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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8/09 00:18:08
Name 별마을사람들
Subject [일반] 운명이란...
저는 여유가 있다면 토요일에는 로또를 사는 편입니다.
살다보면 돈 만원이 아쉬울때가 있고, 그 주에는 건너띄기를 하는 편이지만...
지갑에 몇 만원 정도 들어있고, 특별히 크게 지출할 게 없다면 토요일 오후에는 반바지에 맨티 차림으로 처벅처벅 집에서 나와
근처 복권방에 들러 수동으로 만원어치 로또를 사고, 역시 근처 마트에 들러 맥주 두어캔과 담배를 사가지고 집에 들어갑니다.

처음엔 자동으로 만원어치 주세요~ 하고 외쳤지만...
그래도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는게 아니겠어! 하면서 수동으로 찍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대로 맞은 적은 없습니다.

몇 주전 회사 후배와 일을 나갔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습니다.

'야, 네가 로또를 샀는데...추첨일인 토요일이 아닌 월요일 쯤 되었다 치자, 그러데 너는 그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네가 산 로또가 당첨되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모르는 상태야..'

'네...그런데요?'

'너는 지금 월요일에 네가 이미 로또에 당첨되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충분히 자신 할 수 있겠냐?'

'...네? -_-;;'

'아 참나..그러니깐 네가 지난주에 산 로또가 네 지갑에 있어, 그런데 너는 그걸 맞춰본 적도 없고, 누구한테 들은적도 없어, 결과를 모른단 말야'
'네가 산 로또가 당첨되었느지 아니면 꽝이되었는지가 언제 결정이 되었다고 생각하냐고?'

'아 그거야 물론 토요일 오후 8시에 결정이 난 거죠!'

'그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내 생각에는 지금 월요일이 되었든, 네가 바로 로또를 맞춰보는 순간에 결정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무슨 말씀이세요...로또 추첨은 이미 지난 토요일에 끝났다고요...!!'

'추첨이 중요한게 아니고....내 말은 네가 어떤 경로든 간에 네가 결과를 알게되는 순간에 결정되어진다는 거지...'

'아니...선배님...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으음....미안하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미안하다, 밥 사마'

이렇게 흐지부지 이야기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뉴턴의 역학에서는 이미 미래는 정해져 있었었죠.
몇몇 과학자들은 그 점에 대하여 심히 불편하게 생각했을테고,
그 불편함이 더 나은 현대물리학의 기반중에 하나가 되었을겁니다.



한 달 전 쯤이었나...
집에서 동생과 치킨을 시키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을때였습니다.
음악을 듣고, 그러다가 나름대로 감동적인 영화 '어거스트 러쉬'를 동생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형제의 대화는 깊어졌고, 그러다가 예전 교과서에 실렸던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동생은 공고 졸업이고, 특별히 소설에 관심이 없던 터라 그 이야기를 제대로 모르더군요.
그냥 우스갯 소리로 친구들 별명으로 얼굴 크면 큰바위 얼굴이라고 놀렸다는 이야기를...
저는 참을 수가 없어서...그 큰 바위 얼굴에 대한 줄거리를 동생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저도 모르게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막 울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두 눈에서 눈물 뚝뚝 흘리면서도 그래도 동생에게 끝부분까지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결국 큰 바위 얼굴은 소설 속의 작은 소년...그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던 소년이었다고...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다 진솔하게 가르쳐 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믿습니다.

위에 예로 들었지만, 제 생각은 뚜껑을 열었을 때입니다. 로또가 토요일 오후 8시 몇 분에 당첨되었어도
결국 확인하는 시점에서야 그 사람의 결과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최첨단(?)의 물리학에서는 어떻게 말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동생에게 보였던 눈물...
예전... 한 여자의, 그 여자의 뒤돌아선 그림자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눈물들...
그리고 그 여자, 지금에서야 어머니...
나의 어머니... 넉달만에 시골에 내려가서 들었던 그 쭈글 쭈글한 입술에서 '한식아~ 밥먹어라!' 라고 말씀하시는게
그 모든게 결정되어졌다는 건,



참 슬픈 일이지...말입니다....응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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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09 00:20
수정 아이콘
저도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 믿어요..
tannenbaum
11/08/09 00:27
수정 아이콘
운명이 정해졌다면 사는게 참 재미없겠죠.
팔자니 운명이니 사주니 뭐니.. 좀더 확장하면 종교적인 관점의 '신'까지.. 어떠한 절대적인 것들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지금 피지알에서 글을 읽고 답글을 다는게 정해진거라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죠잉??

뱀발: 위 글에서 '반바지에 맨티 차림으로'를 '반바지에 팬티 차림으로' 라고 읽은 사람을 저뿐일까요?
ArcanumToss
11/08/09 00:31
수정 아이콘
숙명은 개척이 불가능하지만 운명은 개척할 수 있죠.
몽키.D.루피
11/08/09 00:36
수정 아이콘
글쓰신 분 아이디가 좋네요. 은하수로 히치하이킹이라도 떠나실 기세입니다. 별 좋아 하시나봐요.
11/08/09 00:46
수정 아이콘
슈뢰딩거의 고양이군요!

비슷한 얘기를 친구랑 한 적이 있어요.
5호선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지금 오는 열차가 상일동행인지, 마천행인지, 전광판을 절대 안본다는 가정 하에, 지금 오고있을 열차의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냐?"
결국 0.5의 두 상태를 모두 가진다는 결론을 내렸구요...
초등교사
11/08/09 01:40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이런 얘기 좋아합니다
저야 뭐 초등지식에 머물러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에 관하여 잘 모르는 상태지만
술자리에서 이런얘기 듣고 싶어도 해주는 사람이 없네요
다들 정치 교육얘기에 빠져있어서... 피지알의 좋은점이 이런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양서적이라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마늘향기
11/08/09 04:13
수정 아이콘
저도 글쓰신 분과 같이 뚜껑까지 열어야 내용물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다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실생활에 정확히 대입되기 위해서는
뚜껑을 여는 행위란 어디까지인지, 관찰자란 누구인지, 나란 누구인지 등부터
확실히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겠는데, 과연 몇백년 내에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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