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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08 17:29:33
Name 눈시BB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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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남한산성 - 11. 병자호란






"절대 굴복시킬 수 없는 나라가 열여섯이 있는데, 첫째가 조선이고 둘째가 안남이다."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평생 동안 조선을 경계했던 황제였죠. 이후에도 명은 조선을 경계해서 동북쪽은 명이 통치하겠다고 계속 협박하지만, 명에 대해서는 저자세로 일관한 태종도 영토에서만은 절대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종 대에 이르러 4군 6진을 개척해서 확실히 조선의 영토로 만듭니다. 명이 베트남을 정벌하자 조선은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세종 대의 기사를 보면 안남 정벌이 실패한 것을 보고 황제를 비웃는 기사도 나옵니다.

명에게 있어 조선은 힘으로 누를 수는 없지만 말은 잘 듣는, 껴안고 가야 할 최고의 제후국이었습니다. 만주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결국 멸망하는 동안 한반도의 국가는 신라와 연합한 백제를 제외하면 굴복한 적이 없었고, 결국 신라는 그들을 쫓아냈죠. 고려를 결국 굴복시킨 나라는 몽골이었습니다.

청 태종, 관온인성 황제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1. 청군의 편제
1635년, 청 태종은 몽골을 팔기에서 분리, 몽고 팔기군을 창설합니다. 그 수는 16840명으로 6만이었던 정규군은 77000명으로 늘어납니다. 여기에 예비군과 투항한 한인들의 병력까지 다 합쳐서 총병력은 20만에 달했죠.

그는 정친왕 지르갈랑을 심양에 잔류시켜 군무를 보게 하고, 무영군왕 아지게에게는 명으로부터 오는 해로를 막게 합니다. 한편 패륵 아파타이를 명과의 국경에 남기죠. 그 후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만주족 7만 8천명, 한족 2만명, 몽고병 3만명이었습니다. 명에 투입할 병력까지 동원한 대규모 원정이었습니다. 12월 1일에 그들은 모두 집결하죠.

선봉은 호부승정 마푸다, 마부대였고 그 병력은 기병 6천이었습니다.
좌익은 5군으로 나뉘어 예친왕 도도, 패륵 요토, 공 양굴리(용골대), 패자 서이도, 패자 니간으로 각기 기병 6천이었습니다. 총 3만이었죠.
본군은 7군으로 나뉘어 예친왕 다이시안, 군왕 만조우실리, 군왕 푸타지, 도통 단타이가 기병 6천을 이끌었고, 5군은 몽고병으로 투세투친왕 파달리가 보병, 기병 혼성 3만명을 이끌었습니다. 6군은 패륵 데두로 기병 6천을 이끌었고, 7군은 한병으로 공순왕 공유덕이 보, 기 혼성 1만 명을 이끌었습니다.
우익군은 3군으로 나뉘어 예친왕 도르곤, 패륵 후게가 기병 6천을 이끌었고, 회순왕 경명중이 한병 보, 기 혼성 1만 명을 이끌었습니다.

그 세부 작전 역시 철저하게 짜여져 있었습니다.
선봉은 의주-안주-평양-황주-평산-개성-한양을 연하는 선으로 조선군과의 접전을 회피하고 최대 속도로 진군, 한양과 강화도의 통로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좌익군 3만은 예친왕 도도의 지휘하에 선봉 부대의 뒤를 따라 역시 조선군과의 전투를 회피하고 진군, 조선왕의 남방 퇴로를 차단하게 합니다.
본군 1~5군 5만 4천명은 황제와 함께 좌익군을 따라 이동하며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 중요 지역을 점령, 한양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이 중 몽고병 3만은 서북의 요지에 500~1000명 단위의 병력을 축차적으로 잔류시키기로 했고, 6, 7군은 1만 6천은 수송대로 군량과 물자를 운반하며 뒤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우익군 2만 2천은 예친왕 도르곤의 지휘하에 창성-구성-영변 등의 성을 공략 후 안주-평양-황주-개성을 통해 이동, 임진강을 도하한 후 강화도로 진출하기로 합니다. 이 중 2군은 한양으로 가서 본군과 합류하구요.

