마치 관 같은 방을 만듭니다. 거기에 한참 동안 누워 있다가 나오기도 했다고 하죠. 이상한 무기들을 만들어서 거기 숨겨 뒀는데,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겉은 지팡이인데 안에 칼을 숨긴 것도 있었습니다. 그게 세자가 죽은 후 다섯 개나 발견됐다고 하죠. -_-;
뭐 그런 거야 개인 사정이고, 한중록에서 일부러 나쁘게 적었다 할 수도 있으니 다른 걸 보도록 하죠.
3. 평양으로
영조 37년, 4월 22일에 유생들이 세자를 만났습니다. 왠일로 세자는 그들을 만났죠.
"관학 유생의 글은 저하께서 유람하러 드나드는 것을 경계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여항에서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 있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 찾아왔다는 것인데... 그들의 말입니다.
"저하께서 강독을 치워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궁료를 접견하지 않은 지도 역시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 좌우에서 모시는 자는 오직 환관이나 액속들이니, 반드시 말을 타고 달리며 사냥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재화를 늘리며 음악과 여색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반드시 드나들며 유람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놀자고 하는 무리들이니 물리치라는 거죠.
세자는 내시에게 일을 맡기고 관서로 다녀온 것입니다. 4월 2일부터 22일까지였죠. 그가 갔다 온 당일부터 유생들은 저렇게 세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건 여러 차례 계속됩니다. 그 이전까지 세자가 여러 차례 궁 밖으로 나가서 놀다 오긴 했습니다. 기생들을 불러서 논 적도 많았죠. 하지만 평양이 여기서 얼마 거리입니까 -_-; 당연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자도 식겁했는지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름 서연도 열심히 하고 신하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죠. 그런 가운데서 영조를 만났습니다.
저번 편에서 4개월간 진현 안 했다고 영조가 오만 발광을 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근데... 이 진현은 1년만이었습니다. 홍봉한은 그에 대해 어땠냐고 묻자, 영조는 "살이 좀 쪘더군"이라는 별 느낌 없는 말을 했습니다. 홍봉한의 말입니다.
"소조가 돌아가는 길에 기뻐함이 마치 무엇을 얻은 듯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영조는 세자에게 크게 뭐라고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자는 기뻐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기뻐할 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세자의 걱정과는 달리 이 때 영조는 세자가 평양으로 간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영조가 이 사실을 안 것은 4개월이나 지난 9월이었습니다.
"어제 서명응의 글을 보았는데 이는 반드시 선왕의 영혼이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세자가 평양 간 것에 대해 자세히 말한 후) 성교의 아래 어찌 감히 작은 것인들 가려 숨기겠는가?"
이 때 홍봉한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죄가 신의 몸에 있습니다. 먼저 신을 물리쳐 상하에 진사하소서"
영조는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 일이 그다지 크게 번지지 않았습니다. 뭔가 생각이 있었다면 그걸로 뭔가를 벌였겠죠. 이 때 영조는 정말 몰랐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생들조차도 바로 알았던 일을 왕이 몰랐던 걸까요? 서명응의 상소는 세자에게까지는 갔지만, 영조에게 가진 않고 승정원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영조가 그걸 찾아보고서야 알게 되었죠. 뭐 우연히 찾은 게 아니라고 한다면, 이 때 그걸 말 한 사람이 있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왜 그 때 가서야 그걸 알려 줬을까요? 유생들이 세자를 비판하던 때였습니다. 그 틈을 타서 왕에게 말하면 그건 이간질이고 뭐고 아닙니다.
