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랑이 적힌, 손 때묻고 너덜너덜해진 책 페이지는 그만 넘겨버리라는 말을 들었다.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그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한번도, 두번도 아니고 수십 수백번은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도 그 말을 들은 후에도.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단 한번도 그것을 사랑이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겼을 때에도 시작하지 못했다. 내 고백은 지나고 나서야 허구와도 같은 것임을 알았고, 그녀와의 모든 희망이 상실된 후에야 사랑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지워지지도, 책장을 넘기지도 못했다. 기억에 기록하지 못한, 삶에 편입시키지 못한 사랑이라는 마음은 내 안에서 수많은 언어로 회오리쳤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번 같은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글을 토했나보다. 그리고, 오늘도 또 그런가보다.
"그 여자나 너나, 끝까지 못되지도 못하고, 착한건 착한데, 그렇다고 쿨하지도 못하고, 둘 다 어설프니까 그렇게 질척대지."
그 형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우리의 문제를 짚어주었다. 그리고 나즈막히, 그게 청춘이지. 하고 아련한 말소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저 히힛, 하고 웃었다. 청춘이라, 청춘이라고 하기에 그녀와 나는 너무 멀었기도, 가깝기도 했다. 귿쎄.. 지금에 와서는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단지 난 왜 그녀를 사랑하면서 사랑이 아니라고 했던걸까 하고 생각해 볼 뿐이다. 어째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녀에게 떨림 없는 고백을 하며 허세를 부렸던 건지. 그렇게 다 지난 후에야 모든 일에 대해 단 한줌의 기억도 제대로 잃어버리지 못하고 생생히 되새김질 하고 있는지. 그것들을 열심히 생각해 볼 뿐이다. 내게 있어서 그때의 사랑이란, 성적인 욕망이 극대화된 지점에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난 한번도 그녀를 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지점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 언제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도 더 많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들려줄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를 처절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그것도 몰랐다. 바보같이.
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단체문자를 보냈다.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녀와 늦은 술자리에서 왜 자기 번호가 없냐며 실망하던 모습을. 그 때만해도 문자 한 통 전화 한 번만 걸려오면 안절부절 못하고 그 번호에만 매달리는 내가 웃겨서 지워놨던 것을 어버버버 하며 원래 잘 번호저장을 안한다고했다. 외워논거라고. 그녀는 그것이 적잖케 실망스러운 듯 했지만, 나는 그 다음날이 되서야 번호를 저장했다. 그 이름에는 '누나'라는 단어는 빠져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녀의 번호는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있었다. 솔직히, 모르고 보냈을리는 없다. 어쩌면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도 고정적인 주제에 새삼스레 '군대가니까 연락안됩니다'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무슨 비즈니스 맨도 아니고 그리 급한 용무가 있을 턱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말을 보냈던건 일말의 희망이기도 했다. 날 기억할 지도 몰라- 라는 희망. 그렇지만 내가 그녀를 그리며 수많은 글들을 쓰고 난 뒤에도 사실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내 머리속에서 헷갈릴 것 같은 그녀와의 일들은 여전히 비극적인 종말로 남아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한 줄의 통보도 없이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기억에 남아있을리가, 흔적이 남겨져 있을리가 없다. 난 그녀에게 삭제된 사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싫증이 나 버릴때는 가차 없는 법이니까.
자고 일어나니 입소가 이틀 앞이었다. 마지막으로 일하던 카페에 가서 인사를 하고 필요한 물품이나 차표예매를 하러 돌아다녔다. 여느때처럼 오후 2시쯤에 핸드폰이 울렸다. 신한금융 이대리는 꼭 이시간에 문자를 한다. 난 반사적으로 언제나처럼 핸드폰을 슥 밀고 메뉴-삭제를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삭제를 누르려는 손가락이 딱 하고 멈추었다. 배 속에 커다란 추가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핸드폰에는 그 사람의 이름 세 글자가 작게, 그리고 선명히 드러났다. 나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 위에서 엉거추춤한 자세로 발걸음을 뚝 하고 멈추었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온 답장에는, 보낼지 말지를 고민했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 때서야 다시금 숨을 푸하-하고 쉴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말투가 여전한 탓에 긴장이 스르륵 하고 풀려버린 것이다. 나는 아직 삭제되지 않았다.
그 뒤로 이틀간 정말 몇 통 안되는 문자를 나누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 처럼, 어떤 중요한 내용도 없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술이 여러잔 들어가고 밤이 넘어 막차가 끊기고 새벽이 다다를 쯤에야 서로의 거리를 아주 약간 좁히곤 했다. 전화나 문자는 매번 평행선같은 거리를 유지했었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상대를 강하게 흔들고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답답함이었고, 아쉬움이었으며, 영원히 그리게 하는 것이었다. 약간 좁혀진 거리가 다시 되돌아가다 못해 멀어질 쯔음에만 만날 수 있었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그런 모든 모습이 여전했다. 어쩜 그렇게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지. 그때서야 내게 느껴진건 설렘이라거나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안도였다. 나를 기억한다는 안도. 나를 증오하지 않는다는 안도. 나를 혐오하지 않는다는 안도. 수 개월간 끊임없이 내 머리속에서 괴롭힌, 이유도 모른 채 미움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 그건 마치 구원같았다. 적어도, 나는 증오스러운 기억의 쓰레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훈련소 입소가 12시간정도 남아있다. 그녀와 나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의 적은 문자를 나누었고, 그 안의 말들도 정말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못되지 못한 것 같고, 나 역시 그런 것 같다.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사랑은 성적인 욕구의 정점에 있는것만도 아니고, 플라토닉한 연대감의 정점에 있는것도 아니다. 사랑은 영원한 결핍을 느끼며 그것을 끊임없이 채워나가려 하는 움직임이고, 난 그때 그 사람에 대한 결핍만을 가지고 조금도 채워나가지 못했기에 여전히 질척이는가보다. 나는 더 이상 이 늦은시간에 그녀를 보채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답장이 없다고 안절부절해 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녀는 충분히 내게서 멀어져있었다.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그렇기에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며 날 속일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내일 훈련소 앞에서 전화를 해야겠다. 그때 그녀에게 얻어먹은 걸 아직도 못 갚고 있으니, 훈련 끝나면 꼭 갚겠다고.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한다.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는 다음페이지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을 내 삶에 섞어내든가, 모든 결론을 마치고 버려내든가 해야하는 시점을 맞이했다. 4주가 지나고 예전보다 더 바쁘다는 그 사람을 만나면 서로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그 사람은 내게 시작과 끝을 맺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내가 가진 오해들을, 아쉬움들을, 소용돌이 치는 말들을, 그것들을 다 되새겼던 마음을 하나하나 부딫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란, 부딫혀 일어난 상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모순된 감정같기에. 상대보다 한없이 이기적이 되어 부딫힐 수 밖에 없는 욕심많은 마음이기에. 다시는 이렇게 긴 후회만을 곱씹고싶지 않기에.
바보같다.
나 진짜 꼴불견이다.
이런게 청춘이라고 한번만 합리화를 시켜야겠다. 이번만 좀 더 이기적이어야겠다. 마지막으로, 시작을 끊어 정말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