강화도와 한양의 통로 차단, 남쪽과의 통로 차단, 서북면의 요충지 점령 및 산성 견제, 강화도 공격까지 모든 작전이 완벽히 짜여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들어맞습니다.

12월 2일, 선봉 마부대는 심양을 출발하고, 곧바로 좌우익군도 출발합니다. 다음 날인 12월 3일, 청 태종 자신도 본군을 이끌고 의주로 진격합니다. 사신으로 가던 박로가 압록강을 넘기도 전이었습니다.

3. 전광석화
12월 8일, 청 선봉은 의주를 곧바로 지나쳐서 엄청난 속도로 남하했습니다. 백마산성을 지키던 의주 부윤 임경업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죠. 이어 오후에 좌익군이 강을 건넙니다. 그들은 비어 있는 의주에 입성하고 백마 산성에 4, 5군 1만 2천명을 투입합니다. 임경업은 3000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허수아비로 병력이 많은 것처럼 한 후 포격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방어가 강력한 것을 본 청군은 미련 없이 다음 날 남하합니다.

청 선봉은 10일에 안주를 통과하고 14일에는 개성을 지나 한양 근교 양철리에 도착합니다. 마부대는 작전대로 행주와 양화리에 각기 천 명씩을 투입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틀어막습니다.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은 "올 겨울에는 오지 않을 거다"고 했고, "적이 온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냈다고 합니다. 겨울이 되었는데도 병력을 더하지 않고 봉화도 자기가 있는 정방 산성에서 멈추게 했습니다. 봉화가 가면 도성이 소란스러워질까봐였다는군요. 이 때 봉화를 확인했는데 "박로가 들어가니 오랑캐가 환영하는 거다"고 하면서 장계를 올리지 않습니다. 9일에는 혹시 몰라서 군관 신용을 보냈는데, 신용이 순안에서 적을 확인하고 돌아오자 "망령된 말로 군정을 어지럽힌다"고 목 베려고 했습니다. 신용은 "내일은 여기까지 다다를테니 확인하고 죽이라"면서 호소하죠. 딱 임진왜란 초기가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한편 다른 장수들이 보내는 장계는 청군에게 모두 뺏겼다고 합니다.

조정에 소식이 들린 건 12일이었습니다. 임경업의 장계가 올라왔지는데 그건 압록강 건너편에 적이 왔다는 것까지였죠. 다음 날에 도착한 김자점의 장계에는 적이 이미 안주까지 다다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적이 안주를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도원수 김자점에게 황주 일대에서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게 하고 검찰사 김경징에게 병력과 수군을 주어 강화도 공략을 막게 하고 유도대장 심기원에게 한양에 6000명의 병력으로 잔류해 적을 막게 합니다. 한편 수어사 이시백에게 남한산성에 들어가게 하죠. 그리고 강화도로 피난 갈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그리 급박한 지 몰랐습니다.

그 날 밤, 김자점의 두 번재 장계가 도착하는데 11일에 적 선봉이 평양을 통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4일에는 개성 유수의 장계가 오는데 이 때 송도(개성)를 지났다고 하죠. 적은 이미 경기도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신주와 빈궁, 봉림,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보냅니다. 인조 자신도 저녁에 강화도로 떠나기 위해 숭례문을 나서는데, 이 때 적이 양철평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곳이 어딘고 하니...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쪽입니다. 남대문에서 거기까지 차 타고 가면 얼마나 걸릴까요.

훗날 효종이 될 봉림대군 일행이 떠났을 때와 인조가 떠났을 때의 시간이 얼마나 차이날지는 모르겠네요. 이 약간의 차이가 전세를 확실히 결정지어 버립니다. 그는 급히 남쪽으로 떠나며 훈련대장 신경진으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합니다. 이 때 신경진은 부장 이흥업에게 80명의 기병으로 적을 요격하게 하지만 전멸당합니다. 전 철산부사 이여해가 병력 500을 주면 적과 싸워 시간을 벌 테니 그 사이에 강화도로 가라고 하지만 거부됩니다.