홍봉한은 이에 대해 자기의 죄라고 하면서 벌을 달라 했습니다. 이 때 이런 정도의 큰 비행을 감출 만한 사람은, 그 정도로 세자 편을 들 정도의 사람은 홍봉한 정도밖에 없긴 합니다. 그걸 숨긴 주체가 홍봉한이든 세자든, 확실한 점은 이 때 주변 사람들은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 관서행은 세자가 영조에 맞서 쿠테타를 일으켰다는 해석을 받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충족되죠. 영조가 그를 죽인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라는 거죠. 하지만... 이 때 영조의 처분은 너무나도 간단했습니다. 세자 주변에 있었던, 세자를 제어하지 못 하고 그걸 자기에게 알리지 못 한 자들을 처벌한 거죠. 혜경궁은 이 때 홍봉한도 큰 벌을 받았고, 한 달 넘게 나가 있어서 그 이후의 일에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홍봉한은 파직되자마자 다시 영의정에 오릅니다. -_-; 이것조차도 일회적인 처벌이었을 뿐이라는 거죠.
반면 정조는 이 일이 관서의 도적들을 없애기 위해, 혹은 홍계희의 반란을 알고 평정하기 위해 한 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근데... 무슨 북벌지계도 아니고 이렇게 의심받을 짓을 할 이유가 없죠. 오히려 이건 영조가 말한 쿠테타에 대한 대항마라고 봐야 됩니다.
쿠테타든 반란 토벌이든 그 직후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와 세자가 걱정하는 모습, 1년이나 안 하던 진현을 한 모습을 보면 이건 그렇게 큰 문제로 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세자가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봐야겠죠.
4. 왕의 마음은 세손에게로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을 붙여야 됩니다. 왜 영조는 1년이나 진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었을까요? 관서행을 알았을 때 그는 "궁궐 밖으로 나다니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쨌든 세자의 비행을 대충은 알았지만 아예 관심을 끊은 것 같은 모습입니다. 1년만에 진현했을 때도 그저 그런 모습만 보여주었고, 세자는 그 모습에 기뻐했죠.
관서행이 알려진 직후 세자는 대죄하면서 약도 거부합니다.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약을 받을 수 있겠냐면서요. 사소한 것에도 욕 하던 영조는 이에 대해서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세자 주변인만 처벌했을 뿐이죠. 자... 이런 것들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이 일이 있기 전의 모습입니다.
"내가 한 몸을 아끼는 것이 아니고, 병이 만약 더 심해져서 다시 대조께서 마음을 더 쓰시게 된다면, 어떻게 염려하며 민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진현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두통으로 혼미하고 어지러워 바로 앉아 있기가 어려우니, 태복시에 분부하여 가마를 대령하도록 하라"
36~3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신하들은 심심할 때마다 진현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마다 세자는 알았다 알았다 하지만, 정작 하려고 할 때는 이런 모습을 보였죠. 온양행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병을 핑계대고 있었죠.
한편 이에 대한 영조의 반응입니다.
"원량이 바야흐로 조리하는 가운데 있으니, (또 옛날 얘기) 진현은 지금 논할 수 없는데도 (중략) 장차 도하의 인심을 소란스럽게 하려는 것인가"
"만약 진현과 강대(강제로 만나는 것)로 구속한다면 혹시라도 은미한 것을 격동시켜 풍자함이 있게 될까 염려스러우니, 조용히 기다리도록 하라"
영조는 "친절하게" 세자의 병을 핑계로 거부했고, 세자도 더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서로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홍봉한을 비롯해서 신하들은 계속 진현을 양쪽에 권 했지만, 양 쪽 다 거부했죠.
이쯤 되면 뭔가 느껴지죠. 신하들이 이걸 계속 권하는 동안... 영조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세손을 머물러 자게 하려고 하였으나 창덕궁에는 단지 빈궁만 있으니, 세손을 위하여 효를 지도하는 도리에서는 돌아가서 보도록 하라
"이날을 만나니, 네 할아버지의 마음이 갑절 더하다. (중략) 너를 본 지 오래이므로 한번 불러 보고싶다."
오랜만은 개뿔, 세손은 심심할 때마다 영조를 찾습니다. 그 때마다 영조는 세손의 공부를 물어보죠. 그 장면이 실록 곳곳에 있습니다.