이 때 최명길이 나섭니다. 그는 혼자 청군에게 가서 시간을 벌겠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신은 마땅히 그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서로 대화가 통한다면 잠시동안이나마 그들의 예봉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사이에 수구문(광희문)을 통해 산성에 들어가셔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시면서 대책을 세우소서"

인조는 그를 정사, 이경직을 부사로 삼아 보내고 급히 을지로를 지나 수구문(광희문)으로 빠져 나갑니다. 이 문은 시체를 도성 밖으로 내보낼 때 썼다고 하죠. 밤 10시에 그는 목표로 한 성에 도착합니다.

남한산성이었습니다.

이 때 인조를 호위하던 군사도 흩어졌고, 소현세자를 수행하던 군사도 달아나서 그가 직접 말을 몰아서 산성으로 들어가야 됐다고 합니다. 이 날 밤에 과천 쪽을 통해 어떻게든 강화도로 가야 된다고 결정하고 새벽에 성을 나서지만, 말을 타기 힘들 정도로 눈보라가 쏟아져서 성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수어사 이시백이 여주, 이천, 양근, 지평, 파주 5개 읍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고 인조를 따라 온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등 경군을 합해 13800명의 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문무백관과 그 노비들을 합해 총 14300여명의 인원이 있었습니다. 인조는 급히 팔도에 교서를 내려 성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45일간의 농성이 시작되었습니다.

4. 청군은 도성으로
1) 동선령 전투
청 태종이 직접 이끄는 본군은 10일에 압록강을 도하, 14일에 안주에 도착합니다. 그 동안 비어 있던 의주, 용천, 곽산, 선천, 정주 등의 지역에 몽고병들을 놔두고 갔죠. 안주에서는 평안 병사 유림이 3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성벽 위의 깃발을 모두 눕히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하게 합니다. 공성계였죠. 이를 본 청 태종은 쉽게 얻을 수 없다고 여겨서 연기를 잔뜩 피운 후 성을 지나칩니다. 이에 유림은 소수만 남기고 3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추격하죠. (3000여명 있었는데 3000여명 데리고 갔으면 성에는 몇 명이 남은 거죠 - -; )

이 때 도원수 김자점은 5000여명을 이끌고 황주 서쪽의 정방산성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적이 내려오자 동선령으로 병력을 투입해 나름 전과를 거두는데 이 때의 일이 이완의 비문에 적혀 있습니다. (출처는 번동아제님 블로그입니다)

당시 이완은 수안 군수로 있다가 정방산성으로 향하면서 도망가는 아전과 황주 파총의 목을 베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는 요충지에 매복해서 공격하거나 정예부대를 보내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하지만 김자점은 결정하지 못 했다고 하네요. 적이 정반산성을 무시하고 내려가는 걸 본 이완은 동선령이라는 계곡에 복병을 두어 적 본진이 오면 공격하자고 했고, 실행합니다. 일단 나타난 건 선봉이었는데 김자점은 공격을 요구했지만 이완은 본진이 아니라면서 거부합니다. 김자점은 열 받아서 그를 목 베려고 하죠 -_-; 이완은 "대사가 이미 틀려버렸다"면서 공격했고, 적을 유인, 섬멸합니다. 다들 이 승리를 축하했지만 홀로 계획이 틀어진 것을 한탄했다고 하죠. 다음 날 황색(-_-) 깃발이 보여서 그는 "저건 분명 한(청태종)이니 오늘 했으면 반드시 죽일 수 있었을 거다"며 한탄합니다. 김자점은 또 해 보자고 하지만 어제 일 때문에 경계할 거라면서 반대하죠. 그래도 김자점은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적은 경계를 확실히 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 넘어갑니다.

이 동선령 전투는 "도원수 김자점이 동선령에서 적을 많이 죽였다" 정도의 기록밖에 없습니다. 개인 비문이라서 신뢰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가장 자세한 편이라고 하네요. 이들은 토산 전투에서도 나름 잘 싸웁니다. 남한 산성의 병력과 함께 조선이 심혈을 다 해 키운 중앙군이었고, 그 성과가 나온 거죠. 하지만 이들은 전세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 합니다.

참고로 동선령은 이전 몽골의 침입 때도 전투를 벌인 곳으로, 남쪽의 조령과 함께 한양의 관문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2) 남한산성 포위
청 선봉 마부대는 14일에는 최명길에 의해 하룻동안 홍제원에 머물렀다가 15일에야 인조의 입성 사실을 알고 4000으로 한양을 우회, 뚝섬 쪽으로 진출해 신천 나루를 도하해 남한산성 서쪽 20리 지점의 삼전도에 도착합니다. 그는 곧바로 병력을 4개 대로 나누어 남한산성 서쪽에 포진하고 100여 명의 기병으로 위력 정찰을 시도합니다. 이 때 이시백은 성문을 닫고 응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참 익숙한 지명들이 계속 등장하죠? (...)

이 때 마부대의 병력은 단 4000에다 계속된 진군과 전투로 지쳐 있었으니 공격했으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과론일까요?

한편 청의 좌익군은 동선역에서 김자점의 공격을 받았지만 곧 진군을 계속해 18일에 한양에 입성합니다. 이 때 유도대장 심기원은 6000을 거느리고 방어하고 있었는데, 적군이 오자 삼각산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한양은 이렇게 떨어집니다. 좌익군은 5군 6000여명을 삼각산에 진출시키고 19일 아침부터 살곶이-신천-삼전도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직행합니다. 그들은 선봉에 이어 원거리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20일에는 청 태종의 본군이 개성에 도착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각 읍에 몽고병들을 분산주둔시킨 후 여유롭게 남하합니다. 위의 이완의 비문이 얼마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때 김자점은 청군을 치지 못 합니다. 청 태종은 27일에 임진강을 도하해 29일에 마침내 한양에 입성합니다. 그는 본군의 5군 2만여명을 한양 일대에 잔류시키고 주력 4만을 이끌고 한양을 출발, 30일에 도착합니다. 그는 남한산성 주변을 겹겹이 포위했고, 아침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났다고 합니다. 이 때의 모습을 병자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청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수효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침 눈이 많이 내린 후,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으므로 온 산야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청의 대군이 도착한 뒤로는 땅 위에 흰 곳이라고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수효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남한산성의 포위는 완성됩니다.

3) 우익군의 진격
한편 청 우익군은 8일 벽동에 진출해 창성, 삭주를 유린하고 구성, 태천을 지나 14일에 영변의 철옹산성에 도착합니다. 여기엔 부원수 신경원이 3000여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죠. 그는 청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500여 명을 출격시켜 공격, 큰 타격을 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깊숙히 진격해서 (전공을 다퉜다고 합니다 -_-; ) 역습을 받아 전멸했죠. 청군은 19일까지 6일 동안 공격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주변에 복병을 배치하고 주력을 안주 방면으로 퇴각시킵니다. 신경원은 유인에 걸려 추격하다가 전멸하고 철옹산성도 매복한 청군에 의해 함락당합니다. 신경원 자신도 포로가 됐다고 하죠.
청군은 다시 진격해 20일에 안주성을 지나 23일에는 중화에 도착합니다. 남하하던 그들은 김자점이 병력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합니다.

그 병력은 도원수 김자점과 황해병사 이석달, 종사관 정태화, 광음현관 변사기, 곡산군수 이위국 등이 이끄는 병력 5000이었습니다. 우익군을 이끄는 도르곤은 강행군으로 따라잡아서 25일 밤에 야습을 감행합니다. 이 때 재령군수 최택선이 전사했고, 김자점은 토산으로 급히 달아났습니다. 이 때 어영군의 포수들은 적을 맞아 크게 이겼고, 적이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다음 날은 서로 버티기만 하다가 서로 군을 물렸습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를 모두 어영군의 힘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후 정태화와 변사기는 담략이 있다 해서 중용됩니다. 이완의 비문에는 이 때 적의 기습을 함경도군이 온 걸로 착각해서 당했고, 그는 화살 3발을 맞고 쓰러졌다가 겨우 귀환했다고 합니다. 이 때 적이 아군의 물자를 가져가려 하자 어영군 100명을 이끌고 기습해서 적이 물러났고, 적이 포위하자 적을 치는 척 하면서 후퇴해서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상처로 더 이상의 활약을 못 했다는군요.

뭐 이것들이 사실이라면 효종 대에 중용된 게 이해가 가죠.

이후 우익군은 6000여명의 병력을 철원 방면으로 진출시킨 후 남은 병력은 계속 진군해서 27일에는 개성을 통과, 28일에 문산에 도착한 후 강화도로 향합니다.