(링크 폭파. 그냥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84%B8%EC%86%90&keyword=%EC%84%B8%EC%86%90 여기서 찾아봅시다. (...) )
"대개 이날 임금이 많은 것을 물음이 수백 마디의 말뿐만이 아니었으니, 비록 성덕한 자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곳이 가끔 있었으나 우리 세손은 응대함이 메아리처럼 빨랐다"
"후세에 영화롭게 빛날 것이다"
"잘 대답하고 잘 인용하였다"
"이 대답이 기특하도다. 기쁘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고 근심을 끼치지 않겠다고 하였다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뭐 대충 찾은 것만 해도 이 정도죠. -_-; 이를 통해 세손의 학식이 얼마 정도였는지 (그 까다로운 할아버지를 상대로 열 살짜리가 저러고 있습니다) 영조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이런 말도 합니다.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이 날짜는 영조 37년 1월 5일, 세자의 관서행이 있기도 전의 일입니다. 300년 조선의 운명이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세자가 아직 뻔히 살아 있는데도요. 이것과 허구헌날 진현하라고 요구했던 신하들의 말... 구도가 대충 잡히죠.
5. 돌아올 수 없는 길
이 때 세자의 모습은, 모든 걸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기생은 물론 비구니까지 불러서 연일 잔치를 열었고, 잔치가 끝나면 다들 지쳐서 "같이 잤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동원된 게 화완 옹주였는데, 세자는 내관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소리껏 외치게 했고 (뭐겠어요) 화완 옹주에게도 영조 욕을 시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겁 먹어서 시키는대로 했다고 하죠.
이 점에 대해서 정병설 교수는 흥미로운, 아니 좀 더러운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전 사도세자 연구 과정에서 나왔던 건데, 마구 놀면서 자는데 화완 옹주도 같이 있었다는 것, 세자의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에서 근친 상간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거죠.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무섭습니다. -_-;
이 무렵 세손빈이 간택됐는데, 영조는 이 때도 옷차림을 문제삼으며 참석조차 못 하게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뭐 -_-...
세자는 이 때 세손의 위치가 어떤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로 똑똑한 세손이라면 이미 그 때 알았을 겁니다. 아니더라도 커 가면서 알지 않았을까요. 한중록에 소개된 대화입니다.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 하니 어찌할꼬."
"안타깝소마는 설마 어찌하시리이까
"어이 그러할까. 세손을 귀하게 대하시니 세손이 있는 이상,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은가."
"세손이 마누라 아들인데 부자가 화복이 같지. 어찌 다르리이까?"
"자네는 잘못 생각하네. 더욱 날 미워하시어 살 길이 점점 어려우니 나를 폐하고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으면 어찌할까본고."
"그럴 리 없습니다!"
"두고 보소. 자네는 귀히 대하시니 내 부인이로되 자네는 물론 자식들도 예사롭겠지만 나는 병이 들어 이러하니 어찌 살게 하겠는가."
+) 괜히 안 고쳤는데, 혜경궁은 세자에게 마노라, 즉 마누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국문과 교수답게 정병설 교수는 마누라의 뜻이 그 때는 이랬는데 이렇게 변했다고 분석하고 있죠. 한중록의 가치는 사학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때 혜경궁은 세자에게서 병의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신이 깨끗할 때 한 얘기라는 거죠. 뭐... 세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영조 38년, 1762년 5월 22일, 마침내 그 때가 찾아왔습니다.
"반란이 눈 앞에 다가왔으니, 마땅히 친국하겠다"
세자를 죽게 만든 사건, 나경언의 고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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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날이 다가왔군요. 앞으로 한 편? 두 편? 나경언의 고변을 다루면서 마지막 정리를 한 후, 그 때 그 날로 가겠습니다.
걱정한 거랑 달리 과거와 미래가 얼추 맞네요. 오히려 과거편이 한 편 더 많아질 것 같기도 합니다.
뭐... 그 때가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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