조선군의 피해는 커서 김자점은 남은 병력 2000을 수습해서 양근(양평) 방향으로 후퇴합니다. 여기에 심기원의 2000 병력도 합류합니다.

효종은 나중에 이 토산 전투를 들며 "정예병이 없는 게 아니라 좋은 장수가 없는 거다"고 평가했습니다.

5. 상이 남한산성에 있다
- 입성 직후
12월 16일부터 실록은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로 시작합니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있던 곳입니다. ( 정확히 거기였는지는 다른 학설도 많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게 여겼죠 ) 한양에 근접한 요새라서 수도권 방위의 요충지로 인식돼서 왜란 중에 성곽을 축조하고, 광해군 때인 21년에 대대적으로 수축됐으며, 이괄의 난 후인 26에도 이서를 시켜 대대적으로 개축하죠. 성 내에 수어청을 설치해 확실한 요충지로 쓰려 했습니다. 성 내에는 200여 칸의 행궁과 군사 훈련을 위한 연무장까지 만들고 광주 목사로 하여금 수어사를 겸임하게 해서 광주에서 군량을 지원하게 했습니다. 평야와 떨어져 있어 바깥과 연락하기는 힘들지만 방어에는 최고의 조건을 가지고 있던 곳입니다.

하지만 이 곳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이서의 후임 한명욱은 "산성으로 군량을 옮기면 백성들이 힘들어 하니까" 산성에서 40리 지점에 창고를 만들어 군량과 물자를 모두 거기에 저장하게 합니다. 엔하위키의 표현을 빌리면 최악의 정경유착이었습니다. -_-; 때문에 남한산성에 있던 물자는 쌀 14300여석, 잡곡 3700여석, 피곡 5800여석 및 장 220여독이었는데, 이는 1만 명이 1개월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14000이 넘는 성 내 인원은 최대한 절약해도 60일 정도밖에 버티지 못 하는 상황이었죠. 거기에 무기와 겨울에 대비하는 물자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 했습니다.

따지고보면 왕도 급히 도망쳐 오는 상황에서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성 안에 집결한 것만도 신기한 상황입니다만... 이 정도의 병력에 비해 극히 적은 물자는 성 내를 더 힘들게 했죠. 뭐 이제 성 안의 얘기를 해 보죠.

성으로 오자마자 양사는 책임을 다 하지 못 한 김자점, 신경원, 유림, 임경업을 모두 벌하자고 합니다. -_-; 엥? 당연히 듣지 않죠.

15일에 최명길이 돌아오는데 마부대는 왕제와 대신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인조는 자신의 외종형 구인후의 조카(복잡하네요) 능봉수 칭을 (종친에게 내리는 명칭인 듯. 그럼 이름은 구칭일까요) 자신의 아우로 하고 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바꿔서 보내기로 합니다. 병자록에는 왕자로 돼 있는데 일단 실록을 믿고 가 보겠습니다. 흐름을 보면 처음엔 왕제, 퇴짜 놓고 왕자로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16일
하지만 그들은 바로 들켜버립니다. 마부대는 "정묘년에도 가짜를 보냈는데, 니는 진짜 왕제냐?"고 했는데 우물쭈물했고, 심집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에 박난영에게 묻자 그는 진짜 왕제고 진짜 대신이라고 했는데, 누굴 속이냐면서 바로 죽였다고 합니다. 오랜 포로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에 돌아와서도 열심히 일했던 박난영은 이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습니다.

병자록에는 어이 없는 사실이 적혀 있는데, 이 때 심집이 "나는 평생 충과 신(信)을 말해 왔다. 오랑캐라 하더라도 속일 수 없다"고 하며 "나는 가짜고 능봉군도 가짜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능봉군이 뒤늦게야 진짜라고 했지만, 이미 늦었죠.

... 이게 진짜라면 -_-;;; 이거 칭찬해 줘야 되요?

이 날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인조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 쟤네들 말이 계속 다르니 세자도 보내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신하된 자로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만 못 하니 내 머리를 어전에서 부수고자 합니다
- 적병이 쇠약한 틈을 타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군사가 겁 먹고 있지만 한 번 이기면 생각이 바뀔 테니 적의 머리 하나에 은10냥씩을 주고 싫다면 벼슬을 주어 군사를 모집하면 응모자가 없겠습니까.

도체찰사 김류는 지면 어쩌냐고 반대합니다. 나만갑은 이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장들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고, 다만 눈물을 흘리고 탄식으로 날을 보내면서, 모두 내 말을 허술한 소리라고 했다."

한편 이 때 이서가 병으로 원두표로 교체됩니다. 이서는 전반적으로 까이는 기록이 많은데, 이 때 남한산성에 있는 물자가 모두 이서가 비축해 놓은 거라서 뒤늦게 참으로 나라를 지킬 만한 신하요 충성을 다했다고 칭찬받았다고 합니다.

- 17일
(실록에는 위의 일도 17일로 기록돼 있습니다)
이 날 적이 남쪽으로 가는 길을 끊는 걸 알게 된 모양입니다. 김류가 몰래 빠져나가 남쪽으로 달아나자고 건의하는데 인조는 어찌 혼자만 도망갈 수 있을 거냐고 거부하죠. 아직 좌익군이 도달하기 전이니 요행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가정일 뿐이죠. 이 때 의논할 때의 기사가 참 절절한데 전체를 직접 링크하겠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5%88%EB%82%A8&keyword=%EC%95%88%EB%82%A8

여기서 인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어찌할 것인가"하니 신하들이 모두 울며 "모두 신들이 형편 없어 빚어진 겁니다. 전하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죠. 인조는 은근히 "애x끼들이 (본문은 연소한 자가) 과격해서 이런 화를 부른 거다. 사자를 너무 배척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거다"고 그들을 탓 하고 대신들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인조는 한 발 빼서 "그 논의가 정론이어서 나 역시 거절하지 못 한 거다. 어찌 남 탓을 하겠느냐"고 하죠. 음... -_-a 이어 왕자를 보낼 것을 의논하는데 인조는 "대군이 강도에 있으니 천천히 보내겠다. 세자를 청해도 거절하기 힘들겠지만." 이라고 답하죠. 이 때 세자는 오열하며 뛰쳐 나가 사관 옆에 앉았다고 합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때 김상헌이 난입해서 "니들 뭐하냐? 나는 니들과 한 하늘 아래서 못 살겠다"고 외치며 깽판을 쳤고, 인조는 "지금은 싸울 때 아니니 다 물러가서 머리 식혀라"고 하고 세자는 "서로들 힐난하지 마라. 내가 가지 못 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결정은 내려져서 좌의정 홍서봉과 호조 판서 김신국을 보냅니다. 그들은 "봉림, 인평 두 대군 둘 다 강화도에 있어서 아직 오지 못 했다"고 변명했지만, 마부대는  "세자가 와야 된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도 하릴없이 돌아옵니다.

[ 그 날 밤 김류, 홍서봉, 김신국, 최명길, 이성구, 이경직 등이 인조에게 세자를 보낼 뜻을 알립니다. 인조도 이에 따르기로 하고 그걸 반대하는 이들에게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다"고 했습니다. 병자록은 이 때에 대해 "전하는 듣지 않으셨다"고 했고 자신의 말을 따라 머리 하나에 은 30냥을 준다고 해서 군사들이 "앞 다투어 응했다"고 적고 있는데, 왠지 최명길 등 주화파들을 욕 하고 인조를 변호해 주기 위해 그렇게 적은 것 같습니다. 한편 김상헌은 이걸 듣고 비변사로 가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내 마땅히 칼로 이런 건의를 한 자의 목을 벨 것이다. 맹세코 그 자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이에 김류는 잘못을 깨닫고 대죄했습니다.]


[] 이렇게 한 부분이 병자록에 나와 있는 16일의 내용인데, 상황을 보면 이게 17일인 것 같네요. 제 글의 내용은 실록과 병자록, 연려실기술에 나온 다른 기록들을 재배열한 겁니다. 다들 조금씩 말이 달라서 -_-; 이 때 마부대가 왕제->왕자->세자로 급을 계속 올리면서 계속 협상을 거부하는데 자신의 병력이 4천밖에 안 되니 증원군을 기다린 것 같습니다.

- 18일~20일
인조는 세자를 보내라는 말에 일단 교섭을 단념합니다. 성을 돌면서 병사들을 위무했고, 동문의 망월대에 올라 "청병이 공격해 오면 직접 싸우겠다"고 천명하죠. 한편으로 김자점과 신경원에게 구원을 독촉하는 교서를 보냅니다.

이 날 적이 소규모 병력을 보내서 공격을 시도하는데 북문을 맡던 어영 부사 원두표가 50명을 이끌고 기습, 6명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합니다. 소규모지만 첫 승전이었죠. 이어 19일에는 남문을 맡던 대장 구굉과 군관 이성익이 성문을 나가 20명을 죽이고 돌아오죠. 이 날 온조왕에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비가 오려 하자 김상헌에게 성황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니 바람이 멎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20일에는 마부대의 사신 3명이 성 밖에 도착합니다. 김류는 최명길에게 나가 보게 하라고 했는데, 인조는 "명길이 나갈 때마다 속는다"-_-; 고 하며 김신국과 이경직을 보냅니다. 병자록에서는 여기서도 자기가 "지금 성문을 열면 사기가 꺾이니까 성 위에서 물어야 된다"고 적고 인조가 그것을 따랐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록 및 잡기에는 김신국을 보냈다고 돼 있죠. 아무튼 돌아온 김신국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호차가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이 돌아간 뒤로 전혀 소식이 없는데, 이제 한(汗)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우리가 양국 백성을 위해 계책을 베풀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마부대가 시간을 끈 이유가 드러난 거죠. 이 날 새벽에 조선군은 남한산성 주변에 불이 있고 저 멀리 (강화도와의 길을 차단한 병력)에도 불이 피워져 있는 것을 보고 적의 규모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날 김자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교서를 다시 보냈고,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도 근왕을 명합니다. 한편 김경징에게 하삼도의 수군을 모두 징집하라고 명하죠. 이걸 맡은 건 선전관 민진익인 거 같은데, 그는 충청도로 명을 전하러 갔다가 용케 성 안에 들어와서 가자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성을 나가죠.

-21~24일
21일에 다시 김신국, 이경직 등이 나갔다 돌아오는데 별 성과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기록된 건 그저 "적이 화호에만 뜻이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죠. 뭐 시간 끌기였죠 -_-a 이 날 충청도 원병이 헌릉(서초구 내곡동)에 도착해 불화살을 쏴서 알립니다. 한편 서문의 어영 별장 이기축은 5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격, 10여 명을 사살했고, 동문에서도 수비대장 신경진이 약간의 전과를 올리죠. 이에 힘을 얻었는지 인조는 다음 날인 22일에 결전을 명합니다. 이 때 적은 5000명으로 공성병기를 끌고 대규모 공격을 가해 왔는데 조선군은 화포를 쏘고 돌과 화살을 날리며 막아냅니다. 북문의 어영군은 적 10여 명을 죽였고, 동문은 30여 명을 죽여 최종적으로 100명 정도를 죽였다고 하는데, 아군의 전사자는 5, 6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인지 마부대가 "왕자랑 대신을 보내도 된다"고 조건을 완화하는데 인조는 듣지 않습니다.
23일에는 적이 1만여명을 이끌고 공격했는데 조정은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 네 영의 병력을 총출동시키고 인조도 북문에서 직접 싸움을 독려했다고 합니다. 조선군은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네 문을 다 열어서 출격해서 큰 성과를 거둡니다. 이 때 조선군은 80여 명이 전사했고 청군은 200여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다만 청은 전사자의 사체를 수습하는 것을 큰 공으로 치기 때문에 그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고 하죠. (200명은 청 쪽 기록인가 봅니다) 이 날 적 수급 하나를 군문에 매달아 놓았는데, 그걸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죠. 인조는 새벽까지 병사들을 위로하며 격려합니다.

24일에는 진눈깨비가 왔는데, 인조가 세자와 함께 비를 맞으며 하늘에 빌었습니다.
"이 고립된 성에 들어와서 믿는 것은 하늘뿐인데, 찬 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반드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내 한몸이야 죽어도 애석하지 않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여 우리 신민을 살려 주소서"
그 내용입니다. 병자록에는 비가 그치고 날도 춥지 않아서 다들 임금에게 감동했다고 적고 있는데, 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한편 이 날 명에 대해 망궐례(북쪽을 보고 절 하는 것)를 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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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농성 부분을 너무 자세히 쓴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더 얘기하다가 잘렸으니 (...) 나머지는 다음 글에서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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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08 17:49
수정 아이콘
김훈님의 남한 산성을 읽었는데 너무 비참하더군요 ㅠㅠ
스바루
11/07/08 17: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 소현세자...
나이트해머
11/07/08 18:08
수정 아이콘
식량만 넉넉했다면 남한산성은 몇달이고 버틸 수 있는 곳이였죠.
남한산성이던가, 북한산성이던가. 윤면혁님이 '19세기 수준의 병력이 들어가 있으면 현대 한국군 사단단위로 때려도 막을 수 있을 만한 지형' 이라고 한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단지, 식량이 없었지요. 강화도도 책임자가 좀 그렇고.
인조가 다른건 몰라도 인재보는 눈은 자기 할아버지를 못따라갑니다. 사실 선조나 광해군이였다면 절대 잡힐일이 없었겠지만.(선조 의주행이나 광해군 분조시 움직임 보면 적을 기가막히게 잘피합니다.)
11/07/08 19:43
수정 아이콘
이건 뭐 청군 입장에서 보면 거의 전격전 수준인데요? 기동부대로 지휘부 포위 섬멸..
거기에 그대로 당해준 조선이 더 대단할려나요...
Amunt_ValenciaCF
11/07/08 20:06
수정 아이콘
김자점이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면, 처음 청군의 침입을 확인한 뒤 바로 대처했더라면, 남한산성 안에 창고가 있었더라면...에휴ㅠㅠ
물여우
11/07/08 21:58
수정 아이콘
다소 부족함이 있긴 했어도 나름 이것 저것 준비를 했는데, 한방에 훅 가는군요. 안 될 때에는 뭘 해도 안 되는 건가요?
청 태종이 친정한 것이기에 청도 전쟁을 오래 끌수는 없었을 것 같은데.... 만약 남한 산성에 물자가 넉넉해서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면, 물리치기는 어려웠어도 더 좋은(?) 조건으로 강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Je ne sais quoi
11/07/08 22:25
수정 아이콘
의외로 준비를 하긴 했군요. 그래봐야 별 티도 안 나는 거 같긴 합니다만 -_-;;
Langrriser
11/07/08 23:26
수정 아이콘
남한산성으로 튄 것 자체가 이미 준비고 뭐고 게임은 끝난거라 저는 생각합니다. 막말로 준비 다 되어 있어서 농성준비 끝! 된 상태라 해도 경계병력 두고 사방팔방으로 한반도 자체를 탈탈 털어버리고 그러고도 안나오면 그냥 쿨하게 복귀...조선은 이미 거덜나있겠죠.
전쟁 끝나고 나면 국방 부문이 다시 무너지면 안되는 경우일텐데 이건 뭐 -_-;;; 으음...
진짜 조선시대 국방은 고기덕후 대왕님 이후로는 장군님 말고는 그냥 속만 쓰리고 가슴만 답답한...에이고 -_-;;;
고딩어참치
11/07/09 00:24
수정 아이콘
만약에 병자호란때 조선이 어찌어찌 막아냈다면
중국의 역사도 바뀌었을까요?
11/07/09 03:48
수정 아이콘
눈시BB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언제봐도 정말 글에 정성이 느껴집니다.
혹시 이후에도 계속 연재하실 계획이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호란이후의 다음이야기는 어떤 에피소드인지 알수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엄청 긴 내용이겠지만...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즉 근대화의 모습과 독립운동의 과정을 보고싶습니다만...
그렇게되면 정말 책10권으로도 부족할테지요 하하.......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도 흥미있을거같고...
고려말과 이성계의 조선건국 이야기도 궁금하고...

의외로 돌이켜 보니 한국사는 떡밥이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군요.!!!

호란 연재가 끝나고만약 다음글이 연재된다면 어떠어떤한 주제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살짝 알려주실수 있을까요?

교과서엔 나오지않는 이런 내용 정말 너무 재밌습니다..!!!

그럼 추천누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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